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시즌2)

68화. 자존심 따위...



현관문을 나서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훈지 씨가 보였다.





나는 훈지 씨의 팔을 잡았다.

훈지 씨의 옆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훈지 씨, 내 얘기 들어봐야죠."





"나랑 각서 썼잖아요.
 
 내가 그렇게 싫다는데 그거 하나 못 들어줘요.

 가만히 보면 정아 씨는

 나에 대한 배려가 1도 없어."






"미안해요. 훈지 씨...

 그런데 상황이란 게 있잖아요.

 나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있구요.

 나가지 말고 내 얘기 먼저 들어요."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훈지 씨, 지금 그냥 나가면 화난 상태잖아요.

 화낼 상황도 아닌데 굳이 감정 소비를 해요.

 잠깐 까페로 가거나 차로 가서 얘기해요 우리."






"나 지금 정아 씨 얼굴

 별로 보고 싶지 않아요."






나는 마지막 수를 써야했다.

어쨌든 그를 막아야 했다.





"내가 이렇게 애원하는데도

 정 나가야겠다면 나를 밟고 가요."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가로로 누워 버렸다.






"빨리 일어나요.

 이게 지금 무슨 짓이에요?"






"싫어요.

 훈지 씨를 이렇게 나가게 둘 수 없어요!!"






나는 누운 채로

간절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훈지 씨가 화를 낼 상황이

 전혀 아니란 말이에요."






훈지 씨는 나의 돌발 행동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엘베 문 열리기 전에

 빨리 일어나요!!'


 


훈지 씨가 낮은 목소리로

긴박하게 얘기했다.





"싫어!!

 화 안 내고 내 얘기 먼저 들어준다고 약속해!!"





훈지 씨는 땅바닥에 누워 있는 나를

한동안 지켜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빨리 약속해요. 내 말 먼저 들어준다고!!"





"알았어요. 알았어...

 빨리 일어나기나 해요.

 무슨 여자가 땅바닥에 누워서...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선 뒤 내 옷을 털어 주었다.





나는 훈지 씨를 안았다.





"예전 같으면

 내 말 먼저 듣지 않는 훈지 씨가

 섭섭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훈지 씨가 속상한 상태로 혼자 있게
 
 내버려 두기 싫어요."





엘리베이터가 우리 층에서 멈추자

훈지 씨가 나를 데리고 계단 쪽으로 숨었다.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고

나는 훈지 씨 목을 다시 당겨 안았다.





"속상하게 한 거 미안해요.

 그런데 미겔에게 그럴 만한 일이 있어요.

 많이 외롭고 힘든 일이 있단 말이에요."


"내가 미겔을 안아 준 건
 
 인간 대 인간으로

 위로해 주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지금 훈지 씨를 안는 마음과는

 전혀 다른 거라구요."





가만히 서 있던 훈지 씨가

팔을 내 등 뒤로 감싸 안았다.





"들어오자마자

 정아 씨 품에 미겔이 얼굴을 묻고 있는데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를 본 정아 씨가

 그대로 있는 게 더 화가 났어요."





나는 훈지 씨에게서 떨어져서 말했다.





"그 때 내가 미겔을 밀어내면

 그거야말로 내가 훈지 씨한테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했다는 의미에요.

 안 그래요?"





훈지 씨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런데...풉..

 거기 드러눕겠다는 생각은

 갑자기 어떻게 한 거에요?"





"나는 훈지 씨 화를 풀어 주는 게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해졌어요."





내 얼굴을 바라보던 훈지 씨가

갑자기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우리 정아 씨가 많이 컸네..."





나는 훈지 씨 귀에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자존심 따위 개나 줘버려."





내 말을 들은 훈지 씨는

눈과 입 모두 동그랗게 벌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의 화가 다 풀린 걸 보고 나서야

나는 그와 함께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 미겔에게 무슨 큰일이 생긴 거에요?"





"미겔에게 비밀을 지켜 주기로 약속해서

 지금은 말 못 해요.

 미안해요..."




나는 훈지 씨의 손을 잡았다.





"훈지 씨.

 인생은 우리가 예측하지 못 한 일들

 때문에 흥미롭기도 한데...

 그런 일들 때문에 너무 괴롭기도 한 것 같아요."





훈지 씨가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나도 오늘 예측하지 못 한 일을

 겪었잖아요.

 정아 씨가 엘베 앞에 드러눕는

 장면을 봤으니까요.

 참 흥미로웠어."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오늘 일로 또 계속 놀릴 생각 하지 말아요.

 그럼 나 진짜 화 낼거야!!!

 긴급 상황이라 그런 거지.

 나 그렇게 길바닥에 눕는

 그런 여자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그를 믿을 수가 없어

그의 새끼손가락을 가져와

억지로 내 새끼 손가락과 걸었다.





훈지 씨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약속 따위 개나 줘버려."





그는 그 말을 남긴 채

계단을 쏜살같이 내려갔다.





"박훈지!!! 이리 와!!!"





"어쩜 애가 그렇게 귀염성 있니?" <69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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