游戏内 [系列已停产]

Gravatar


IN GAME

NO. 12

W. 설하

“안 돼, 혼자 가는 건 위험하잖아.”

후,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결국, 돌고 돌아 원점이다. 나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며 내 말에 반박하는 김태형을 무표정한 낯으로 마주했다.

“아, 그래. 그럼 아무런 계획도 없이 우리 셋이 우르르 몰려가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뭐냐고 추궁하면 되겠네, 응? 목숨 버리기 딱 좋은 방법이야, 안 그래?”

“그렇다고 거길 혼자 기어들어가겠다고? 그 쪽지를 쓴 사람이 아리아와 칸나, 데온을 죽인 범인이면? 너, 네 기숙사 호실을 학교 곳곳에 뿌리고 다닌 것도 그렇고, 넌 경각심이라는 게 없냐? 네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것 좀 그만해.”

“너야말로 정신 좀 차려. 지금이 의리 따질 때야? 내 목숨 소중한 줄은 나도 알아, 근데,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한 희생으로 내 목숨 지키고 싶진 않을 뿐이야."

“불필요한 희생이 아니라…,”

“아니면 뭔데? 우리 셋이 우르르 몰려가는 게 우리가 가진 패를 까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심지어 우린 이 쪽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상대방의 패는 단 한 가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 패만 까발리는 꼴이라고!”

들고 있던 카드를 테이블에 던지며 내가 소리쳤다. 노페어, 최악의 패를 내려다본 김태형이 입술을 짓씹었다. 열한시, 동쪽 정원. 짤막한 문장 하나가 가져온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네가 가네, 내가 가네, 시답잖은 걸로 낭비할 시간은 단 1초도 없는데 김태형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혼자는 안된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애초에 내 기숙사 호실을 이용해먹을 때부터 내가 미끼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제 와서 고집을 부리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만들 하지그래? 무슨, 자존심 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소파 한구석을 차지하고는 남일인 것 마냥, 나와 김태형의 말싸움을 구경하던 전정국이 입을 열었다. 다수결로 해, 우린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니까. 하는 그 말에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홀로 동쪽 정원으로 향하는 것에 대해, 나는 찬성, 김태형은 반대, 한마디로 전정국의 선택에 결과가 달려있단 소리였다.

“율리아는 찬성, 김태형은 반대, 그럼 나만 남았네.”

“…….”

“…….”

“그렇다면 나는,”

“…….”

“…….”

“반은 찬성, 반은 반대.”

어이가 없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대는 전정국에 나와 김태형이 싸우던 것도 잊은 채 입을 딱, 벌렸다. 특히나 김태형은 당장에라도 전정국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듯,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 인내심이 닳고 닳아 후작 영식이 제국의 황태자를 두드려패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서둘러 내가 입을 열었다.

“야, 지금 장난 칠 기분 아니거든.”

치킨도 아니고 다수결에 반반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저렴한 언사에 전정국이 얼빠진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태형과 나의 싸늘한 반응에 뒷목을 긁적이던 전정국이 마저 말을 이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으라고…. 너네, 평소에는 머리 잘만 굴리더니 갑자기 왜 이래? 내 말은, 굳이 율리아 혼자가 가는 방법이나 우리 셋이 우르르 몰려가는 방법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고,”

찬성 반, 반대 반 따위의 말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그 말을 삼킨 뒤, 전정국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자세하게 말해. 하는 그 말에 전정국이 씩 웃어 보였다. 테이블에 엉망으로 어질러진 카드를 능숙한 손놀림으로 섞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굳이 패를 죄다 깔 필요가 있을까? 카드 다섯 장을 빼낸 그가 테이블에 카드를 천천히 뒤집어놓았다. 다섯 장의 뒤집힌 카드, 그중 가장 중간에 있는 카드를 전정국이 뒤집었다.

“어쩔 수 없이 패 한 장을 상대에게 깔 수밖에 없다면,”

다이아 퀸(Q), 그 한 장을 밀어 앞으로 내놓은 전정국이 남은 패를 숨겼다.

“나머지는 당연히 숨기는 게 맞지 않겠어?”

“…결국 나 혼자 나서는 게 맞다는 말이잖아?”

“아니, 아니야. 말했잖아, 난 찬성 반, 반대 반이라니까?”

“말장난 좀 집어치워.”

“성질하고는…. 정확하게 말하면, 상대방이 네가 패를 숨겼다고 믿게 만들면 되는 거야.”

전정국의 손끝이 테이블로 향해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의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다이아 퀸(Q), 그리고 스페이드 킹(K).

“사실 우리가 깐 패는 두 장이지만, 상대는 한 장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

“…….”

“이해했지?”

전정국이 웃으며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씩 웃어 보였다. 최악의 패가 최고의 패가 되는 순간.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IN GAME

빛 한 점 없는 정원은 어둡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당장 어디에서 단검이 날아와도 이상할게 없었다. 목숨이 언제 바스러질지 모른다는 상황에 직면해있는 사람 치고 나는 아카데미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하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사람이 몰래 죽어나가기 딱 좋은 장소였다.

아카데미의 동쪽 별관은 주로 군사학부 학생들의 개인 훈련장으로 쓰이는 건물이었다. 해 뜨기 직전의 이른 새벽부터 고된 훈련이 예정되어 있는 군사학부 학생들은 저녁 훈련이 끝난 뒤로는 개인 훈련장에 걸음 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의욕 넘치는 아카데미의 신입생들이야, 아직 개인 훈련장조차 배정받지 못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요컨대, 밤 열한시가 다 되어가는 지금 동쪽 건물은 텅텅 비어있다시피 하다는 뜻이었다. 씨씨티비나 제대로 된 수사기관도 없다시피 한 이 세계에서 사람을 죽이는데 최적화된 장소가 따로 있나? 그냥, 목격자만 없다면 장땡인 것이다.

텅 비어있는 정원을 보며 나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긴장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까딱하면 목이 날아갈 것이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까진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설령 그것이 내 삶이 아닌 율리아의 삶이라 할지라도.

“반갑다는 인사를 좀 험하게 하는 편이네,”

날아오는 암기를 김태형이 준 단검으로 쳐내며 내가 말했다. 살의를 담아 던지진 않았으나, 까딱하다 눈 한쪽을 잃기 딱 좋은 각도.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집어 든 내가 그것이 날아온 쪽으로 다시금 비수를 던졌다. 챙, 하는 마찰음과 함께, 어두운 수풀 사이에 어설프게 숨어있던 수풀 뒤의 누군가가 웃으며 걸어 나왔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나뭇잎 두어 개, 빛 한 점 없는 이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이는-,

“너 되게 감이 좋네? 그런데,”

“…….”

“감이 좋은 건 둘 중 어느 쪽이야? 공녀 율리아야, 아니면 그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이야?”

붉은 머리카락,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 머리카락을 배배 꼬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캐런 케틀린,”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녀의 이름에 그녀가 눈을 홉떴다. 날 알아? 구부정한 자세, 소심한 태도, 바닥을 보는 시선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밝고 명랑한 웃음을 띤 소녀가 내 앞에 있을 뿐이었다. 부스럭, 하며 수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뭐, 그게 지금 내 이름이긴 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아, 나도 너처럼 공녀로 눈을 떴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어설픈 남작 영애가 아니라.”

캐런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가 입고 있던 옷을 한번 훑었다. 때가 탄 소매, 아랫단이 해진 치마, 밑창을 덧댄 구두. 케틀런 남작가의 기울어져가는 사정을 아주 잘 보여주는 그녀의 차림새였다. 나는 어두컴컴한 정원의 뒤쪽을 흘긋, 바라보곤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섰다. 날 불러낸 이유가 뭐야? 하는 내 말에, 캐런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다가왔다.

“어머,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온 줄 알았는데 내가 실례했네?”

“미안한데 내가 말을 빙빙 돌려 하는 걸 정말 싫어해서.”

“왜? 귀족들은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아? 예의 바른 말들 말이야. 아니, 척인가? 예의 바른 척, 반가운 척, 기쁜 척,”

“…….”

“속으론 온갖 욕들을 하고 있으면서, 겉은 허울 좋은 말들로 포장하고…,”

“내가 ‘귀족’이 아니라는 사실은 네가 더 잘 알 텐데.”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내뱉어지는 내 말에 캐런이 얼굴에 유지하고 있던 웃음을 지워냈다. 웃겨, 한국어로 쪽지를 보낸 건 자기면서 끝까지 모른 척은. 나는 속마음을 쯧, 하는 소리로 대체하고는 캐런을 바라보았다.

“재미없네, 율리아 비안 오르테.”

“…….”

“좋아. 네가 좋아하는 본론부터 말할게. 퀘스트, 받았지? 난 네 협력이 필요해.”

“내가 네 뭘 믿고?”

“뭐?"

“설마 플레이어들이 족족 죽어나가고 있는 이 상황에, 무턱대고 널 믿으라는 개소리는 안 할 거라고 믿어.”

내 말에 벙쪄 날 바라보던 캐런이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 치의 거짓됨도 없는 그저 말간 웃음. 나는 허리까지 접어가며 웃는 캐런을 바라보았다. 뭐가 웃긴 거지. 설마 정말 무턱대고 자신을 믿으라는 소리를 할 생각이었나? 그녀가 플레이어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면 허술했고, 그게 아니라면 멍청한 거였다.

“아, 그래. 좋아!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돼? 뭘 어떻게 하면 날 믿을래?”

웃음을 멈춘 캐런이 내게 물었다. 이쯤 되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 엉킨 머리카락을 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어?”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잔뜩 당황한 그 표정이란, 내가 캐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정말 아무런 증거도 없이 날 회유하러 나온 거야? 단순히 ‘플레이어’라는 공통점 하나만을 믿고? 캐런이 당황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바스락, 하며 나뭇가지가 그녀의 발에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나뭇잎을 훑고 지나가며 내는 소리에 캐런에게 다가서는 내 발걸음 소리가 묻혔다.

있잖아, 나는 무조건적인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내가 조곤조곤 말했다. 가뜩이나 목숨줄이 달려있는 문젠데 그딴 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캐런에게 다가서는 내 걸음만큼, 캐런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조금만 더 갔다간 그녀는 아까 그녀가 몸을 숨겼던 수풀에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숨겨둔 패가 있겠지.

“너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있잖아, 사람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서,”

“으, 잠시, 잠시만…,”

“모든 일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의심하고, 또 의심하지, 피곤할 만큼 말이야.”

“……."

“그러다 보면 좀 빠르게 눈치챌 수 있는 거지. 예를 들면 누군가의 허점이라던가, 약점이라던가, 어떤 일에 대한 숨겨진 원인 같은 거라던가,”

캐런의 표정이 변했다. 당황하며 흔들리던 눈동자는 날카롭게 변해 나를 직시하고, 울상을 짓던 입꼬리는 딱딱하게 굳어있다.

“네 어설픈 발연기라던가,”

“…라온!”

“잡아.”

캐런 뒤쪽의 수풀에서 새카만 생명체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나는 몸을 뒤로 뺐다.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자리가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파였다. 그 꼴을 보던 나는 흘긋, 캐런의 표정을 살폈다. 안도감이 가득한 그 표정에 비죽,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더 큰 걸 감추고 있었네. 캐런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새카만 생명체가 그릉, 하는 소리를 냈다.

라온! 하고 외치는 캐런의 표정이 의기양양했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짐승을 빠르게 살폈다. 거대한 몸뚱어리, 그 안을 꽉꽉 채우고 있을 근육, 네 개의 발에 달려 있는 날카로운 발톱과 땅이 파일 정도의 힘.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정황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찾았다, 범인.

“라온! 공녀를 죽, 여…, 어…?”

기우뚱, 하던 거대한 물체가 쓰러진다.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추락한 짐승의 몸뚱이가 짧게 경련했다. 나는 감흥 없는 눈으로 그 꼴을 바라보다 캐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당황한 표정, 당황한 ‘척’ 할 때와는 다르게 정말로 바들바들 떨리는 눈동자, 제 치맛자락을 꼭 쥐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쓰러진 짐승을 보는 눈빛까지.

제 목에 칼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 캐런은 정신없이 쓰러진 짐승만을 살폈다. 아, 아, 안되는데, 프, 플레이어를 다 죽여야, 죽여야 하는데…, 그래야, 내가, 내가…, 정신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말들을 들으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흙이 밟히는 소리를 내며 나는 쓰러진 짐승 앞에 허리를 굽혔다. 미간의 정 중앙에 꽂힌 비수를 뽑아든 내가 다시금 허리를 폈다. 김태형에게 잡힌 채, 멀거니 나를 보는 캐런을 향해 나는 기꺼이 웃어주었다.

“비스트 테이머, 캐런 케틀린.”

“아, 아…,”

“네가 죽인 세 플레이어의 몫을 해낼 준비를 해야 할 거야.”

김태형이 캐런의 뒷목을 내리쳤다. 힘없이 쓰러지는 캐런을 들쳐엎는 김태형을 보며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속 시원하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

캐런은 김태형에게 둘러업힌 채 내 기숙사로 끌려왔다. 정신을 잃은 그녀를 침대 기둥에 꽉 묶어둔 김태형과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러니까, 이 학생을 가둬둘 곳이 필요하다고,"

율리아의 오라버니, 진을 부르는 일이었다. 내가 그에게 '율리아'가 아님을 들켰다는 사실을 들은 김태형도 그에게 부탁해 캐런을 처리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사실에 동의한 바였다. 나는 당황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진을 보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죽일 순 없잖아."

"차라리 죽이는 편이 더 깔끔할 거야, 리아."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너무나도 쉽게 누군가의 죽음을 논하는 진의 모습 때문에. 나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채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 이곳은 내가 살던 곳이 아니다. 다 쓰러져가는 남작가의 영애 하나 죽이는 일쯤이야, 소공작쯤 되는 이에겐 별로 꺼릴 게 없을 정도의 일로 치부되는 세상.

"그러다 이전의 살인사건까지 내가 덤터기 쓰지 않을까? 아무튼, 별로 죽이고 싶지는 않아."

"리아, 이 학생을 어딘가에 가뒀다 탈출하기라도 하면 위험해지는 건 너야. 나라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기꺼운 건 아니지만, 네 안전을 위해서,"

"이 아이도 나랑 같은 상황이야, 오라버니."

"…뭐?"

"이 몸뚱어리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캐런 케틀린이 아니라고."

"……."

"그래서 죽이고 싶지 않은 거야. 나중에 방법을 찾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면 모를까."

내 말에 진의 입이 다물렸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캐런을 살피던 그가 문가에 기대서 있는 김태형을 흘긋 쳐다보았다. 루미안 후작 영식, 반테 라 루미안, 그 또한 제 동생인 율리아와 같은 상황이기에 들이 그렇게 빨리 친해진 것일까? 하는 둥의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공작저로 보내는 편이 가장 안전할 거야. 알엠이 있으니 사정을 설명하면 알아서 처리할 테지."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진이 입을 열었다. 공작 저, 결국 그 방법밖엔 없나? 내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캐런을 가둬두는 편이 가장 낫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아카데미에 그녀를 처박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 언제 플레이어를 죽이겠다고 나설지 모르니까.

나는 진의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책상에 앉아 알엠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꽤 여럿이다, 그중 한 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이려고 해 가둬둘 곳이 필요하다, 아카데미에서는 진이나 내가 신경 쓰기 어려울 것 같아 공작 저로 보내려 한다,라는 내용을 써 내려가는 내 뒤로, 진과 김태형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도 다른 세계의 사람인가?"

"맞습니다. 궁금한 게 많아 보이시는데 앉아서 이야기 나누시죠."

"대체…, 그대나 율리아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 거지?"

"추측하기로는 10명쯤 됩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죠."

"그렇다면…,"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편지에 마침표를 찍었다. 간단한 안부 인사와 함께 용건을 적은 편지를 곱게 접어 편지봉투에 넣었다. 밀랍을 녹여 그 위로 부은 뒤, 오르테 가의 문양이 새겨진 인장을 꾹, 눌렀다. 그럼 이제, 캐런을 공작 저까지 무사히 옮길 방법만 찾으면…,

쾅, 하는 굉음을 내며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캐런이 깨어난 건가 싶어 그녀를 묶어둔 침대 쪽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김태형이 묶어둔 자세 그대로 기절해있는 모습만이 보였다. 그 옆으로, 김태형이 놀라 눈을 홉뜬 채 단검을 쥐고 있는 모습과, 진이 몸을 반쯤 일으키다 만 자세로 방문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방문을 쳐다보았다. 문짝을 부술 듯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전정국이었다.

"…황태자 저하?"

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잡았나?"

전정국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들어오며 내게 물었다. 나는 조용히 묶여있는 캐런을 향해 눈짓했다. 비교적 깔끔한 캐런의 몰골을 확인하는 전정국의 얼굴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전투의 흔적 같기도 한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람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질질 끌고 들어온 것 같기도 하다.

"그건 뭐야?"

전정국의 손에 끌려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을 콕 집어 묻자, 그는 그제야 제 손안의 인물을 기억해 낸 듯 손에 힘을 풀었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두 인영의 입에서 '끄윽,'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물론,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율리아, 이게 대체…,"

부들부들 떨리는 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내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전정국이 데려온 두 명의 남자를 이리저리 살피는 김태형, 당연하다는 듯 내 침대에 걸터앉아 캐런의 상태를 확인하는 전정국, 그리고 난데없는 황태자의 등장에 바싹 얼어버린 진의 모습까지. 개판이네, 응, 개판이야. 나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천천히, 이야기를 좀 나눠 볼까요?"

/

진은 이런저런 거짓말이 추가된 내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김태형이 범인을 잡는 동안, 전정국이 우리와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찾아내 보호하는 역할을 맡기로 했노라고. 아마도 오해가 생겨 싸움으로 번진 것 같다는 내 말은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오해가 생겨 싸움으로 번진 것 같다는 것이 진실, 나머지는 거짓에 가까웠다. 내 말을 들은 진은 자기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다며 알엠에게 보낼 내 편지를 가지고 방을 나섰다. 물론, 나가기 전 몇 번이고 내게 조심해라-, 하는 걱정 어린 경고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고.

진에게는 감춰둔 실상은 이랬다. 나와 김태형이 동쪽 정원에 가 쪽지를 보낸 사람을 확인하는 동안, 전정국은 내 부탁에 따라 서쪽 별관으로 향했던 차였다. '공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우리 셋 모두 동의함에 따라 합의된 일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터진 입가를 문지르는 한 남자와, 자꾸만 전정국의 눈치를 보며 손을 꼼질거리는 다른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전정국을 닦달한 결과 그들 또한 '플레이어'이며, 이미 그들끼리 협력을 맺은 상황에 자꾸만 누군가가 죽어나가니 그들 딴에는 해결 방안을 찾겠다 서쪽 별관을 서성거리던 차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서쪽 별관으로 향했던 전정국을 발견했고, 서로를 '살인자'로 오해하며 벌어진 우스운 촌극 탓에 얼굴 꼴이 그 모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얻어터진 쪽은 낯선 사내들 쪽이었다. 네크로맨서와 서머너. 나이트인 전정국에게 당해 내기에 마법사 계열 직업군은 힘쓰는 데 재능이 없었던 것이었다. 전정국도 얼굴과 팔에 생채기 몇 개를 달고 있긴 했으나, 그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 : 협력]

필수 퀘스트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를 완료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

.

.

제한 시간 : 2D 23H 2M

남은 플레이어 : 4

진행률 : 57%

제외된 플레이어 : 1

사망한 플레이어 : 3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참에 그들과도 협력을 맺어 57%로 오른 진행률을 바라보았다. 절반을 조금 넘는 성공률, 뼈아픈 전력의 손실. 이 퀘스트 실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캐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간 쌓인 게 많았던 것인지, 김태형이 꽤 세게 뒷목을 내리친 탓에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캐런의 뒷목에 올라오는 푸르뎅뎅한 멍 자국을 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 여자가 나머지를 죽이고 다닌 사람인가?"

네크로맨서, 민윤기가 말했다. 이곳에서의 이름이 슈가라고 했던가. 하얗다는 것을 제외하면 달달한 그 가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관이라는 실례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렇노라 대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찡그러진 표정이 볼만했다.

"그런데, 살아남은 사람끼리 할 수 있는 협력은 다 받아낸 것 같은데…, 왜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는 거죠?"

"죽은 사람의 협력을 얻는 데는 실패했으니까. 그리고 잊고 있었겠지만, 쟤도 플레이어라고."

서머너, 정호석의 질문에 김태형이 캐런을 향해 삿대질하며 대답했다. 그의 말마따나, 57%에 그친 진행률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더 이상 올릴 방법이 없을 것이다. 융통성 없는 시스템 같으니라고, 죽은 사람은 좀 빼 줄 것이지 왜 꾸역꾸역 포함시킨단 말인가.

이제 어쩔 셈이지? 민윤기가 물었다. 나는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한 채 내 방에 모인 인원을 확인했다. 리퍼, 나이트, 서머너에 네크로맨서라. 이게 정말 RPG 게임에 불과했더라면, 블래스터인 나까지 포함하면 꽤 괜찮은 조합 아닐까? 하는 잡생각을 하면서. 꽤 많이 남은 제한 시간을 바라보며, 나는 여상하게 대꾸했다. 뭐, 할 일이 더 있나요?

"기다려야죠."

"……."

"다음 퀘스트를."

이제 막 튜토리얼이 끝났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