毒
12 人类与吸血鬼


***

머리에 피를 줄줄 흘리며 널브러져 있는 민규를 서영은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인간이었다면 서영은 망설임 없이 그를 도와줬을 것이다.

그러나 민규가 뱀파이어란 것을 알고 있는 서영은 선뜻 도와주고 싶지가 않았다.

죽이고 싶을 만큼 뱀파이어 자체를 혐오하기에.


이서영
…가만히 두면 알아서 죽든 살든 하겠지.

서영은 그를 매정하게 내려다보고는 제 갈 길을 가려고 발걸음을 뗀다.


권순영
어? 서영 씨, 지금 퇴근해요?


이서영
아, 순영 씨.


권순영
저도 방금 막 학원 마감하고 집 가는 중이었거든요.

순영의 원래 직업은 학원 댄스 강사긴 하지만 가끔씩 아버지의 편의점 일을 돕고 있다.

아마 오늘은 학원에서 수강생들을 가르친 것이겠지.


이서영
그러시구나.


이서영
그럼 오늘도 같이 가겠네요.


이서영
덕분에 외롭진 않겠어요.

둘은 일하는 곳이 가까운 데에 있고 마감 시간도 비슷해 많이 마주치다가 인사를 나누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권순영
근데… 저 분은……?

순영은 널브러져 있는 민규를 가리킨다.

아마 그의 거리에선 민규의 머리에 피가 나고 있는 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다면 분명 도와주자고 할 것이 뻔했던 순영을 예상한 서영이 어서 빨리 가자고 재촉한다.

그러나 순영은 민규의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만다.


권순영
헉, 이 분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거예요??


이서영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권순영
우선 119에……


이서영
119는 안 돼요…!!!

서영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이서영
(이 놈은 뱀파이어야. 그러니 병원에 가면 괜히 같이 있었던 나까지 귀찮아질 거라고.)


이서영
(…라고 말할 수도 없고.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지.)

뱀파이어를 살리고 싶지도 않고 119를 불러 일을 더 크게 내고 싶지 않았던 서영은 결국 고민에 빠진다.


권순영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이서영
그게…


이서영
사실 이분이랑 제가 좀 아는 사이인데, 이분이 병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으시거든요.

서영 본인도 구차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썩 석연치 않다.


권순영
그래요…? 그럼 어쩌죠. 이렇게 다쳤는데…


이서영
제가 알아서 치료할게요.


이서영
그러니 순영 씨는 이만 가보셔요.


이서영
내일도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이서영
저는 내일 쉬는 날이라.


권순영
뭐… 알겠습니다.


권순영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해요.


이서영
네, 감사해요.

순영은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애써 캐묻지 않고 수긍하며 제 갈 길을 갔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널브러져 있는 민규를 내려다본다.


이서영
…이걸 어떻게 한담.

그렇게 죽이고 싶었던 뱀파이어가 무방비한 상태로 쓰러져 있다.

이대로 칼로 쑤시기만 한다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쩐지 서영은 죽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듯했다.

막상 피투성이의 뱀파이어가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다.

그녀도 인간인지라 그렇게 싫어하던 뱀파이어에게도 동정을 품나 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누워 있는 김민규는 서영의 부모님과 친구를 죽인 장본인은 아니다.

그저 같은 종족인 뱀파이어일 뿐.


이서영
…그래. 이 뱀파이어가 잘못한 건 아니긴 하지.

그를 동정하는 마음과 뱀파이어를 증오하는 마음이 충돌한다.

증오하는 마음이 커져갈 무렵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피가 자꾸만 눈에 걸린다.


이서영
하… 짜증 나네.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동정이 커진 탓에 서영은 그를 치료해 주기 위해 그를 부축하며 레스토랑과 가까운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

***

그 시각 윤정한의 집.

말끔하던 집이 아까의 여파로 엉망이 되어 있다.


윤정한
…다들 괜찮아?

아무래도 엉망이 된 건 집뿐만이 아닌 듯하다.

이여주
전 괜찮아요.

이여주
그런데 지수 씨가 좀 다치신 것 같아요.


홍지수
나도 괜찮아.


홍지수
그저 벽에 좀 부딪힌 것뿐이야.


홍지수
여주 씨가 김민규 머리를 내리친 덕에 살았지.

이여주
뭐… 그렇죠.

이여주
바닥에 있는 피도 저희 거는 아니에요.

이여주
그러니 걱정 마세요.


윤정한
다행이네.

둘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에 정한은 안심한 듯 보인다.


윤정한
근데 아마 이게 끝은 아닐 거야.


윤정한
둘은 살아있는 한 나를 죽이기 위해 여주 씨를 계속해서 위협할지도 몰라.


윤정한
홍지수 너도 마찬가지고.


홍지수
나에 대한 흥미는 애저녁에 떨어졌지.


홍지수
그 둘은 나를 인질로 잡아 봤자 너는 눈 하나 깜빡도 안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정한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찔거린다.

지수를 인질로 잡았던 때 정한은 아무렇지 않았던 척을 했을 뿐 아무렇지 않지는 않았다.

포커페이스를 할 수 있을 정도로의 이성이 남아 있었을 뿐.

그러나 지수는 아무래도 자신을 쓰고 버리는 패에 지나지 않는다고 윤정한이 생각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홍지수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홍지수
그 둘을 죽일 거야?


윤정한
글쎄.


홍지수
그렇게 친했으면서 정말 죽일 수 있겠어?


홍지수
나는 너의 모든 과거를 알잖아.


홍지수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여주
정한 씨랑 전부터 친한 사이였어요?


홍지수
그건 아니고, 피를 받게 되면서 모든 기억이 저한테 흘러들어왔어요.

이여주
흐음, 그렇군요.

이여주
…그보다 정한 씨.

이여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민규 씨가 이렇게나 당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거예요?


윤정한
우리 원래 선 긋는 사이 아니었나.


윤정한
이런 자세한 과거까지 물어보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여주
그랬죠. 저도 그걸 원했구요.

이여주
그런데 이대로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위협 당하면서 마치 탑에 갇힌 공주처럼 보호 받고 싶진 않아요.


윤정한
…그렇게 알고 싶어?

이여주
알려주는 게 죽기보다 싫다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윤정한
그렇게까지 싫진 않으니 말해 줄게.


윤정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한은 깊게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연다.


윤정한
근데 너무 길어서 자세하게 말하진 못 해.

이여주
상관없어요.


윤정한
그래.


윤정한
…난 사실


윤정한
실험체였어.


윤정한
김민규랑 전원우도 그랬고.


윤정한
우린 같은 시설에서 자랐어.


윤정한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실험인지 조차 모르고 고분고분 따랐지.


윤정한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실험들이 많았어.


윤정한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서로 의지했고.


윤정한
그러다가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어서 나는 그곳에 불을 지르고 그 틈에 도망가기로 마음을 먹었어.


윤정한
그렇게 도망치던 도중 결국 민규와 원우가 연구원에게 잡히게 됐고,


윤정한
그 당시 너무 무서웠어서 그 둘을 버리고 나는 도망쳤지.

정한의 표정은 씁쓸해 보이기도, 죄책감에 절여져 있어 보이기도 하다.


윤정한
뭐, 이게 끝이야.

이여주
그래서 민규 씨가 당신을 그렇게나 죽이고 싶어했던 거군요.


윤정한
맞아.


윤정한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그냥 걔네들 손에 죽었을 거야.


윤정한
근데

정한의 눈길이 여주에게 향한다.


윤정한
소중한 게 생기는 바람에 그렇게 못 하게 됐네.

그의 마음속에 꽃 피운 감정은 단순한 소유욕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

***

그날 윤정한은 어렸을 적 꿈을 꾸게 된다.

그 역겨웠던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