短篇小說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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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름다운 추억의 시작.


말랑공 씀.




*본 글의 소재는 영광스럽게도 이제약간김태형사랑해 님께서 주신 소재입니다.




 “음… 동백 씨,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네.”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치고는 너무나 건조한 대답. 점점 악화되어 가는 몸 덕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일까,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별 감흥이 없다. 그렇구나. 내가 죽는구나. 그저 이런 생각만 들 뿐, 두렵거나 하진 않는다.


 “…하실 말씀은 끝나신 거죠?”


 “어… 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내 반응을 보자 어안이 벙벙해지신 의사 선생님. 헛기침을 하시며 괜히 제 안경만 만지작거리신다. 당황스러워하시는 의사 선생님을 뒤로하고 나가려는 순간 창문 너머로 새하얀 눈이 내리는 것이 보인다. 아, 겨울이구나. 구름서부터 내려오던 새하얀 눈은 바닥에 닿자마자 퀴퀴한 매연가스에 시커멓게 물들고 만다. 도시라서 그런지 눈들이 금방 녹아 없어지거나 시커멓게 더렵혀진다.


 시커멓게 물들어 가는 눈을 보니 열다섯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일이 생각난다. 바로 새하얀 눈과 시골 풍경을 온전히 내 도화지에 담아내는 것. 압박감에 사람들이 원할 만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닌 오직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 그래,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거라도 하고 죽자. 아까까지만 해도 메말랐던 나의 가뭄이 적셔지기 시작한다.


 “의사 선생님, 저 다른 병원으로 옮겨도 될까요. 시골로요.”


 “이렇게 갑자기요…?”


 “어차피 죽는 거, 이왕이면 풍경 좋고 공기 좋고 새하얀 눈이 여전한 곳에서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그래요… 동백 씨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죠. 근데 좀 아쉽긴 하네요.”


 “저도 좀 아쉽긴 해요. 선생님이 저 어릴 때부터 담당 의사였으니깐. 근데 전 건물로만 빽빽한 이런 곳 말고 자연과 잘 어우러진 곳에서 눈을 감고 싶어요.”


 “하긴… 여기는 낭만이 없는 곳이죠. 병을 고쳐 주지 못 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 죄송해할 게 뭐가 있어요. 이 병은 원래 고치지 못 하는 병이었고, 그럼에도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해 주셨잖아요.”


 의사 선생님께선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신다. 그러곤 눈시울이 붉어지신다. 이대로 입을 열면 눈물이 나오실 것 같으신지 아무런 말도 없으시다. 나는 그런 의사 선생님께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만 남기곤 진찰실을 나간다. 진찰실의 문이 닫히고, 문 너머로 의사 선생님께서 흐느끼시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게 아쉬우신 것인지, 아니면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이 슬프신 것인지, 선생님께선 계속 흐느끼신다.


 의사 선생님의 흐느끼는 소리에 발걸음이 떼지질 않는다. 하지만 죽기 전에 꼭 내 꿈을 이루고 싶어 힘겹게 발걸음을 떼어 병실로 향한다.


 내 병실 안에는 항상 내게 주사를 놓아주셨던 간호사님이 계셨다. 내 고민을 들어 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시고, 가끔은 내 친구가 되어 주셨던 간호사님. 아까 의사 선생님께는 병원을 옮기고 싶다는 말이 쉽게 나왔지만 왠지 간호사님 앞에 서니 그 말이 목구멍에 막혀 잘 나오지 않는다. 간호사님은 병실 입구에 저를 보며 서 있는 나에게 다가온다.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간호사님의 물음에 나는 힘겹게 입을 뗀다.


 “저… 병원 옮길려고요. 시골로.”


 “그래요…? 어쩐지 좀 아쉽네요. 그동안 친구 같았어서 그랬나…… 거기서도 잘 지내요. 동백 씨.”


 “네. 간호사님도 잘 지내요.”


 서로 그리워하는 이별은 처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건조하게 말이 내뱉어진다. 그러나 간호사님은 그런 내 대답에 만족하신 듯 보인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이 병원에서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꿈을 이루고 싶으니깐, 그동안 압박감에 시달려 그림만 그리던 그 화가가 아니니깐.


 시골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차창 너머로 바라본 바깥은 시커멓다가도 시골에 닿으면 닿을수록 새하얗게 물들어 갔다. 나뭇잎 하나 없는 가지 위에 쌓인 새하얀 눈들, 흙으로 된 길 위에 소복이 쌓인 새하얀 눈들. 나는 시골로 도착하자마자 바로 열차에서 내려 겨울 바람을 느꼈다. 볼을 가르는 차가운 바람, 상쾌하고 전혀 퀴퀴하지 않는 바람, 자동차의 경적 소리 따위 나지 않고 오직 새들만이 지저귀는 시골.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