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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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이스 반에 머문 지도 벌써 1주일이 지났다. 이곳에 온 첫날부터 호박이니 절벽이니 별의 별 소리를 듣고 나를 꼬마아가씨라고 부르던 잘생긴 악당도 만났었지. 그리고 이 곳에서 일주일을 지내면서 난 초이스반 사람들에 대해서 제법 많이 알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 들어오기 전엔 초이스가 막연하게 숭상 받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초이스는 생각보다 쓸쓸하고 외롭고 상처받은 존재였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제 나도 초이스인가..?
"쟤 초이스 반에 새로 온 여자애래."
"어떤 호르몬을 가지고 있대?"
"글쎄- 아직까지 알려진 건 없는데.. 딱히 쟤 주변에 있어도 별다른 일은 없는 것 같지?"
"그럼 대현 선생님이나 택운 선생님 같은 무효화 호르몬 아니야?"
"에이- 설마, 무효화 호르몬이 얼마나 드문 호르몬인데.. 우리학교 초이스가 대대로 졸업한 전통 있는 학교지만 무효화 호르몬을 가진 초이스는 대현 쌤이랑 택운 쌤뿐이잖아."
"하긴- 그럼 쟨 대체 뭐지?"
매일 학교 안에 있는 기숙사에서 교실로 오는 길이면 나의 호르몬을 궁금해 하는 논초이스들의 대화를 듣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호르몬이 대단한 호르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꺄아아아- 오빠아아아-"
오늘도 어김없이 사람들의 환호성을 이끌고 등장하는 사람은... 분명.. 내가 한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리며 뒤돌아서 환호성이 들리는 쪽을 보자 역시 내 예상대로 인파들 속에 묻혀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태형오빠. 그리고..
"아- 떨어져! 호박탱이들아."
그 속에서 자신에게 홀린 듯 달라붙는 여학생들을 떼어내고 있는 정국의 모습이 보인다. 잉? 전정국이 왜 저 인파속에 있는 거지..?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것 같은 정국의 눈이 때마침 정국을 보고 있던 나와 마주친다.
"오호-"
나를 발견한 정국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진다. 뭐지.. 뭔데 왜 날보고 웃는 건데?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곳을 벗어나야한다. 전정국 저 녀석이 분명 저 일에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어. 내가 재빨리 뒤돌아서서 교실로 향하려는데 얼마가지도 못해서 내 가방은 누군가에 의해 손쉽게 잡혀버렸다.
"뭐냐- 어차피 수업도 안하는데 빈 가방은 뭣 하러 들고 다니냐? 호박."
"네가 알 필요 없으니까 가방 놔줘!"
내가 정국에게 가방이 잡힌 채로 정국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동대어보지만 정국의 손에서 벗어나기란 어려워 보인다.
"정국 오빠! 그 여자앤 뭐에요!"
"꺄- 오빠 제 가방도 들어주세요!"
"역시... 가방 잡는 걸론 별 효과가 없는 건가."
정국이 다시금 자신에게로 몰려드는 인파들을 발견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에게 어깨동무를 한다. 그와 동시에 정국에게 홀린 듯 다가오던 인파들이 잠잠해진다.
"야! 손 내려라!"
내가 정국을 향해 눈을 흘기며 나에게 어깨동무한 손을 내리라고 말하자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하는 정국.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가만히 있어라?"
"어라..? 우리가 왜 여기에 있지..?"
"뭔가 엄청 홀린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응...? 뭐지 이 사람들 전정국이라서 그냥 따라온 거 아니였어?
"설마.. 너 오늘은 태형오빠랑 똑같은 호르몬이 발동한 거야?"
내 물음에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국.
"태형이 형은 어떻게 매일 저렇게 등교하는 건지 몰라- 나 같으면 이틀만 되도 저것들을 다 집어던져버리는..."
내가 정국의 말에 정국을 향해 눈을 흘기자 말을 하다말고 다른 한 손으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정국.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ㅇㅇ아! 나도 좀 구해줘-"
정국의 호르몬이 내 호르몬에 의해서 무효화 되어버리자 정국을 따르던 인파들은 태형에게로 흘러들어가 더 많은 인파를 만들었다. 그 안에서 머리카락을 뜯기기도 하고 성희롱을 당하기도 하는 태형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워보였다.
"태형 오빠를 구해와야겠어."
내가 의지에 찬 모습으로 그 인파를 향해 뛰어들려고 하자 그런 나의 뒷덜미를 덥석- 잡아 세우는 정국.
"이거 놔!"
"야- 네가 가면 난 어쩌고-"
"넌 네 말대로 뒤집어엎든가 하면 되잖아!"
내 말에 한 풀 기가 꺾인 얼굴로 나를 보는 정국.
"그건 그냥 해본 소리라니까."
"아- 그럼 어떡해! 태형오빠 저대로 가루가 되게 놔두란 거야?"
내 말에 한동안 내적인 갈등을 하는 듯 하더니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손을 내리더니 내 손을 잡는 정국. 그런 정국의 행동에 정국을 올려다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인파 속에서 헬프미를 외치고 있는 태형 쪽으로 턱을 까딱거리며 말하는 정국.
"같이 구하러가자- 태형이 형."
그렇게 정국의 손에 이끌려 인파들 속으로 진격! 정국은 내 손을 잡은 채로 단숨에 그 인파를 뚫고 태형의 손을 붙잡아 끈다. 겨우겨우 인파속에서 빠져나온 태형이 이번에는 나에게로 진격하고 덕분에 한 손은 정국에게 잡히고 몸은 태형에게 안긴 꼴이 된 나. 태형이 나를 품에 안는 순간 태형을 뜯어먹을 듯 쫓아오던 인파들이 잠잠해졌고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근데 그건 그렇다 치고 저기 태형오빠랑 정국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여자는 누구..?"
"헐.. 대박."
뭐지.. 나 지금 역적으로 몰리고 있는 분위기인데?
"저기.. 태형오빠 이제 저를 좀 놓아주시면 안 될..."
"안돼... ㅇㅇ아. 나를 좀 도와줘-"
내 말에 태형이 울먹울먹 반짝반짝 빛나는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본다. 태형오빠 도우다가.. 제가 저 논초이들에 의해서 저승 행 급행열차를 타게 될 것 같네요.
"형- 교실 들어가게 이녀석좀 놔봐-"
"ㅇㅇ이 놓으면 다시 논초이스들이 나한테 들러붙을 거란 말이야-"
태형의 말에 내 뒷덜미를 툭툭 치며 말하는 정국.
"여길 잡아- 여길."
"싫어- 전정국 넌 ㅇㅇ이 손잡고 있잖아!"
태형의 말에 나를 잡은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부끄러운 듯 버럭- 하는 정국.
"나도 잡고 싶어서 잡고 있는 거 아니라니까!"
"태형오빠- 그럼 오빠도 제 손 잡아요."
내 말에 나를 자신의 품에서 놓아주는 것이 아쉬운지'치-'라더니 내 손을 꼬옥 붙잡는 태형. 태형오빠는 애가 따로 없다니까. 그렇게 양 손에 전정국과 태형오빠를 달고 교실로 향하는데 때마침 교무실에서 나오시는 택운 선생님과 딱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내가 택운 선생님께 인사를 하자 나를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택운 선생님. 그리고는 내 양 옆에 서있는 태형과 정국을 한번 씩 본다.
".. 사나운 녀석들을 잘 다루는 구나."
"잘 다루다니, 우리가 무슨 펫도 아니고."
택운의 말에 정국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태형은 피식 웃으며 택운을 본다.
"전정국이면 사나운 녀석이란 게 이해가 되는데. 왜 나까지 거기에 들어가는지 모르겠네-"
태형의 말에 택운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태형을 보며 말한다.
"뭐, 그 모습이 좋다면 그 모습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택운의 말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태형이 내 손을 잡아끌며 다른 쪽 손으로 교실을 가리킨다.
"ㅇㅇ아- 빨리 들어가자-"
"아. 네."
엉겁결에 태형의 손에 이끌려 교실로 들어가는데 택운이 정국을 붙잡는다.
"어차피 주사 맞을 거 지금 맞고 가는 게 어때?"
택운의 말에 정국이 택운의 손을 떼어내고는 자신의 손에 잡혀있는 나의 손을 들어 보이며 말한다.
"그것보다 이쪽편이 나한테는 더 잘 먹힐 것 같아서-"
태형과 ㅇㅇ과 함께 교실로 들어가 버리는 정국. 그런 정국을 지켜보던 택운의 표정이 또 다시 어두워진다.
"역시.. 닮았어. 기분 나쁠 정도로 많이.."
"엘- 말도 없이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
검은 머리의 명수가 전에 ㅇㅇ을 처음 만났던 호르몬 고등학교 주변의 벽에 기대어 서있다. 그런 명수를'엘'이라고 칭하며 다가오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의 남자. 그 남자 또한 머리가 검었으며 언뜻 보았을 때 명수와 비슷한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다.
"자꾸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고 그러면 내가 정말 곤란해-"
"이성열."
한동안 말이 없던 명수가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성열을 부른다. 그런 명수의 모습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성열이 명수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선다.
"웬일이야. 네가 내 이름을 다 부르고."
"오늘.. 나와 비슷한 호르몬을 가진 녀석을 봤어."
"너 같은 살인 호르몬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그래. 나처럼 완전한 살인 호르몬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나와 비슷했어. 정대현이 보살펴 주고 있는 것 같았고."
"오호라- 정대현을 만났군. 그래서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건가?"
명수의 말을 들은 성열이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는 듯 명수를 본다.
"김명수."
명수를 부르는 성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성열의 부름에 명수가 성열을 마주보고 날카로운 성열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워하는 명수에게로 향한다.
"네가 정대현과 함께 있었을 때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벌써 잊어 버린거야? 매일 매일 수명을 갉아먹는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살을 찌르는 고통 속에서 살아갔던 게 기억이 나지 않느냐고."
"... 기억해... 기억하니까 그만해.."
명수가 성열의 목소리가 듣기 괴롭다는 듯 몸부림치지만 성열은 그런 명수의 양쪽 뺨을 감싸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게 한다.
"똑똑히 들어. 정대현은, 그리고 저 호르몬 고등학교에 있는 모든 녀석들은 감옥에 갇혀있는 거야. 그 곳에 있으면 넌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단 한 번도 비상해보지 못하고 새장 속에서 죽게돼. 그리고 아무도 너의 죽음을 슬퍼해주지 않아."
성열의 말에 명수의 눈동자가 공허하게 변한다.
"내가.. 그 곳에서 나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뭐지..? 이곳에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슬퍼해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명수의 말에 성열이 명수를 안아주며 명수의 등을 토닥여준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네 마지막 순간을 지켜봐주고 그 곁에서 슬퍼해줄 테니까 말이야."
성열의 말에 명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명수를 토닥여주던 성열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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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운."
"..왜"
"혹시 그 이야기 생각나?"
교무실 안, 대현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택운을 보며 묻자 택운이 대현을 돌아본다.
"나은 쌤이 해주신 이야기 말이야."
나은이라는 이름에 좀처럼 변하지 않는 택운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무슨 이야기."
"이 학교 내에 초이스들의 힘을 빌려 소원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방법이 적힌 종이가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 말이야."
"온통 거짓말투성이였던 여자의 말을 기억해봤자 영양가 없어."
대현의 말에 택운이 원망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대현이 아쉽다는 듯한 눈으로 택운을 본다.
"아직까지.. 나은 쌤을 미워하고 있는 거야?"
"..."
"그 때 나은 쌤은 어쩔 수 없는 결정을 했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택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도망치듯 교무실을 빠져나가버린다. 그런 택운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대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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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가족들에게 잠시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거야. 이번 차에 가족들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도록 하고- 정국이랑 태형이, ㅇㅇ이는 교무실로 오도록. 이상 종례 끝."
우와..! 집, 집에 갈 수 있는 건가?
"얼마 만에 집에 가는 건지-"
"하루만- 너와 내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좀처럼 톤이 높아지지 않는 남준이 집에 가는 일이 즐거운 듯 밝은 표정이 된다. 호석도 집에 갈 생각에 들뜬 건지 노래를 흥얼거린다. 대현선생님이 교실을 빠져나가고 정국, 태형, ㅇㅇ이 그 뒤를 따른다. 초이스 반에 남은 아이들은 집에 갈 생각에 하나 같이 들떠있다. 단, 한명. 지민만이 창가에 앉아 쓸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근데 박지민은 어디 갔냐? 이놈은 종례시간에 꼭 사라지더라."
호르몬 억제 주사의 효력이 떨어진 것인지 윤기가 지민이 앉아있는 창가를 보고도 지민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듯 지민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지민은 그런 상황이 꽤나 익숙한 듯 별다른 행동 없이 창가를 내다본다. 다만, 지민의 눈동자에 맺혀 있는 슬픔이 더욱 짙어졌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