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
그분의 등장으로 모든 상황은 정리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또 다른 전쟁의 서막이었다는 편이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박지민, 바닥이 더럽다."
"도련님, 아무리 봐도 바닥이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해 보입니다만."
"더럽다고 했다."
지민은 벌써 다섯번 째 같은 바닥만 닦고 있다. 명수는 바닥보다는 지민의 얼굴에 시선을 맞추고 이를 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여동생이 지민에게 안겨 있었다는 것에 대한 후환인 것 같았다.
"다시 청소하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지민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명수는 지민의 뒷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지민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김명수는 아가씨와 남매 관계에 있는 오빠였다. 물론 호적상에 불과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명수가 소유욕이 강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아가씨만큼은 애지중지 돌보고 자신의 동생이라는 이름하에 소유하고 싶어했다.
"오빠! 바닥 깨끗한데. 더 닦으면 미끌어질 것 같은데?"
아가씨가 아직 술이 덜 깬 상태로 광이 나는 바닥을 보며 중얼거리자 명수는 그 어느때보다 온화한 얼굴로 청소도구를 가지고 오는 지민을 마주본다.
"내가 착각을 했나보군 그래. 지금 보니 깨끗하네. 청소도구는 다시 가져가도 좋아."
집사들은 지민이 제대로 찍혔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자신의 동생을 안았다는 그 이유로 말이다.
"지민이 괴롭히면 오빠도 미워!"
"미안해. 진짜 오빠가 착각해서 그랬어. 지민이 안 미워해. 오히려 내가 특별히 더 애정을 쏟는 친구지. 안 그래? 지민군?"
명수는 행여나 여동생에게 미움을 받을까 짧은 순간에 태도를 바꾼다. 지민을 바라보는 얼굴은 전혀 지민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지만 말이다. 금방이라도 얼굴에 경련이 날 것같은 명수의 웃음 앞에서 지민은 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
"그나저나 테이블에 포도주를 올려둔 사람은 누구지?"
명수의 물음에 석진이 자진해서 명수의 앞으로 다가온다.
"제가 식사를 준비하다가 미처 치우지 못하고 장을 보러나가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포도주랑 포도주스를 헷갈리면 안 돼. 여주야."
명수는 석진을 나무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포도주와 포도주스를 구분하지 못하는 여동생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아니야. 오빠. 나는 포도주스를 먹었어!"
명수는 자신의 뜻을 좀 처럼 꺾는 일이 없다. 분명히 실랑이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곧은 대나무 같은 명수는 여동생의 앞에서 잘 익은 벼마냥 단번에 고개를 숙였다. 윤기는 세상에 별 일도 다 있다는 표정으로 명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명수와 딱 눈이 마주쳐 버렸다.
"왜 그런 얼굴로 날 봐?"
"그냥 하품이 나서 죄송합니다."
윤기는 경악하다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며 상황을 수습했다. 명수는 찜찜한 기분을 기울 수 없었지만 여동생이 헤롱거리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금새 오빠 미소를 짓고 있다. 어찌해서 취하긴 했지만 명수의 생각에 지금처럼 여동생의 속내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명수는 그동안 여동생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여주야."
"응."
"아직도 학교에 다닐 생각이 없어?"
명수의 입에서 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여주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명수와 집사들은 여주의 어두운 얼굴에 모두 긴장을 한 얼굴로 여주를 바라본다.
"난 학교 안 갈 거야. 여기에서 내 집사들이랑 생활하는 게 더 좋아."
"여주야. 그렇지만 학교에 가면 더 좋은 친구들을 만들 수 있어."
"그 친구들은 언제 변할 지 모르잖아."
언제 날 버리고 떠날 지 모르는 거잖아. 여주의 얼굴에는 깊이 자리한 상처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여주야."
여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윤기와 지민이의 손을 붙잡고 명수를 돌아본다.
"윤기랑 지민이는 안 변하잖아. 나 버리고도 안 가잖아. 태형이도, 석진이도, 남준이도, 정국이도, 호석이도 결국 날 버리지 않았잖아. 항상 내 옆에 있어줬잖아."
여주를 이토록 아프게 하는 기억은 뭘까. 어째서 여주는 이렇게나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걸까.
'엄마, 가지마세요.'
'..'
'앞으로 잘 할 게요. 지금보다 잘 할 테니까.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여주의 머릿속에 과거의 아픈 기억들이 다시금 새겨진다. 겨우 아물어가던 상처에 다시 금이 간다. 여주를 지켜보는 집사들과 명수의 표정이 덩달아 침울해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여주의 작은 어깨가 위태로워 보여서 더 이상 아무도 여주가 만들어낸 침묵을 깨지 못했다.
"앞으로 내가 더 잘 할 테니까."
"..."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여주의 눈에서 애처로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버림 받고 싶지 않다. 다시는 아프고 싶지 않다. 다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 홀로 짙은 어둠 속에 갇히고 싶지 않다.
"버리지 않아요. 누가 아가씨를 버려요. 전 언제나 아가씨 옆에 있을게요."
정국은 여주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고 여주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렸다. 명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도 정국은 여주의 마음을 달래는게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다정한 얼굴로 여주를 향해 웃어보인다.
"고마워. 정국아. 고마워."
"고마운 건 저인 걸요. 아가씨 곁에 머물 수 있게 해주셔서."
"..."
"감사합니다. 아가씨."
정국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여주는 더욱 울 것 같은 얼굴로 정국을 덥석 안아버렸다. 집사들 모두가 여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이유라 함은 정국을 바라보고 있는 명수의 눈동자에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기때문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명수의 행동을 멈추게 한 건 여주의 젖은 목소리였다.
"고마워. 정국아. 나 너무 행복하다."
정국이의 품에 안긴 여주는 그 어느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명수는 여동생의 행복한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이를 악물고 자리에 앉는다. 그 순간 만큼은 명수도 집사들도 여주도 하나같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전만해도 밝았던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졌다. 몸을 일으키니 속이 쓰리고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이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 누르는 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응. 들어와."
"아가씨, 깨셨어요?"
방으로 들어온 건 태형이었다. 평소보다 어딘가 신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태형아. 근데 언제 이렇게 어두워졌어?"
"아, 기억 못 하시는 구나. 음, 그러니까 아가씨가 포도주를 포도주스인 줄 알고 드시는 바람에."
"포도주?"
포도주라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머릿속에서 포도주를 먹고 취해 했던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만, 제발. 그만해. 김여주. 이미 지나간 과거를 향해 소리를 쳐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집사들을 부둥켜 않고 무슨 짓을. 기억이 떠오를 수록 민망해져 오기 시작한 나는 태형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어 이불 속에 고개를 묻었다.
"기억 나셨나보네요."
"쪽 팔려."
"왜요? 아가씨 엄청 귀여우셨는 걸요."
믿에서 도련님이랑 집사형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내려오셔서 같이 식사하세요. 오늘 한 끼도 못 드셨잖아요. 태형이는 다정하게 나를 달랬지만 나는 도저히 그들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못 가."
"안 내려가시면 제가 들어서라도 데려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
"태형아."
"그리고."
태형이는 방을 빠져나가려다 말고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본다.
"저는 아가씨라는 분을 만나서 너무 행복해요. 그래서 아가씨한테 항상 감사해요. 영원히 이곳에서 아가씨랑 함께 지내고 싶어요."
"..."
"그냥 뭐 그렇다고요."
태형이 특유의 달콤한 미소와 함께 태형이는 방을 빠져 나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 나에게는 든든한 오빠도 있고 집사들도 있잖아.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혼자가 될 일이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해."
나는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밥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포도주 한 잔 하시겠어요?"
윤기는 내가 나타나자 마자 자신의 앞에 놓인 포도주를 들어 보인다.
"민윤기. 너?"
"왜요, 다시 우리 윤기라고 불러주세요!"
"뭐? 우리 윤기? 여주가 너한테 우리 윤기라고 했다고?"
"도련님, 고정하세요!"
윤기가 약간의 위기를 겪기는 했지만 모두가 모여 앉은 식탁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