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 단편 모음

낮이 머무는 시간

서쪽으로 난 창문 너머로 내가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석양의 마지막 잔해들이 붉게 얼룩지며 저물어간다. 나는 무릎을 가슴팍으로 바짝 끌어당긴 채 베개에 기대어 앉아, 내 세계의 어두워지는 하늘이 얼어붙을 듯 만질 수 없는 어제로 바래어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12년 동안 그는 나의 새벽빛이었다. 온 마음을 다해 조용히 헌신했던 나의 여름 바람이자 희망이었던 그는,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나를 이 지독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두었다.

숨이 막힐 듯한 무거운 외로움이 갈비뼈 깊숙이 내려앉는다. 이 잔인한 현실은 단순히 아픈 것을 넘어 내 안을 온통 공허하게 파내고, 결코 내 손을 따스하게 데워줄 수 없었던 먼 하늘의 아름다운 초상화를 쫓으며 평생을 보냈다는 차가운 자각만을 남긴다. 머물 수 없었던 사랑의 무게로 가슴이 저려온다. 나는 눈을 감고 방 안을 삼키는 어둠 속으로 나를 내맡긴다. 계절은 앞으로도 그저 계속해서 차갑게 얼어붙을 뿐이다.

그때, 정적을 깨고 침묵 속에서 문이 가볍게 찰칵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알리는 신호다.

방 안으로 조용한 그림자가 들어서지만, 나는 눈을 감은 채 벽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고개를 들거나 움직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다. 매트리스 가장자리로 다가오는 발소리는 낮고 규칙적이다. 침대 머리맡까지 다가오는 그 일정한 걸음걸이에도 나는 여전히 어둠 속에 가만히 갇혀 있다. 하지만 방 안의 찬 공기가 순간적으로 흔들리며, 이내 낯익고 포근한 향수 냄새가 온실처럼 번져 나간다. 깨끗하고 달콤하며, 마음을 단숨에 진정시키는 그의 고유한 향이 나를 먼저 감싸 안는다. 그 향기는 방황하던 내 정신을 단숨에 현재의 공간으로 붙들어 매어 준다.

내가 미처 눈을 뜨기도 전에, 시린 어깨 위로 두툼하고 포근한 담요가 완전히 감싸인다. 지독했던 겨울의 한기가 단숨에 가로막힌다.

"나를 봐."

낮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리며 나직하게 속삭인다. 언제 들어도 다정한, 붙박이 같은 목소리다.

"먼 하늘 말고, 바로 여기 네 앞에 있는 나를 봐."

지석이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긴장감 속에서, 나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본다.

그의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저 멀리 있던 만질 수 없는 별빛들은 흔적도 없이 바래어 사라진다. 지석이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그의 뺨 위로 부드럽게 감도는 저 깊은 보조개는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다정한 낮의 온기처럼 피어난다. 그는 내 작은 손을 가져가 자신의 커다란 두 손바닥 사이에 소중하게 감싸 쥔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의 선을 아주 천천히, 일정한 리듬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그것은 단단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이자, 자신은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빠져나가는 여름 바람 따위가 아니라 내 발밑을 지탱해 줄 단단한 대지라는 무언의 다짐이다.

그는 품 안의 나를 조금 더 단단히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완전히 홀드한다. 그리고 내 정수리 위에 나직하게 턱을 기댄다. 그의 셔츠에 뺨을 파묻자, 규칙적이고 일정한 심장 박동이 내 귓가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우직한 리듬이 내 요동치던 심장의 속도를 달래듯 서서히 맞물려 간다. 지석은 커다란 한쪽 팔로 내 등을 감싸 안고 가만히 토닥여 준다. 우리를 온전히 가려주는 다정한 침묵이 방 안에 온전히 내려앉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더 이상 사랑의 신호를 찾아 세계의 끝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마침내 나를 온전히 안아주는, 이 눈부신 현실 속에서 나는 온전히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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