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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말아주세요_
며칠이 지났을까. 이 세계와 아이린의 몸에 적응을 하느라 꽤나 고생을 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사교계를 휩쓸던 아이린은 자취를 감추기로 했고, 최대한 방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찾아오는 박지민은 늘 돌려 보냈다. 아직 나는 두려웠다. 서브 남주인공을 내 동생으로 봐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허무맹랑하게 시간을 보냈을까. 낮잠을 잔 터라 잠이 오지 않았다. 몰래 밤산책이라도 해볼까 싶어서 겉옷을 챙겼다.
덜컥 -
기사들은 아이린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무리 잔인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가문이라지만, 괜한 화풀이를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해버리니 가문의 수치라고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굳이 하루 종일 아이린을 보호해야 되나?라고 생각하는 기사들은 새벽엔 호위를 하지 않는다. 이 사실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 날 테지만, 아이린은 오히려 좋아했다.
밤만큼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도 없겠...!?
문을 열자마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순간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앞에 서있는 자가 자객이 아닌 박지민인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네가 어째서 ··· "

" 이젠 제가 필요 없으신 겁니까. "
대뜸 무슨 소린가 싶어서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내 표정에 오해를 했는지 박지민은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거렸다. 그리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 제가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
애처로웠다. 잠은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안색이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에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혀주고 싶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야...? 머리를 굴렸다. 박지민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기억해 내기 위해서.
" 안으로 들어와. "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진 못한다. 소설에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아이린의 몸에 빙의되어 있어서 그런지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하긴 했다.
언제부터 더라, 아이린이 첩자를 챙기기 시작한 게.
" 참 별 재미없어 보이는 장난감이구나. "
5살치고는 왜소한 몸집.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첩자를 누가 챙겨줬을까. 안 봐도 뻔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할 터인데 성장이 느릴 수 밖에 없겠지.
" ㄱ, 공녀님... "
" 뭐. "
" 쥐 죽은 듯 조용히 살겠습니다. 전 아무 힘도 없으니까ㅏ... 죽이지 말아주세요... "
벌벌 떠는 주제 시선은 내 눈으로 꼿꼿하게 향해했다. 잘도 내 앞에서 살려 달라는 말을 하는구나.
" 그건 내가 알아서 정해. 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내 손으로. "
" ...네. "
" 이제 꺼져, 피곤하니까. "
박지민은 뭣도 아닌 예법을 따라 하며 인사를 올렸다.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겼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귀족의 피가 흐른다 이거지?
.
.
.
.
며칠이 지났을까. 조용한 저택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네가 훔쳤지;;!? "
" ㅇ, 아니에요. 전 훔치지 않았어요...!! "
짝 - !!
" 그럼 너 말고 누가 훔쳤다는 거야?! "
또각또각
" 웬 소란이냐. "
" ...! 공녀님을 뵙습니다. "
바닥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박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 ··· 공녀님, 이 녀석이 제 어머니 유품인 목걸이를 훔친 것 같습니다...! "
" 그래? 그거 참 발칙하구나. "
" 매를 맞아야 됩니다. 이런 못된 버릇을 바로 고쳐야지요! "
" 아닙니다...! 저는 목걸이를 본 적도 없어요...! "
" 그럼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냐!? "
" 지금 일개의 시녀 따위가 나보다 큰 소리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
" ㅈ, 죄송합니다. "
" 요즘 공작가가 많이 조용했나 보구나. 시녀가 감히 자기 주인을 못 알아보고 있다니. "
" 그게 무슨...! "
" 이 애가 언제부터 시녀보다 못한 존재였지? 귀족의 피밖에 흐르지 않는데... 네까짓 게? "
"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미쳤나 봅니다...! "
" 너 그거 중죄인 건 알고 있니? 감히 귀족을 모욕해? 그것도 칼리아 가문을? "
아이린의 차게 식은 표정은 시녀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 기사, 저 발칙한 시녀의 목을 베어 정원에 던져두거라. 몸은 마물 먹이로 주던가 알아서 하고. "
" 예, 공녀님. "
" ㅈ,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공녀님,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
주위에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린이 보여준 경고를 무시했다간 어떤 꼴이 일어날지를 잘 알기 때문이지.
아이린은 박지민 보고 일어서라고 명령했다. 박지민은 휘청거리며 일어났고 죄송하다며 계속 고개를 숙였다.
방치된 상태로 자라왔겠지만 그래도 알겠지.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이 집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충실한 개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 똑똑히 기억해. 아무리 네가 첩자라고 해도 넌 칼리아야. 귀족이면 귀족답게 굴어. 이 제국에서 너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는 자가 몇 안 된다는 걸 알아둬. "
" 높은 자리에 앉았으면 걸맞게 앉아야 되지 않겠니? 가문의 수치가 되고 싶지 않다면 이 악물어. 안 그럼 날아가는 목은 너의 목이 될 테니까. "
" 명심... 하겠습니다. "
" 집사, 얘한테 가정교사를 붙여. 검을 가르칠 기사 한 명도 붙여. "
" 알겠습니다. "
" 칼리아 가문의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리게 해줘야 될 것이다. "
아이린은 으름장을 놓고선 제 갈 길을 갔다. 아무리 가문의 흠이라도 그 흠이 더 이상 가문에 피해를 주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뭐, 애초에 우리 가문에 명예 같은 건 필요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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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지났을까. 박지민은 완전히 칼리아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칼리아 가문의 피가 흘러서 그런지 아카데미도 수석으로 조기 졸업을 했다.
검 실력도 훌륭했다. 어미도 귀족이라 어디 가서 반 쪼가리라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는 게 다행이랄까. 어미가 평민이었으면 상당히 피곤했을 거다.
" 잘했구나. 설마 진짜로 조기 졸업을 해올 줄이야. "

"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
" 가질 거 가질 수 있는 집안에 살고 있는 네가 고작 그거 때문에 조기 졸업을 했다? "
" 제게는 고작이 아닙니다. "
" 어디 얼마나 대단한 소원인지 들어나 보자. "
" 주제넘는다는 걸 알지만... "
" 뭐, 후계자라도 되고 싶은 거냐. "
" 예!!? "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당장이라도 입으로 심장을 뱉을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지민에 아이린은 웃겼다.
" 제가 어찌...! 공녀님이 계시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
" 안 될 거 뭐가 있지? 후계자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
" 아뇨, 아닙니다. "
" 흐응... 네가 그리 단호하다면야. 그래서 뭘 원하는 거지? "
" 공녀님을... "
" ..... "
" 누... "
" ...;; "
" ㄴ, 누... "
" 입 찢어버리기 전에 빨리 말해. "
" 누님으로 부를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
...?
아이린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지민을 쳐다봤다. 얘가 지금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 누구보다 진지했고 떨려 하는 모습이었다.
" 넌 내 동생이다. 우리 둘 다 공작님의 피가 섞여있지 않는가? 네가 날 어떻게 부르든 난 신경 쓰지 않아. "
" 정말이십니까...!? "
" 그럼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이니? "
" 아니죠...ㅎ "
박지민은 드디어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며 울먹거렸다. 아이린은 그런 박지민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얘를 칼리아로 보겠냐고...
" 어디 한 번 불러보거라. "
" ..... "
" 어서. "
" 누님...? "
" 그래(피식 "

" 누님, 앞으로도 저 열심히 할게요. "
" 당연한 소릴. "
" 그러니까 버리지 마세요. "
아이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왜 아직도 저런 말을 꺼내는 걸까.
단지 편하게 대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박지민을 완전한 내 사람으로 만들었지. 시간이 지날수록 박지민이 편했고, 제일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박지민 입에서 버리지 말아 달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끔 챙겨주었다. 물론 그런 나의 행동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가 많았다.
특히 공작부인.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아닐뿐더러 아들이었으니 싫어할 수밖에 없을 테지.
나라도 좋아할 순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까지 박지민이 살아 있는 게 기적이랄까. 모두들 박지민이 얼마 못가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지민의 곁엔 내가 서있었다. 유일하게 나를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을 건든다면 그 누구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비록 황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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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사랑 없이 독하게 자란 아이린에게 지민이는 유일한 숨구멍 같은 존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