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끝났어, 앞으론 조심해.]
그는 아직도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서둘러 의료단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멀리서 웬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려니 하고 가려는 순간,
남자가 갑자기 일어나 나무가 빽빽히 나있는
곳으로 달려가 숨었다.
[왜 저러지..?]
내가 궁금증에 잠겨 있을 즈음,
멀리서 들려오던 목소리의 주인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레이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저 말인가요..?]
[예, 혹시 이 사진 속 인물을 보셨습니까?]
남자가 보여준 사진 속에는
방금 내가 치료해준 남자가 들어있었다.
그래서 아까 그 남자가 숨었던거구나..
[아뇨, 처음 보는 얼굴이예요.]
[그러시군요, 실례 많았습니다.]
그렇게 남자들이 나와 그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그가 다시 나무 밖으로 나왔다.
내가 가려고 하자
그가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나는 그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고맙...습니다.]
[아...아까 그 사람들..?]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피해야 할 것 같아서 거짓말 했는데
그러길 잘했네.
[그리고, 이 상처..치료도...]
[아, 괜찮아.]
[내가 당연히 해야할 일인데 뭐.]
이제 정말로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뒤를 돈 순간,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뭔가, 그를 두고가기가 좀 그랬다.
남자는 역시나 아까 앉아있던 나무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서있었다.
[저기..]
나도 모르게 말을 걸어 버렸다.
어떻게 하려고....
[같이 갈래?]
[보아하니 갈 데도 없어 보이는데.]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니,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답답하게 정말.
[같이 갈 거야, 안 갈 거야?]
[같이...가요.]
[따라와.]
따라오라고 하자,
남자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좀..
강아지 같았다.
[난 설여주야.]
[너는?]
[김태형....]
나는 태형의 옆으로 갔다.
태형은 내가 가까이 간 것에 놀란 건지,
옆으로 약간 비켜 섰다.
[부담스러우려나..?]
[아....네..]
[그렇구나, 근데 넌 몇 살이야?]
[19살.]
[나돈데, 우리 친구네!]
[친구....라고?]
[응, 친구.]
[어떻게 방금 처음 본 우리가 친구가 돼..?]
[나이만 같으면 다 친구지 뭐.]
[너 친구 안 사귀어 봤어?]
[응.]
응이라고...?
아니, 난 분명히 장난으로,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한 농담이었는데...
진짜란 말이야..?
복장도 웬 귀족 가문 아들같이 입어 놓고
친구를 안 사귀어봤다니...
[어, 미..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괜찮아, 몰랐는데 뭐.]
[근데, 복장을 보니까 귀족 가문 자제같은데.]
[정말로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거야?]
[어..? 어...]
[그렇구나...]
[넌 어느 쪽이야? 백작 아니면 공작?]
[어...공..작가.]
[으음...그래?]
[너는..?]
[난 보다시피, 의사야.]
[나랑 동갑인데..?]
[그럼, 나도 웬만한 의사만큼은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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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말이 없다.
본지 얼마나 됐다고 적응해버렸네...
나와 태형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다, 우리의 목적지인 의료단의 후문에
도착했다.
의료단은 총 3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작은 상처들을 치료해주는 외상병동,
심각한 부상을 치료하고 수술하는 수술병동,
그리고
산모들이 출산을 하는 출산병동이 있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곳은,
외상병동이다.
원래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아이를 받는 일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어쩌다보니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잠겨있는 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형은 그런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일하는 곳은 정문 쪽이기 때문에
후문쪽에 위치한 수술병동을 지나야 했다.
내가 후문으로 올따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이곳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끔찍하다.
몸 이곳저곳이 찢어지고, 뜯겨져나간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흐느끼는 가족들.
더욱 충격적인건,
매초마다 사망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들을 제정신으로 치료해줄 수 있을까..
수술병동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
그러고보니, 태형이는 처음이라
많이 충격받을 텐데.
태형이 걱정돼,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끔찍하지..?]
태형은 또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이게 다, 그 잘나신 귀족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 때문이야.]
[전쟁? 지금 전쟁중이야..?]
태형의 눈이 약간 동그랗게 커졌다.
태형이는 분명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귀족들은 이런 일엔 별로 신경쓰려 하지 않으니까.
왕가도 마찬가지고..
[당연히 모를 거야.]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가 있는 곳이 아니면]
[전혀 신경쓰려하지 않으니까, 당연해.]
여주의 당연하다는 말이
태형이가 왠지 모를 좌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난 귀족들이 너무 싫어.]
[왕가는 더더욱.]
태형이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내가 한 말에 상처를 받은 걸까...?
내가 귀족은 싫다고 해서...?
[아,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내가 귀족가문 전부를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왠지 넌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그럼 왕가는..왜?]
[귀족들이 이 정도면 왕가는 안봐도 뻔하지.]
여주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난 아직 왕가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상황이 이 정도라면......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나도 모를 죄책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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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병동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작은 문이 나왔다.
그 문은
수술병동과 외상병동을 이어주는 문이었다.
나는 아까처럼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태형은 그곳에서도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말도 안돼....]
태형이 작게 읊조렸다.
어떻게 아까 그곳보다 사람 수가 확연히 적지..?
말만 들었지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여기서 잠깜만 기다려.]
[옷만 갈아입고 올게.]
그때, 옆에서 여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주야!]

그 사람도 의사같아 보였다.
[아,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어제 봤는데?ㅋㅋㅋ]
[그렇네요ㅎ]
웃는다.
저 애는 저렇게 웃는구나.
나는....
어떻게 웃지..?
[그런데 저 친구는 누구야?]
남자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요...?]
[아, 숲에서 만난 애예요.]
[숲에서?]
[복장을 보아하니, 귀족같은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 사람도 같은 의사니
귀족처럼 보이는 날 싫어하려나....?
[맞아요.]
긴장됐다.
그가 나에대해 어떻게 말할지...
[뭐, 네가 데려온 애니까 좋은 애겠지.]
뭐지...?
이게 끝이라고...?
내가...좋은 애라니...
[참, 이럴 때가 아닌데.]
[구호물품이 왔어.]
[혹시 또 그분이예요?]
[어, 맞아.]
[어서 가봐요!]
[태형아, 너도 따라와.]
[아...응.]
어떨결에 따라온 곳에는
상자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우와, 정말 이걸 다요?]
[너무 감사하다ㅎ]
[아, 그리고 이건 그분이 같이 보내신 편지야.]
[너한테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감사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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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읽으시는 분께
이번엔 생각보다 많은 물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부디, 이 물품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의사분들껜 항상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From. 뉴오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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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더니
여주가 약간 웃어보였다.
편지에는 뭐라고 써있을까.
그때, 여주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매번 우리 의료단을 후원해주시는 분이야.]
[이번에도 잘 써달라고 부탁하셨어.]
[정말 누군지 궁금해...]
[이렇게 많은 물품이 다 어디서 나는지.]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난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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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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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지민의 집무실이 다시 한 번
한숨으로 가득 찼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윤기였다.

윤기는 말없이 지민의 책상 앞까지 걸어왔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들어와도 돼?]
[다른 사람은?]
[걱정할 필요없어.]
[왕자가 탈출해서 다 찾으러 나갔거든.]
[그래서 지금은 나랑 너밖에 없어.]
지민은 여전히 서류들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골때리는 왕자네.]
윤기는 서류를 보자, 서류들을 빼앗으며
천천히 살펴봤다.
그 서류들은 올해 예산안이었다.
[야, 내놔.]
그에 예민해질 수 밖에 없는 지민이다.
그리고 서류를 본 윤기의 눈썹이 씰룩였다.
[또 적자냐?]
그에 지민은 아무 말없이 서류를 가로챘다.
그리고 윤기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너 지금 몇 년째 적잔지는 알아?]
지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윤기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또 의료단에 구호물품 보냈지?]
아무말이 없는 걸 보니
정곡에 찔렸나보네.
[좋은 일이라는 건 알겠는데.]
[네가 매년 예산을 거기다 쓰니까, 우리 일이]
[계속 뒷전으로 밀리고 있잖아.]
[우리가 계획 시작한 지가 대체 몇 년 전이야?]
[앞에 있는 잔불 끄자고,]
[뒤에 있은 거대한 산불은 그냥 둘거야?]
윤기의 말이 맞다.
몇 년째 계획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하지만, 이 일도 포기할 수는 없어...

[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야.]
[백성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야.]
[말 한 번 잘했네.]
[그렇게 따지면, 나라없는 백성들은 또 무슨 소용이야.]
[지금 이게 나라 꼴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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