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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GAME

NO. 02

W. 설하

[메인 퀘스트 : 전직]

필수 퀘스트

당신은 '크레아 제국'의 공신 가문

'오르테 공작가'의 막내딸

'율리아 비안 오르테'가 되었습니다.

제국의 일원으로써 당신은

앞으로 제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활약하게 될 것입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직업을 선택해야 하며,

[전직]을 완료하기 전까지

'메인 퀘스트'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십시오.

성공 보상 : 직업별 능력치 / 직업 전용 스킬

[전직]을 진행하시겠습니까? Y / N

0D 6H 54M

전직, 원래 세계였다면 흔하디흔한 RPG 게임 속에서나 들었을 그 단어.

서재에 틀어박혀 이런저런 책을 꺼내읽은지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읽던 책을 앞에 펴둔 채, 내 눈앞에 둥둥 떠있는 새파란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내 앞을, 저택의 사서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전직 어쩌고 하는 내용이 담긴 이 파란 창은, 오직 내 눈에만 보인다는 것이. 시녀도,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용인들도, 심지어는 가족들에게도 이 새파란 창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눈앞에 대놓고 괴상한 파란 막 같은 걸 띄우고 다녀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나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창이 누군가에게 보였다면, 나는 진즉 사특한 자로 몰려 심판대에 섰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전직 퀘스트, 게임 화면이 나타날 때마다 알림 창 하단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제한 시간, 시스템은 지금 이 시간 내로 내게 전직 퀘스트를 완료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숫자들의 의미가 무색해지도록 전직 퀘스트를 미루었다. 모든 RPG 게임의 시작이 될 그 퀘스트를 수행한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먼 미래가 되어버릴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굳이 이 퀘스트를 수행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니, 수행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맨 마지막 선택지가 될 것이었다. 이 퀘스트의 도움 없이는 원래 세계로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 내가 이 퀘스트를 수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연고도 없는 이 세계를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쉬울 리 없었다. 혹시나 싶어 뒤적여본 오르테 공작가의 책에도 나 같은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서재를 뒤적거리고, 서재 한구석에 박혀있던 고서를 끙끙대며 해독하고, 저택의 이들에게 은근슬쩍 '다른 세계', '사특한 마법'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으나 죄다 헛수고였다. 그러나 나는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빌어먹을 게임 속에서, 저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 말고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 아주 자그마한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얇디얇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퀘스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듯, 나는 오늘도 서재에 처박혀 책을 뒤적였다.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는 했으나,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이 수도 없이 쌓여있었다. 그러다 보면 혹시 모를까, 아주 작은 단서 하나라도 찾게 될지. 그러던 차에 다시금 눈앞에 펼쳐진 새파란 퀘스트 창을 보고는 가차 없이 가위표를 눌러버렸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솟아서, 괜스레 퀘스트 창의 X 표시를 몇 번이고 눌러댔다. 내 시야를 가리던 새파란 창이 말끔하게 사라졌으나 이미 짜증이 날대로 나버린지라 쉽게 진정되지는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어쩌면 퀘스트가 끝나간다는 불안감에 의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쯤의 퀘스트 제한 시간은 이미 0D 5H 24M. 5시간 남짓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기서 뭐해?"

[크레아 제국의 역사], 제목만 보기에도 참으로 따분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책이었지만, 이 세계에 대한 일말의 지식도 없는 내게는 퍽 도움이 될만한 책이 분명했다. 재미도 감동도 없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던 나는 말없이 책 제목을 보여주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 책 제목을 보더니 키득-, 하는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뭐, 가끔은 그런 재미없는 책도 좋은 스승이 되어줄 때가 있지."

"책 읽으러 왔어?"

"응, 나는 이 책-,"

알엠 비안 오르테, 오르테 가의 차남이자 '율리아'의 둘째 오라비인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읽고 있는 역사서보다 몇 배는 재미없어 보이는, [제국 내 정세와 경제]따위의 제목을 가진 책을. 한눈에 봐도 복잡하기 짝이 없으며, 책을 펼치기만 해도 잠이 솔솔 올 것만 같은 책이 분명했다. 내가 질색하는 부류의 책이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표정을 찌푸러트렸더니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크큭, 하는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는 물어봐, 하며 웃음을 그친 알엠이 다정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랬듯 퍽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있어서, 나도 입꼬리를 허물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 적힌 글자를 계속해서 읽어내려가면서도, 나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내게 필요한 정보와 필요치 않은 정보를 분류하는 일은 꽤 신경이 쓰이는 일이라, 이따금 인상이 저절로 찌푸러지기도 했다. 끝끝내 바닥난 집중력 때문에 나는 얼굴을 양손에 파묻은 채 후우-, 하는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심경이 복잡했다. 반쯤은 바닥난 집중력에 재미도 없는 책의 내용 덕분이었고, 나머지 반은 또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새파란 퀘스트 창 때문이었다.

0D 4H 59M

점점 줄어가는 숫자들. 나는 흘긋 서재의 벽면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곗바늘이 막 6시를 지나고 있던 차였다. 이제 남은 시간은 4시간 남짓, 아마도 오늘 자정까지 이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는다면, 나는 자동적으로 퀘스트를 실패하게 되는 것이었다. 알림 창에 '성공 보상'은 적혀있음에도, '실패 시'의 페널티까지는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퀘스트 실패 시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는 가설이 들어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전직'이라는 간단한 퀘스트마저 실패해버림으로써 하등 쓸모가 없는 사람임을 증명해 보인 셈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고민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퀘스트 창의 'Y'를 눌러야 할지, 'N'을 눌러야 할지. 이 퀘스트의 실패 보상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확신도 없거니와, 혹시라도 다른 페널티가 부과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 또한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무서웠다. 일주일간 'Y'도, 'N'도 누르지 않은 채 버티긴 했지만, 선택할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으니 그제서야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약 일주일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생각해 보려 애썼지만 어느 자그마한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만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은 아닐까 하는, 퍽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N'을 누르자니 후폭풍이 두렵고, 'Y'를 누르자니 여태 버틴 시간이 아까웠으며, 자정까지 버티자니 불안함이 치고 올라와 나를 퍽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내 앞에 놓인 책의 책장이 넘어가질 않자, 알엠이 이상함을 느낀 듯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멍하니 퀘스트 창을 바라보고 있던 내가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반달처럼 곱게 접히며 내게 웃어 보이는 그의 눈을 보니 하염없이 요동치던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보조개가 짙었다. 나도 그를 보며 마주 웃어 보였다.

"뭐가 잘 안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도 있어?"

다정하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내 앞에 있던 책이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제자리인 것을 깨달았다. 혹시 이해가 가지 않아 책장이 넘어가질 않는 것일까, 알엠은 그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나는 급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거 아냐, 하는 내 말에 알엠은 옅게 웃더니 모르는 게 있으면 정말 언제고 물어봐도 된다는 말을 한 번 더 내뱉었다.

다시금 책장에 코를 박고 책을 읽어내려가는 알엠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알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단순한 호기심이기도 했고, 평소 영특하다는 칭찬을 자주 받는 그라면 깔끔한 해답을 내놓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은연중에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책을 툭툭, 건드렸다. 독서를 방해받았음에도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알엠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짙은 보조개가 그의 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왜? 하고 물어오는 그에 나는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오라버니,"

"응?"

"궁금한 게 있는데…,"

"뭐든 물어보래도, 뭔데?"

"…오라버니는, 결과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음?"

"…'한다'와 '하지 않는다', 둘 중 어떤 선택지를 고를 거야?"

내가 물었다. 알엠은 역사 책을 읽던 내게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온 것에 대해 퍽 당황한 듯싶었으나, 이내 내 질문을 곱씹어 보고는 생각에 빠졌다. 큰 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시선을 내리깐 채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말없이 생각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한다'와 '하지 않는다', 지극히 이분법적인 선택지 앞에서 어떤 것을 고르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아니, 애초에 그중에 '옳은' 선택지라는 게 존재하기나 할까? 알엠은 생각보다 오래, 또 깊이 내 질문에 대해 고민했다. 잠시간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내가 살며시 손을 올려 퀘스트 창을 꺼버렸지만, 알엠은 생각에 빠져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이나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던 그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놓은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지난 뒤였다.

"글쎄, 고민해 봐도 정답이 잘 떠오르지 않네."

"…그래?"

"응, 하지만 결론은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어떤 결론? 오라버니는 무슨 선택을 할 건데?"

알엠이 빙긋 웃었다. 읽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덮어 보이고는 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잠시간 말이 없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네 질문은 처음부터 '한다'와 '하지 않는다'라는 선택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그 부분을 조금 비틀어 생각해 보면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예를 들면, 그 선택지처럼 너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는 거야. 어쩌면 네 질문보다 아주 조금은 쉬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결과?"

"쉽게 말하자면, 내가 '한다'를 골랐을 때 일어날 일들을 A라 하고, '하지 않는다'를 골랐을 때 일어날 일들을 B라고 했을 때, A와 B를 비교해서 선택을 하는 거지. 어떤 결말이 더 나을지, 상상해보자는 거야."

"하지만 두 선택지의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가정이 깔려있잖아."

"알 수 없을 뿐, '예측'은 할 수 있을 테니까. 선택지를 골랐을 때 필수적으로 일어날 일들은 분명히 존재하니까.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지. 일어날 일들을 예상해보고, 그 결과들 중에 최악을 가정하는 것-,"

"최악?"

"가령 죽음이라던가,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는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야. 최악을 떠올리고 나면 그 뒤는 조금 더 쉬워지지. 바로 A에서의 최악과 B에서의 최악을 비교해보기만 하면 되는 문제가 되니까."

"아…."

"때로는 최선이 아닌 차악이 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율리아."

알엠이 빙긋 웃었다. 그가 다시금 덮었던 책을 펼치고 책으로 시선을 내리고 난 뒤에도 나는 한참이나 그의 대답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최악을 가정하라니, 나로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접근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난 언제나 최선만을 우선시했으니. 예를 들자면 퀘스트를 미루고 서재에 틀어박힌 것이 그러했다. 복잡한 일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꼬아버리는 것보다, 혼자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 또한, '한다'를 선택했을 때, 그러니까 내가 퀘스트를 진행하는 쪽을 선택했을 경우 일어날 일들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 조금만 곱씹어 보아도 의문이 생기는 생각. 정말 그럴까? 하는 아주 자그마한 의심.

심장이 느린 박자로 뛰었다. 아니, 어쩌면 가정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너무나도 명백했기에. 이 세계를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에 남는 것. 그것이 내게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차악은, 죽는 것쯤 되려나. 아니 어쩌면 '죽음' 또한 최악의 범주에 속해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펼쳐진 책의 활자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퀘스트를 진행한다면 어떨까. 이 퀘스트 창을 내게 보낸 이들의 목표가 무엇 일진 몰라도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이 순탄할 리는 없었다. 만일, 언젠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퀘스트를 받게 된다면? 실패 시의 페널티에 내 목숨이 자리 잡게 된다면 어떨까.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이 죽음과 가깝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이 '게임 속'에 들어온 것이지, 내가 진짜 게임 속 캐릭터는 아니니까. '부활'이라던가 하는 천운은 따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한다'를 선택했을 때 나올 수 있는 최악은 '죽음'/ 다른 선택지는 어떨까. 실상 하지 않는다에서 최악 또한 죽음 아닐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최악과 어울리는 결과는 단연 죽음뿐이었다.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두 개의 선택지, 그 최악이 모두 '죽음'을 가리킨다면, 대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나는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현명한 그라면 알 것이다. 책에 집중하던 알엠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했다. 얼핏 제 여동생에 대한 애정도 한가득 보이는 듯싶어서, 나는 잠시간 알엠에게 이 질문을 던져도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에,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말이야…,"

"응-,"

"… A의 최악도 죽음이고, B의 최악도 죽음이라면,"

"……."

"그럼, 그땐 정말로 어떤 선택을 할래?"

죽음, 제 여동생이 그 무거운 말을 입에 담은 것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알엠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도 같았다. 그는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몇 번이고, 내게 이유를 물을 듯이 달싹거렸지만, 어째서, 왜 그런 질문을 하냐며 이유를 묻는 듯한 말은 끝끝내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알엠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노라고. 퍽 김 새는 답변이 아닐 수 없었으나, 이어진 그 말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꼭 골라야 한다면 난 '한다'쪽을 택하는 걸로 할게."

"…왜?"

"그거야, 뭐라도 해보다 죽는 게 더 의미 있게 느껴지니까."

"……."

"죽음에서 멀어지기 위한 발버둥, 그거라도 해봤다는 위안 정도로 생각해 줘."

나는 살고 싶을 것이 분명하니까. 하며 그가 웃었다. 나는 깊게 팬 그의 보조개를 보며 다시금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계속 서재에 머물고 싶어 하는 나를 이끌어 식당으로 데려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알엠이었다. 그는 손수 내 손에 들려져 있던 책을 덮은 뒤 제 옆구리에 끼고는, 내 손을 살포시 잡고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오르테 공작과 공작부인, 그리고 진은 식당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차였다. 식당으로 함께 들어서는 나와 알엠을 보며 남매가 우애가 좋은 것이 참 보기 좋다며 그들이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어쩐지 쑥스러워졌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기왕 저녁 식사 자리에 온 김에 깨작이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빵 쪼가리를 계속해서 입에 집어넣었다. 간간이, 네가 좋아하던 요리라며 제 몫을 내 앞접시에 덜어주는 오르테 공작부인에 접시를 싹싹 비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내 입맛에는 맞지 않는 음식이었음에도 그랬다. 그들에게 나는 그들의 가족인 '율리아'로써 남아야 하지, 연고도 없는 타인으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맛있다는 말을 내뱉은 내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내게는 불편했던, 단란한 가족 식사를 마친 뒤 방에 올라오자마자 나는 먹은 것을 죄다 게워냈다. 억지로, 입맛에도 맞지 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것이 화근이 된 듯했다. 속을 비우고 입을 헹군 뒤에야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울 수 있었다. 아, 옷이 불편한데…, 작게 중얼거렸지만 하루를 고단히 보낸 탓인지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에 나는 결국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눈을 감았다. 피곤해, 힘들어, 퀘스트는 어쩐담, 수많은 생각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지만 피로 앞에서는 소용없다는 듯, 나는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IN GAME

꿈을 꾸었다.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내 주변이 온통 새카만 어둠뿐이었으며 아무것도 딛지 않음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 멀거니 서 있던 나는 서서히 발을 움직였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망설이는 법 없이, 나는 한 발, 한 발을 어둠 속으로 내디딜 뿐이었다. 탁, 하며 무언가가 내 발에 치이는 것도 같았으나, 이내 타닥-, 하는 힘없는 소리와 함께 굴러가는 것을 멈추었다.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었다. 끝이 어딘지도, 시작조차 어딘지도 모르는, 심지어는 내가 이 길을 걷는 이유조차 알 수 없는 그 길을. 그러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디뎠을 때-,

"허억-,"

그곳은 허공이었다. 아까와 같이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었으나, 아까와 달리 디딜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잘못 내디뎠던 발을 거두어들이고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단 한 발자국, 그 앞은 분명히 허공이며, 삐끗했다가는 끝도 없이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만이 나를 가득 메웠다.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죽을 수도 있다. 이 어둠 속에서 아무런 주의도 않은 채 걸음을 내디뎠다가는,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죽어버릴 수도 있다-,

'정말로, 네가 이곳에서 죽는 일이 없을까?'

대답할 새도 없이 누군가가 등을 밀쳤다. 앞은 낭떠러지였으며 디딜 곳이 없는 내가 그 안으로 넘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두려움이 더욱 컸던 탓에 목소리는 나오질 않았다. 끝도 없이 추락하는 내게, 누군가가 속삭였다. '잘 생각해 봐-,'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

흐윽-, 하며 숨을 들이마신 뒤 눈을 떴을 때는, 밝은 빛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침대에 엎어진 채로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려움과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 애를 썼으나,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낯선 목소리를 기억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던 그 순간도 기억했다. 그저 단순한 악몽임이 분명한데도 그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나는 은연중에 그것이 현실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퀘스트 알림 창이 다시금 나타났다. [메인 퀘스트 : 전직]이라 적힌 글씨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 밑으로 적힌, 수많은 글자들을 보며 나는 다시금 꿈에서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죽음을 논하던 그 목소리. 의도가 무엇인지, 혹은 그 꿈을 어째서 꾸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왜?'하는 물음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죽음,"

실감 나는 단어는 아니었다. 당연히, 죽음을 경험해 본 적도 없거니와, 아직 내가 죽을 날은 멀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멍하니 이 세계에서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했다. 사라지는 것. 단순한 의미로는 그랬다. 게임 속 세계에서의 죽음이 다 그렇듯, 부활이라 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고 나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죽음과 이 세계를 빠져나가는 것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목소리가 말했던, 죽는 일이 없을 것 같냐는 질문.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전제를 모두 뒤바꾼다면? 그러니까, 이 세계가 평범한 RPG 게임 속이란 가정 자체를 뒤바꾼다면 말이다. 이 게임이 '평범한' RPG 게임이 아니라면? 아니, 더 나아가서, 이곳이 게임 속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서 죽었을 때…

…'다음'이라는 것이 있나?

내가 '나'로써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율리아'로 내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도 있다는 생각 하나, 나는 그 즉시 침대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두려움이 물밀듯이 차고 올라왔다. 공포심에 초점이 흐려졌다.

0D 0H 04M

4분, 저 시간이 끝나면? 그래서 내가 정말 죽는다면? 다시금 뜬 퀘스트 창을 닫을 생각도 못 한 채, 나는 무언가를 찾기 바빴다. 날카로운 것, 무엇이든 날카로운 것이 필요했다. 가령 칼이나, 가위 같은 쇠붙이들.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것들 말이다. 그것들을 찾아 헤매던 차에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 중 가장 커다란 것을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조각들이 손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프다, 아프다는 감각이 생생했다. 붉디붉은 핏물이 새하얀 도자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화병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재빠르게 내 방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들렸다. 아가씨! 하는 다급한 음성도 들렸으나, 나는 단지 화병을 쥐고 있는 내 손에 모든 감각을 집중할 뿐이었다. 나는 화병 조각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투둑, 하며 카펫 위로 붉은 액체가 떨어졌다. 손바닥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선명했다.

"세상에, 아가씨!!"

"빨리 의원! 의원을 불러오거라!"

"아가씨이! 어서 그거 내려 노, 놓으세요! 빨리요!"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멍하니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다시금 내 시야에 나타난 파란 퀘스트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직]을 수행하시겠습니까?'하는 그 물음과 선택지들, Y / N, 그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종들이 빠르게 내 손에 쥐여진 화병 조각을 치워내고, 바닥에 흩어져 어느새 내 발까지 찔러버린 수많은 날카로운 파편들을 치워냈다. 깊게 그인 손바닥의 상처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 감각이 미치도록 생생했다. 그 끔찍한 감각에 온몸에서부터 소름이 돋아났다. 아팠다. 살을 가른다는 것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아픈 것이었다. 볼을 타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통에 의한 눈물인지, 아니면 알엠이 말한 '최악'이 무엇인지 절절히 깨달아버린 탓에 나는 눈물인지 몰랐다. 내가 눈물을 흘리던, 시종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 헤매던, 퀘스트 알림 창 속의 시간은 줄어들기만 한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였다.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이 게임 속 세계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그것은 내가 생각하던 단순한 죽음과 게임 오버 따위는 아닐 것이며, 'GAME OVER'아래의 'RESET 버튼 따위는 절대 찾아낼 수 없는 것임을. 이 죽음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 진짜 '죽음'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온몸이 격하게 떨려왔다. 이제는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던 두려움이 미친 듯이 솟아올랐다. 만약, 만약에, 내가 N을 선택한 결과가, 아니면 이 숫자들이 죄다 0으로 변하게 되는 결과가 죽음이라면?

0D 0H 0M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모든 게 흐릿하게 보였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 울음소리들이 한데 모여 윙윙거리는 이명을 만들어냈다. 그 고요한 소란 속에서, 내 시선은 오롯이 그 숫자들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