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2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

 

열에 들뜬 잠에서, 범규는 문득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촛불 아래 앉은 여인의 옆얼굴이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꿈인가 싶었다. 아니, 꿈이어야만 했다.

십 년이었다.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지가.

 

 

*

 

 

[십 년 전, 최가의 마당]

 

볕 좋던 날이었다.

 

"이 담에 크면 정말 낭군 각시 하는 거예요."

 

 

어린 여주가 배시시 웃으며 옥패 한쪽을 그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약속이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 웃음소리를, 그 손의 온기를 범규는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

 

 

[현재]

 

"아가씨, 아직 안 주무셨어요?"

 

문틈으로 몸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주 아가씨, 이러다 아가씨가 먼저 몸져누우시겠어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범규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살아 있었구나. 이렇게, 이런 얼굴로 자라 있었구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반가움인지 원망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동시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집이 어느 집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이름을 밝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최가의 자식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어디까지 닿을지.

그를 뒤쫓던 자들의 눈과 귀가 이 조용한 마을까지 따라올지.

그래서 범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기로 했다.

 

 

*

 

 

다음 날 아침, 열이 조금 가라앉자 여주는 조심스레 그의 곁에 앉았다.

 

"정신이 드세요?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범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 아주 잠시 여주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름도, 어디서 왔는지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여주의 눈이 커졌다.

 

"정말 아무것도요?"

 

범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떨궜다.

이마를 짚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거짓말이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다.

동시에, 이렇게 아플 줄도.

 

 

*

 

 

그 소식은 곧 사랑채 너머까지 전해졌다.

김유형은 미간을 좁힌 채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나 추스르게 두어라. 기억이 없다는 사람을 매정히 내쫓을 수야 있나."

 

원래 이 집은 그런 집이었다.

오갈 데 없는 이를 문전박대하는 법이 없는.

낙향한 뒤로는 오히려 그런 마음 씀씀이가 더 짙어졌다는 걸, 여주는 알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범규는 나직이 고개를 숙였다.

그 안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이 집을 향한 것인지, 그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방을 나서며 여주는 단이를 붙잡았다.

 

"단아, 너도 저 사람 낯이 익지 않니?"

"글쎄요, 저는 잘……. 왜요, 아가씨는 아는 사람이에요?"

"모르겠어. 그냥, 어디선가 본 것도 같고."

 

단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도 참, 행색을 보니 아가씨가 아실 만한 사람도 아닌 것 같던데요."

 

맞는 말이었다.

한 평생 양반가 외동딸로 살아 온 여주를 감히 만날 수 없는 행색의 남자였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걸렸다.

여주는 그 낯선 감각을 애써 밀어내며 죽 한 그릇을 들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이름이 없으니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범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아가씨 좋으실 대로 부르시지요."

 

핏기 없이 처연하던 얼굴이, 웃는 순간 전혀 다른 사람처럼 환해졌다.
그 웃음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만 같았다.

 

여주는 저도 모르게 잠시 말을 잃었다.

이상한 사람이다, 생각했다.

이름도 없는 주제에, 왜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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