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何作为群众演员生存下去

# 5

-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뙤약볕에 살이 탈까 걱정해 치덕치덕 발랐던 썬크림이 녹아내렸다. 흰 국물이 얼굴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꼴만큼은 피하고 싶었기에 나는 서둘러 수돗가로 달려가 물을 틀었다. 쏴아아-, 하며 쏟아져내리는 물을 한가득 손에 머금고 얼굴을 문질렀다. 피부가 얼얼해질 정도로 차가운 물이 뺨에 닿았다. 초여름의 더운 날씨에 발갛게 열이 올랐던 얼굴이 식어갔다. 좀 살겠네. 썬크림의 끈적임이 수돗물에 지워졌다. 얼룩덜룩한 얼굴로 운동장을 활보할 바에야, 까짓 거 살 좀 태우고 말자-,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직까지 물을 콸콸 흘려보내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손의 물기를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 땡볕 아래 열심히 뛰어다니는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신이 나 내뱉는 웃음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아,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줄다리기에 참여하는 각 반 학생들은 지금 즉시 구령대 앞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줄다리기에 참여하는…"

저 멀리서 후줄근한 죄수복을 입은 이유진이 달려왔다. 소맷자락이며 바짓단이며 죄다 볼품없이 헐렁거리는 탓에 이유진의 움직임에 옷이 꼴사납게 펄럭거렸다. 연주야! 우리 모이래! 하는 이유진의 말에 고개만 대충 끄덕이고는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빛에 얼굴에 남아있던 물기가 빠르게 증발했다. 아, 얼굴 땡겨.

"으아, 경찰복 진짜 예쁘다! 나도 죄수복 말고 경찰복 입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치?"

"…저딴 걸 입고 싶었다고?"

"응? 뭐라고 연주야?"

"으응, 나도 아쉽다고!"

"그치! 그래도 죄수복도 꽤 편하니까!"

빨리 가자! 하며 이유진이 내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가지각색의 괴상한 옷을 입고 꺄르륵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우와, 진짜 환자처럼 하고 온 사람도 있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수액 폴대까지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유진에 나는 속으로 경악 어린 비명을 내질렀다. 와, 존나 흑역사…. 미간이 자꾸만 좁혀지는 게 햇볕이 뜨겁기 때문만은 아닐 거란 생각을 하며 나는 이유진을 따라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아아, 체육대회 날이 오고야 말았다.





📘 📗 📕





"헉, 저기 봐, B4다!"

"진짜 잘생겼다… 경찰복도 개잘어울려…."

"태형이한테 잡혀가고 싶다…."

"사진 찍어달라 하면 같이 찍어줄까? 안 찍어주려나?"

"안 찍어줄걸, 쟤네 그런 거 싫어하잖아."

"아쉽다…, 근데 저 옆에 여자애…."

진짜 아이돌이 따로 없네. 누가 학교 인기인들 아니랄까 봐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전교생의 이목을 확 잡아끈다. 게다가 반티까지 입고 있으니 그 효과가 두 배. 옷걸이부터 다르니 그냥 싼 티 나는 반티일 뿐이래도 순식간에 운동장을 경찰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일까, 같은 경찰복 반티를 입고 내 곁을 지나가는 같은 반 남학생 1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주인공 효과란….

꺅꺅대며 열심히 B, 아무튼 그 무리들을 찬양하는 여학생들을 지나쳐 스탠드 맨 위로 올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 하필이면 쓰레기장으로 가는 길과 겹치는 탓에 인적이 하나도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치, 엑스트라 23쯤 되는 나한텐 이런 곳이 딱이라고. 얼마나 편해. 구석에 처박히다시피 해 한창 진행 중인 피구 경기를 흥미 없는 얼굴로 구경했다. 저마다 제 반을 응원하는 소리로 운동장은 시끌시끌한데, 내 주변만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이유라 함은 내 일상에서 오디오 지분 70%를 차지하는 이유진이 옆에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시선이 아는 얼굴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유진이 날쌘 몸놀림으로 요령 있게 공을 피하는 것이 보였다. 오, 하는 짤막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시끄럽고, B, 아니, 남주인공들을 매우 매우 좋아하지만 착한 친구라는 이유진의 타이틀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피구를 꽤 잘 하는 친구. 하긴, 저번 짝피구 때도 바로 아웃당한 나랑은 다르게 꽤 오래 살아남았었지. 익숙하게 공을 턱, 잡아내는 이유진을 보며 생각했다.

"3반 파이팅!"

"김여주 잘한다!"

"여주야, 화이팅-!"

누가 우리의 여주인공 아니랄까 봐 여주의 이름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기야, 여주인공답게 예쁘장한 얼굴에, 선한 눈망울에, 성격도 원만한 여주였으니 인기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여주 옆에 붙어있는 것들이 너무 막강해서 다가오질 못하는 것뿐…. 운동장 한쪽에서 피구 경기를 구경하는(아마도 김여주만 보고 있겠지만…) 남주 후보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음, 현실적으로 쟤네를 이기는 건 좀 무리 아닐까? 근데, 김석진은 어디 갔대?

"피구는 우리 반이 이길 것 같지?"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공을 덥석 잡아내는 여주의 행동에 운동장에 쩌렁쩌렁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잘한다 김여주!!! 그 우렁찬 소리에 한번, 쥐도 새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와 건네는 김석진의 말에 두 번, 깜짝 놀란 몸이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아 깜짝이야, 언제 왔냐?"

"방금. 넌 뭐 경기 안 나가? 하루 종일 앉아있는 것만 본 것 같은데-"

"난 진작 끝났거든?"

"그래? 뭐 나갔는데?"

"…줄다리기."

김석진이 끅끅거리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생긴 거랑 참 안 어울리게 웃는다 싶더라. 근데 왜 얘가 여기 있지. 혹시나 김석진의 팬이라던가, 팬이라던가, 팬을 자처하는 학생들이 나와 김석진이 친근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여태 잘 해왔는데, 여기서 김석진이랑 친하다는 타이틀이 붙기라도 하면…, 절대 안 돼. 몸을 꿈지럭거리며 김석진으로부터 살며시 거리를 두자, 김석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지금 뭐…, 됐다. 아무튼 뭐 더 나가는 거 없고? 체육대회는 오랜만일 텐데, 이거저거 나가보지. 추억 팔이도 하고."

"나 혼자 궁상맞게 추억 팔이 해서 뭐 하니…? 그리고 대학에도 체육대회는 있거든? 근데 너 왜 여기있어? 뭐 할 일 없냐? 누가 보기 전에 빨리 가는 게 어때?"

"꺼지라는 소리를 길게도 말하네. 석진이 상처받아떠."

…미쳤나? 더위 먹었나? 욕이 저절로 나온다. 소설 속 이미지는 다정한데 은근 벽 있는 차도남 아니었냐고. 저번부터 캐붕 제대로 낸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의 형편없는 애교를 보고 있자니 얼굴이 저절로 구겨지는 것이었다. 참, 까먹고 말 안 한 것 같아 덧붙이자면, 원래의 김석진은 스물일곱이다. 무려, 나보다 세 살이나 많은 스물일곱. 오빠라고 부르라는 망언에 정색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런 혀 반 토막 낸 애교를 부린다고.

"너 눈으로 욕 잘하네…. 학생회 일하러 가던 길이었거든? 곧 갈 거야."

어쩐지 남들 다 입는 반티 대신 단정한 교복 차림이다 했다. 잘생긴 남고생에, 전교 1등에, 지능캐로는 모자라서 이제는 학생회 설정까지 붙여놓은 모양이다. 이런 걸 보고 신몰빵이라고 하는 걸까? 작가는 이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거란 생각으로 소설 속 김석진을 탄생시킨 걸까. 어이가 없어 김석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말했다. 너 지금 나 빨리 꺼지라고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긍정이란다.

"끄악, 차거!"

"됐다, 됐어, 소원대로 난 꺼져준다-,"

목덜미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느낌이 전혀 달갑지 않아 나는 재빨리 양손을 휘저었다. 물기가 맺힌 무언가가 손에 잡힘과 동시에 김석진은 손을 대충 휘적거리더니 홱 가버리는 것이었다. 뙤약볕에서도 아직 미지근해지지 않은 캔 음료를 보던 나는 김석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 마실게! 혹여나 시선을 끌면 안 되니, 적당한 높낮이로 외치는 내 목소리에 김석진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씩 웃어주는 얼굴이 존나게 잘났다. 주인공 버프란.

치익-, 소리를 내며 딴 캔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금세 비어버린 캔을 만지작대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김석진과 대화하는 내내 이상할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뿐만 아니라 김석진을 향해있는 시선도 없었다. 그게 가능한가? 남주인공인데?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김석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것이 첫 번째 위화감이었다.





📗 📘 📕





체육대회라는 지루하고 지긋지긋하고 힘들기만 한(주관적 견해임) 행사가 왜 인터넷 소설 같은 로맨스 소설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나? 못해도 설렘 유발에 사용되곤 하는 몇 가지 종목들을 떠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미션 달리기라던가, 짝피구라던가, 계주나 장애물달리기 등등…. 하지만 가장 클리셰적인 설레는 요소로 사용할 수 있는 종목은 따로 있다. 2인 3각, 로맨스 하면 이게 제일 먼저 떠오르지 않나?

"아앗-,"

"…괜찮아?"

…그래, 바로 이런 장면들처럼 말이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단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체육대회 클리셰 중 가장 흔한 전개는 2인 3각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나와 시각을 공유하지 못하는 여러분을 위해 친절히 지금 은하별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설명해 주자면, 1학년 3반의 2인 3각 대표는 전정국과 여주였고(여기까지만 말해도 대충 상황이 그려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갖가지 종목의 순위권에 들었던 여주인공 답지 못하게, 하지만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답게도 결승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발이 꼬여 휘청이던 우리의 여주인공, 여주를 전정국이 아주 멋있게 붙잡아주는, 그런 장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자, 대충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겠지? 여주의 허리를 전정국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앉아있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에 가까운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팔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두툼한 팔뚝이 여주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주변 여기저기서 또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염병 진짜….

"세상에…, 만약 정국이가 날 저렇게 잡아줬다면 난 당장 쓰러지고 말았을 거야…."

"…그래, 네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되겠다…."

더불어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어김없이 시작된 이유진의 주접 아닌 주접에 내가 영혼 없이 대답했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 날은 더웠고, 이미 뙤약볕 아래 열심히 나돌아다닌 탓에 온몸은 땀범벅이었고, 눅눅해진 반티는 찝찝했기 때문이었다. 좀 덜 피곤했다면 영혼을 10g 정도는 담아서 대답해 줬을 텐데.

"근데, 여주랑 B4들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다잖아-,"

"으응, 그래…?"

"아, 연주 너 몰랐구나? 여주랑 B4들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대! 부모님들끼리도 잘 아시고, 그래서 저렇게 친한가 봐!"

"그렇구나…."

"연주 너는 은근 이런데 관심 없더라? 아무튼! 아무리 오래 알았다지만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아주 없을 수 있을까? 이성적으로 말이야! 5명 다 너무너무 예쁘고 잘생겼잖아!"

나였으면 진작 반해버렸을 텐데! 이유진이 제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외쳤다. 과한 몸짓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겨우 참았다. 나도 좀 궁금하긴 했다. 물론, 이성적인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궁금한 게 아니라, 대체 4:1의 싸움에서 여주를 차지할 찐 남주가 누군지에 대한 궁금함이긴 했지만. 김석진과 박지민이 나와 같은 '빙의자'라는 예외는 있었지만, 뭐, 김석진이 어쨌든 자신들은 소설의 줄거리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설정만 보면 일단 박지민이 유력하기는 한데….

"뭐…, 마음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네 말대로 다 잘났으니까…."

"그치?"

어쨌든, 여주가 남주들 중 하나와 이어지는 건 미래의 일일 테니 나는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대화를 마쳤다. 이유진은 여주와 누가 이어질지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뭐 그래, 상상은 자유니까. 그럴 수 있지.

스탠드에 반쯤 눕다시피 했던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하며 물어오는 이유진에 나는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리곤 화장실이라 답했다. 더워 죽겠다, 화장실도 갈 겸 매점도 들러 시원한 물이라도 하나 사올 생각이었다.

"물 사 올 건데 네 것도 사 올까?"

"앗, 매점도 가려구? 같이 갈까?"

"됐어, 너 방금까지 피구해서 힘들잖아. 쉬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그럼 부탁해, 연주야!"

"으응-,"

여름의 뜨거운 햇빛에서 벗어나 건물의 시원한 공기를 들이켰다. 더워. 이 망할 체육대회, 빨리 끝나기나 했으면 좋겠다.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는 생각했다.

얼음물 두 개를 사들고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땐 거의 모든 학생들이 열광하는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축구가 그렇게 재밌나? 현생에서나 지금에나 스포츠엔 관심도 없던 나였기에 대충 흐린 눈으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룰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나 다름없었기에 봐도 뭐, 별 감흥은 없었지만. 잘 보니 축구 경기를 뛰는 두 반중 하나가 우리 반이라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스탠드 가장 앞줄에 앉아 열띤 응원소리를 내뱉는 아이들의 환호소리가 귀 따갑게 울려 퍼졌다. 개중엔 당연히 우리 반 아이들도 있었다. 죄수복과 경찰복이 한데 어우러져 덩어리가 된 채 괴성을 지르고 있더라. 저 사이에 끼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구먼.

아무튼, 대기업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답게, 이런 체육대회의 우승 상품이 과자 묶음 따위가 아닌 상금이었기에 승패에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지라 자연스레 시선이 운동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우리 반 경기면 저기 남주들도 있으려나? 걔네가 있어야 승률이 오르는데. 주인공 버프를 무시해선 안된다고. 주변에서 응원하는 학생들 입에서 남주 후보들의 이름이 나오는 걸 보면 아마도 남주 후보들 또한 축구 경기에 참여 중인 것 같긴 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이왕 소설 속으로 납치해 올 거면 내 시력도 한 1.5쯤으로 상향해서 보내줄 것이지, 엑스트라에게는 그런 보정도 사치인 건지 난 여전히 비루하기 짝이 없는 시력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스탠드 가장 윗줄에서 운동장에 있는 애들 얼굴을 하나하나 구별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단 소리였다. 그나마 누가 누군지 대충 구별할 수 있을 정도? 예를 들면 저기서 미친 듯이 공을 몰며 골대로 달려가는 전정국이라던가, 그런 전정국을 보조하듯 주변에서 같이 뛰고 있는 김태형이라던가, 눈이 마주쳤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쪽으로 고개가 틀어져 있는 박지민이라던가. 숨을 고르고 있는 박지민에게로 전정국이 공을 패스했다. 상대편을 아주 쉽게 뚫고 박지민에게로 정확히 도착한 공이 박지민에 의해 굴러간다. 박지민이 골대 근처로 가면 갈수록 응원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지민아아아아아앜!!!!"

"박지미인!!! 힘내라아!!!!"

"악!!! 지민이가 골!!! 골 넣었어!!!!"

그 좋은 운동신경으로 순식간에 골대에 공을 날려버린다. 철커덩-, 하며 골대의 그물에 공이 얽혀들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큰 함성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와, 월드컵이냐고. 월드컵에서 득점한 것 마냥 격한 응원소리에 정신을 빼놓고 운동장을 쳐다보았다. 골을 넣고는 제 팀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말갛게 웃는 박지민이 보였다. 쟤가 저렇게 웃는다고, 캐붕 아니야? 박지민의 웃는 모습을 본 게 나뿐만은 아닌지 여기저기서 함성을 가장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미친 지민이 웃는 거 본 사람?"

"돌았다…, 미쳤다…, 천사 아니야?"

아, 여기 소설 속이지, 참. 은하별 고등학교 최고 인기인이자 17 대 1의 싸움에서 이긴 박지민인데, 내가 괜한 생각을 했구나. 반쯤 해탈한 채 박지민을 보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는 박지민의 시선이 이쪽을 향함에 따라 웅성거림과 꺄악-, 하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시선이 내 쪽을 향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아니지. 이 무슨 김칫국 원샷 하는 도끼병 환자 같은 소리야. 아무리 박지민과 나 사이에 '빙의자'라는 공통점이 생김으로써 친분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굳이! 나를! 쳐다볼 만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니고말고.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이번에도 박지민에 의해 처참히 깨 부서지고 말았다.

'나 잘 했 지 ?'

박지민의 입모양이 그랬다. 유독 그 입모양만 선명히 보이는 탓에 두어 번 눈을 끔뻑였다. 뭐지? 하는 의문과 함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여주가 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던가? 그 염병할 소설 로맨스가 하필 지금, 내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열심히 여주를 찾아헤맸다. 하지만 내 시선이 스탠드의 맨 앞줄, 저 아래쪽에 같은 반 아이들과 한데 뭉쳐 열띤 응원을 보내고 있는 여주에게로 닿았을 땐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릴 수밖에 없더라. 설마, 한창 경기 중이다가 갑자기, 이렇게 갑자기 나한테 아는 체를 한건 아니겠지? 거의 전교생에 가까운 애들이 자길 쳐다보고 있는 지금? 어디선가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무슨 소리냐고? 뭐긴 뭐야, 내 평화로운 엑스트라 생활이 깨지는 소리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체육대회의 열기에 잔뜩 신난 아이들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다시 말해, 박지민과 대화 그 엇비슷한 것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단 뜻이었다.

조심스레 검지를 뻗어 내 쇄골 어귀를 콕 집어 가리켰다. …나? 하는 입모양까지 만들어냈다. 설마하니 이 먼 거리에서 박지민이 내 입모양까지 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들었지만, 몇 번이나 말했다시피 여기는 소설 속이었고, 박지민은 주인공답게 온갖 가지 보정을 먹고 이곳에 들어왔으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진짜 보이는 거였어? 아니 그보다, 진짜 나한테 한 말이냐고. 살짝 휘어진 눈이 나를 향해 다시 묻는다. 나 잘했어?

이미 점수는 올라갔다. 이번에는 김태형이 열심히 공을 모는 중이었다. 박지민을 향해 외치던 뜨거운 응원들은 이제는 김태형을 향해 있었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봐도, 한낱 엑스트라 23에 불과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 좋아. 나는 조용히 오른손을 명치께로 옮겼다. 주먹을 쥔 오른손에서 엄지손가락만 빼꼼 내밀어 보였다. 남들이 보기엔 꽤 이상한 모양새겠지만 뭐 어때, 어차피 나한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박지민의 눈이 조금 놀란 듯 크게 뜨이는 듯했다.

"미친, 지금 박지민 웃는 거야??"

"꺄아아아아아악, 지민아아-!!!!"

"나 지민이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거 처음 봐…."

거 참 파급력 큰 웃음이 아닐 수가 없다. 온 얼굴을 써서 환하게 웃어 보이는 박지민을 본 나는 멈춰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저것도 캐붕 아닌가? 아무튼, 저렇게 보니까 그냥 평범한 남고생 1 같기도 하고. 물론, 연예인 뺨 후려칠 정도로 규모가 큰 팬클럽을 가진 남고생에게 평범하다는 수식어는 절대 어울리지 않겠지만. 무더위와 체온에 속절없이 녹은 얼음 물이 페트병 겉면에 송골송골 이슬을 만들어냈다. 얼얼할 정도로 차가워진 손에 얼음 물을 반대 손으로 옮겨 쥐었다. 누군가가 또 골을 넣었는지, 커다란 함성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난데없이 이유진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오래 알았다지만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아주 없을 수 있을까? 이성적으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슬슬 소설 전개가 시작될 때아닌가? 남주들이야 뭐… 못해도 여주한테 호감 정도는 이미 가지고 있겠지. 그럼 여주는? 스탠드 아래서 여전히 열띤 응원을 보내고 있는 여주를 보았다. 아직 여주인공이 사랑에 빠질 타이밍은 아닌가?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여태 읽었던 수십 가지 소설들을 떠올려 보면 그랬다. 남주인공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경우,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을 애진작 여자로 보고 있었지만 여주인공은 절대! 남주인공을 남자로 보지 않는!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천천히 남주인공에게 감겨드는, 뭐 그런 거지….

여주도 별다를 거 없지 않을까? 여기 남주 후보들도, 어…, B, 어쩌고 하는 별칭이 붙을 만큼 잘났으니까. 학기 첫날, 무슨 신상 화장품 소개하듯 남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읊던 이유진과 최은지의 말을 떠올리며 운동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고, 여주인공한테만 친절하고…. 공을 쫓아 달리는 박지민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여주였다면, 진즉 박지민한테 반했을 텐데-,

"…뭔, 시발,"

저 멀리 이유진이 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게 보이는데도 나는 걸음을 멈췄다. 미친, 나 방금 무슨 생각 했냐?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고, 손에 힘이 풀렸다. 얼음 물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깨진 페트병 사이로 차가운 물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여주였다면 박지민한테 반하고 말았을 거라니, 진짜 미쳤나? 드디어 미치고 말았나 내가? 이 무슨 삼류소설 조연이나 할법한 생각을…! 양손으로 내 뺨을 힘주어 때렸다. 짜악-, 하는 찰진 마찰음이 나는 바람에 주변 사람 몇몇이 나를 흘긋대는것이 느껴졌다. 정신 차리자, 어? 한번 의식하고 나니 자꾸만 박지민을 찾아대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내가 생각했다. 이게 다 박지민이 쓸데없이 환하게 웃어 보인 탓이다. 그냥 그 모습이 좀 충격적이었을 뿐이야. 어, 그렇고말고! 형편없이 깨지는 바람에 제 몫을 못 하게 된 페트병 두 개를 쥐어들었다. 손에서 따끔함이 느껴졌다.

망했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발.





📒





Gravatar


에디터픽!!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