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만 제 아내가 되어주세요.

EP.4

계약서를 받은 지 사흘.

김여주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낮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이력서를 넣고, 저녁이면 병원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간호했다.

하지만 현실은 점점 더 냉정했다.

"죄송하지만 수술 날짜를 더 미루긴 어렵습니다."

담당 의사의 말에 여주는 애써 침착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병실을 나오는 순간 벽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통장 잔고는 바닥이었다.

대출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도 이미 여러 번 신세를 진 상태였다.

결국 그녀의 시선은 가방 속 계약서로 향했다.

며칠 동안 수도 없이 읽었던 종이.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게 유일한 방법인가."

작게 중얼거린 여주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한참 망설이던 끝에 저장되어 있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호 "박성호입니다."

여주는 숨을 한 번 삼켰다.

여주 "...저, 김여주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성호는 이미 그녀가 왜 전화했는지 짐작한 듯했다.

성호 "결정하셨습니까?"

여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결심을 입 밖으로 꺼냈다.

여주 "...계약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성호 "알겠습니다."

"..."

"오늘 오후 세 시."

"SH그룹 본사로 와주세요."

"계약서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는 끝났다.


오후 세 시.

여주는 생전 처음 들어와 보는 SH그룹 본사 로비에 서 있었다.

높은 천장.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바쁘게 오가는 직원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여기가... 그 SH그룹...'

긴장한 채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에게 김실장이 다가왔다.

김실장 "김여주 씨 맞으시죠?"

여주 "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리베이터는 맨 꼭대기 층까지 쉬지 않고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넓은 대표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창가 앞에 서 있던 성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검은 정장.

흐트러짐 없는 머리.

무표정한 얼굴.

마치 감정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 같았다.

성호 "오셨군요."

여주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계약서 두 부가 놓여 있었다.

성호는 자리에 앉으며 그날과 같은 설명을 시작했다.

성호 "계약 기간은 1년."

"계약금은 10억 원."

"병원비는 SH그룹 의료재단을 통해 전액 지원됩니다."

"생활비는 매달 지급됩니다."

"결혼 생활 동안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합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

성호 "그리고 한 가지."

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성호 "불필요한 스킨십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

"같은 방을 쓰는 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

"이 결혼은 어디까지나 계약입니다."

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불리한 조항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유리했다.

여주 "...대표님."

성호 "네."

"왜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성호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성호 "이 계약은 저에게도 필요한 일입니다."

"..."

"한 쪽이 손해 보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주는 천천히 펜을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 사인 하나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평범했던 계약직 디자이너의 삶은 끝나고, 재벌가 며느리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었다.

김여주.

성호도 이어서 사인했다.

박성호.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계약서 위에 나란히 새겨졌다.

성호는 계약서를 정리한 뒤 여주를 바라봤다.

성호 "...이제 법적인 절차만 남았습니다."

여주 "네."

"혼인신고는 내일 진행하겠습니다."

"...벌써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성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여주에게는 엄청난 현실감으로 다가왔다.

'내일... 결혼?'

너무 갑작스러워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 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주는 잠시 그 손을 바라봤다.

계약서에 사인은 했지만, 악수 한 번 하는 것도 왠지 어색했다.

결국 그녀도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끝이 맞닿았다.

짧은 악수.

차갑고 단단한 손이었다.

성호 "앞으로 1년."

"..."

"잘 부탁드립니다."

여주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주 "...잘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단지 계약이었던 이 악수가.

언젠가는 서로의 손을 절대 놓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바뀌게 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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