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을 했다.
자의적인 건 아니지만 결과를 따져 봤을 때 당사자가 알게 됐으니 고백한 거나 고백된 거나 다 똑같다. 요며칠은 패닉이었다. 전정국 인생 18년. 아무리 내일 없는 마인드로 살았다곤 하나 제 인간관계마저 파토내고 싶은 마음은 개미 똥구멍만큼도 없었다. 짝사랑 하나 들켰다고 그 반응은 좀 오바지 않나? 정국의 주변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죽을 상인 그에게 죄 이런 식의 반문을 제시했다. 저들에게 닥친 문제가 아니니 한편으로는 좀 냉정해보일 수는 있다마는,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남들이 보기엔 좀 병신 같을 수 있어. 그건 전정국도 인정하는 바다. 근데 상대가 현관문 열면 바로 면대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옆집이라면. 부모끼리도 고교 동창의 연으로 역사가 깊어, 아주 뗄래야 뗄 수 없는 소꿉친구 사이라면. 앞선 전제를 곁들이면 이야기는 그 근본부터 갈아엎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쯤되니 듣던 이들은 백이면 백,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정국을 위로해주곤 한다. 그리고 그걸 떠받는 전정국은··· 하필 친구를 좋아하게 된 제 자신을 존나게 저주하고.
난 왜 씨발... 전화를 그때 받은 거지. XY 염색체끼리 하는 통화는 정말 별 게 없다. 더욱이 남자끼리는 모든 말이 의식의 흐름대로 전개되는 일이 태반이기 때문에 정국은 지금 생각해도 왜 때문에 주제가 롤에서 김여주로 바뀌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냥 뭐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너 접때 봤던 그 여자애랑 무슨 사이냐 물으니, 솔직해 빠진 전정국은 순순히 '아 김여주? 걔, 내가 좋아하는 애.' 했다. 아마도 대뇌를 제때 거치지 않은 원초적인 말이었음을. 그러다 길 한복판에서 당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 전정국?"
"······."
정국은 발끝부터 굳었다. 곧, 좆됐다 싶어 가던 길 유턴했다. 그만치 빨리 달린 적이 손에 꼽을만큼 빨리 달려서, 원래 목적지도 상실하고 도로 집으로 기어들어가 퐁신한 이불에 몸을 통째로 다이빙했다. 애써 피한다고 피한 곳마저 앞집 김여주의 바운더리에 속해 있지만 그나마 최선의 장소 선정이다. 쪽팔림에 못이겨 김밥마냥 돌돌 말다가 벽에 제 머리를 쿵쿵 쥐어박는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들었다. 분명 들었어. 백퍼 들었어. 제 고백 아닌 고백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 김여주의 반응이 뇌리에 선명했다. 게다가··· 전정국 앞에 점점점 그거 뭐냐고! 한평생 김여주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한 가장 어색한 부름을 들었다. 정국은 과연 제 방정맞은 주둥이를 족쳐야 하는지, 아니면 개 호랑말코 같은 발언을 하게끔 판을 깔아준 친구와 절교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뇌했다. 결론은 본인이 나가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국은 시도때도 없이 그때 그 순간을 회상하기에 이르렀다. 화양 피씨방. 거진 지정석이 된 23번 좌석에 앉아 헤드셋을 늘렸다 줄였다 척 봐도 어디 근심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게 주변 사람 텐션까지 떨어뜨리는 마법. 야, 전정국. 접속해. 태형이 재촉하며 옆을 흘긴다. 그러면 옆자리서 멍청하게 헤드셋으로 딱 드르륵 딱 이딴 소리 내면서 앉아 있는 그가 보인다. 아··· 저 새끼 전원도 안 켰어. 마른 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미리 대기화면 띄워놓은 준비된 플레이어 김태형은 자리에 엉덩이 붙인 지가 언젠데 여즉 컴퓨터 본체도 안 킨 얼빠진 친구놈이 이해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니가 게임하자며 미친아. 안 하니? 안 할 거야?"
"김태형."
"파티 안 들어올 거면 말 시키지 마."
"김태형."
"······."
"김태형."
"아 뭐!"
도저히 제 말을 따를 기미가 안 보이는 정국을 두고 먼저 랭겜을 돌리려는 태형이 시작하기 직전 마우스를 멈췄다. 헤드셋을 확 벗고 옆을 본다. 전정국이 안 쓰던 인상까지 쓰며 그런다.
"혹시··· 김여주 안 좋아하는 법 같은 거 없냐?"
듣는 김태형은 어이가 없어. 이게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진정 그리 된 것일까, 하고.
"너 말 하면서도 스스로 안 좆같아?"
"응."
"병이네."
"무슨 병."
"병신되는 병. 병신아."
태형은 원체 말을 곱게 하는 법을 몰랐으나, 왠지 정국의 앞에 서면 더 양아치적 면모를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도 봐, 욕이 안 나올래야 그럴 수가 없다. 며칠 전부터 기집애 얘기로 염병천병을 다 떨더니만 신성한 피씨방에서까지 제 짝사랑 일대기를 꺼내놓지 못해 안달이다. 태형의 딜을 손쉽게 흘려넘긴 정국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건물에 어디 천장 뚫린 데도 없는데 밤하늘을 보는 양 올려보는 눈이 아련하다. 자기 말로는 김여주를 피해다닌 지 일주일 됐단다. 다만 조금의 어폐가 있는 부분은, 김여주도 딱히 그 이후로 전정국을 찾지 않았다는 것. 김태형은 그 대목을 듣고서 게임을 끄고 한참을 깔깔 웃어댔다.
"하··· 진짜 눈물난다."
"진지하니까 웃지 마."
"먼저 웃기질 말든가."
"근데, 니가 생각해도 걔가 나 피하는 거 같냐?"
"어."
"대답 성의 봐라. 1초도 안 돼서 나오네."
성의 문제가 아니라 진짜 그래보여서 하는 말인데. 은근히 던진 묵직한 팩트에 심기가 잔뜩 뒤틀린 낯의 정국이 태형을 야렸다. 몇 번을 생각해도 얘랑 난 상극이다. 롤은 일찍이 포기하고 이젠 라면만 주구장창 먹던 태형이 그릇에 파묻은 고개를 들어 굳이 덧붙였다. 글고 너 같으면 몇 년씩 붙어다니던 애가 너 좋아한다는데, 평소처럼 대할 수 있음? 징그럽잖아. 존나게 징그럽지. 솔직히 그 말에 뭐 하나 맞지 않는 구석이 없어 전정국은 트집을 잡지 못했다. 애당초 전정국이 피한 게 아니라 김여주가 피한 걸지도. 왠지 학교 빨리 오라는 소리도 안 하더라. 이 모든 게 관계 단절을 위한 빌드업이었던가. 그다지도 깊게 파고 들어가니 제 처지에 놓인 처참함이 배가 된다. 정국은 잠시나마 우울해하는 듯 하더니, 벌떡 일어나 김태형 정강이를 찼다.
"억!"
"어 그래 씨발아! 징그러운 나한테 조언 고맙다!"
그 길로 아직 사용 시간이 남은 모니터를 두고 제 몸만 홀랑 빠져나갔다. 남은 건 전정국의 흔적이 깃든 빈 짜파게티 그릇과, 김태형에게 아릿하게 선사된 타박상뿐.
"저게 진짜 처 돌았··· 아, 아."
태형은 정국이 떠나간 후에도 다리를 매만지며 한참을 어이없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