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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한예화, 제발 일어나. 일어나 줘. 제발. 정신 차려.

보건실의 맥 마틸다 선생님께서는,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예화의 넋, 그러니까 정신을 꺼내어 어딘가 먼 곳으로 보냈다고 했다.

그 근거로 한예화는 약 일주일 간을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만 살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맥 마틸다 선생님의 연락으로 그녀의 은사님에게 정신의 재복구를 받아 깨어날 수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그 친절한 태도는 뜯어낸 듯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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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다시는, 다시는 나를 떠나지 마. 예화야.

그리고 예화가 깨어난 지 고작 두 달, 여름방학을 앞에 남겨둔 칠 월에 박지민이 밤중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때 박지민의 눈동자는.

청록색으로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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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헐?

헐, 헐? 헐?

나는 전처럼 입을 쩌억 벌렸다. 이렇게 매일매일 하마마냥 입을 벌려대다가는 입에 파리가 들어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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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힘들게 살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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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어어어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석이 이해했다는 듯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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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왜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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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과거가 기억이 안 나거나,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어?

…헐? 얘네는 왜 다 눈치가 백 단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정호석을 바라보았다. 물론 한예화의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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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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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됐어. 네 과거는 나도 같이 봤으니까. 여기에 실런에서 온 아이가 없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겠네.

정호석은 가만히 달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같이 달을 올려다보았다.

잠깐만,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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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미친 벌써 저녁이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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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밤 아홉 시야, 저주받은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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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야 그 저주받은 그거 안 하면 안 되냐. 왠지 슬퍼지는데.

내가 박지민이 기다릴까 봐 주섬주섬 일어나려는데, 정호석이 내 손에 따뜻해진 목걸이를 쥐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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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석

두고 갈 뻔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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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고오맙다.

방에 조용히 들어섰다. 아아주 조오용히. 약속한 시간보다 세 시간씩이나 더 밖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박지민이 문까지 달려나왔다.

하, 나는 오지게 혼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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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흐윽,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리와, 덜덜 떠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살짝 뜨니, 박지민의 눈에 눈물이 방울거리며 맺혀 있다.

과거를 보고 오니까 얘가 이러는 것도 자연스럽겠다 싶어서,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박지민이 나, 아니 한예화에게 달려와서 몸을 부빈다.

따뜻한 액체들이 어깨로 한가득 떨어진다.

아이쿠, 뜨끈뜨끈해라.

나름 배려해서 가만히 있어줬는데 박지민은 그게 또 별로였나 보다.

잔뜩 악에 받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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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왜, 미안하다고,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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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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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세 시간. 세 시간 늦었어. 조커도 안 통하고, 옥상에도 아무도 없고. 계단을 찾아도 아무도 없고.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내려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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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여기도 아무도 없고, 한 시간 더 있었는데. 그래도. 그래도 안 와서.

박지민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분명 소리를 지른 건 사람인데, 아기 고양이가 우는 거 같은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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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내가 내 발로 그 개새끼한테까지 찾아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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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개새끼?

설마. 설마 아니겠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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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이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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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혹시 박지민 가지고 뭔가 이상한 짓을 벌인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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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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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여린 척. 약한 척, 친절한 연기는 다 해 가면서 지랄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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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그냥 왔어?

박지민이 나를 문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내게 얼굴을 디민다.

이게 벽쿵인가, 뭐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좀, 등이 아픈데?

숨이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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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왜, 사과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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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나 다섯 시간 동안 한예화 때문에 정신 나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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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나 더 이상 못 기다릴 거 같아. 너무, 너무 힘들어. 네가 죽을 거 같아서. 쓰러질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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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각인하자. 우리.

각인?

각인…각인, 뭔지 개념을 알 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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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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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나 기다리는 거 잘 해. 삼 년이나 기다렸는데, 사 년 찍기 전에 성공하고 싶어. 진심이야.

아, 각인!

문득 스쳐간 생각이 있었다. 각인. 열 다섯 살이 되면 원하는 두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것.

원작에서는 한예화의 지속된 공격으로 무너져내린 이여주가, 김태형과 맺는 걸로 나타났다.

각인을 맺은 관계끼리는 언제든 텔레파시가 가능하고, 서로의 위치도 알 수 있게 된다.

근데 그걸, 한예화랑 박지민이 해야 할 관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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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아니. 아직은, 아직은 그러지 말자.

뭐, 중학생 000이라면 이런 잘생긴 얀데레를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만.

한예화가 여태까지 거부해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남의 몸 막 쓰면서 그런 것까지 받아들이면 안 되지.

나는 의지가 굳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한예화의 붉은 눈으로 가만히 박지민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박지민이 내게로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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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사랑해.

뭔가 딱딱한 게 가슴팍에 닿는다. 그리고, 입술이 맞닿았다.

박지민의 혀를 타고서 빨간 기억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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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주

- 박지민, 일어나. 내 말에 따라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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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주

- 저주받은 애 곁에 있더니, 자꾸 걔를 지키려고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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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주

- 한예화를 볼 수 있는 목걸이, 니가 가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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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주

- 니 능력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잡아 뽑으면, 한예화를 다른 세계로 다시 보내는 것 정도야 쉽지?

오 월…

그 때 한예화가 일주일 간 쓰러져 있었던 이유는. 다른 세계로 보내진 것. 내가 이 세계로 온 것.

그렇다는 말은 지금 내 신체에는 한예화가 들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여주는 미래를 바꾸는 박지민의 능력을, 신체가 바뀌어버릴 때까지 모아서 밀어넣은 것이다.

박지민의 신체가 혹사되어 이 일 동안 사라질 때까지.

그럼, 지금은.

뭔가 생각하려고 하는데, 박지민이 입술을 떼내었다.

그리고는 내 귀에 속삭인다.. 시리도록 곱고 날카로운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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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난 네가 한예화가 아닌 걸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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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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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네가 밥을 먹을 때, 스푼을 드는 것도, 나이프를 사용하는 방법도, 좋아하는 메뉴도, 밥을 먹는 속도도 한예화와는 달라.

박지민은 무서울 만큼 무감정한 목소리로 귀에 속삭인다.

뭐야? 얘 진짜 집착의 화신인가 봐. 내가 그 대상이 아닌데도, 몸에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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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네가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정도, 선생님을 바라보는 눈빛, 나를 안는 세기, 목소리의 박자와 사용하는 단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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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밤에 몸을 뒤척이는 정도, 만년필을 쥐는 버릇, 좋아하는 색과 옷을 입는 순서도 한예화와는 달라.

점점 말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내 손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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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위협을 느꼈을 때 놀라는 방법도, 물을 마실 때 컵을 드는 각도도 달라. 무엇보다.

박지민이 나를 차갑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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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 한예화는 날 사랑해.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한예화는 박지민을 절친, 버팀목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얘는 진짜 심각한 사이코다 싶을 때, 박지민이 거기에 제대로 말뚝을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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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넌 한예화가 아니니까, 낙인을 하도록 승낙해도 너에겐 아무런 타격이 가지 않아. 그러니까, 낙인을 지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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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한예화는 그걸 원하지 않는 모양이니까.

얘는 진짜 뇌가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친구… 그거 범죄야…! 막 남의 몸 막 쓰면 안 돼…!

나는 어떻게 해서든 박지민을 정신 차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짜증과 빡침을 가득 우려내어, 곧 죽일 눈빛으로 박지민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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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쓰, 악!

날카롭게 숨을 들이쉰 박지민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엎어진다.

나도 잠깐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문을 잡고 가만히 버텼다.

지민아, 얀데레도 적당히 해야 귀여운 거야.

이 말을 듣고 정신 차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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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한예화는 널 사랑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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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걔는 널 그냥 친구로 생각해. 버팀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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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난 한예화가 가진 모든 물건을 알아. 모두 널 좋아하지 않아.

사실 원작에서 한예화가 좋아한 애는 김태형이었는데.

그것까지 말해 주면 얘가 핀트를 완전 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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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그리고 한예화가 좋아하는 사람은 김태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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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니가 아니라.

박지민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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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흑, 흐흐… 흐흐흐, 흐하하하. 하하하.

처음엔 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박지민은 허리까지 뒤로 젖혀 가며 웃고 있었다.

뭐야 시발 무서워, 아 제발. 잠깐만. 그러지 말아 봐. 아니, 얜 진짜 뭐야.

생판 처음 보는 상급 사이코에 난 너무 무서워져서 한 발 옆으로 움직였다.

박지민이 문 쪽으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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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한예화가 날 사랑하지 않으면, 걔한테 나밖에 없게 만들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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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한예화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예화가 그 새끼를 못 보게 만들면 돼.

와, 세상에. 실제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구나.

나는 경악스러워서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박지민이 내 볼을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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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하지만 한예화의 눈은 너무 예뻐. 마음에 안 든다고 뽑을 수 있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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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화

눈을…뽑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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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그럴 수 없다면, 그 새끼를 죽여버리면 되는 거야.

박지민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저 새끼를 지금 안 말리면 진짜 좆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