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계절

💘번외 - 운학 시점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시끄럽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데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이랑 있으면 그냥 재밌으니까. 동기 단톡방도 내가 제일 먼저 시끄럽게 만들었다.

관종이냐고 물으면, 뭐 부정하진 않겠다. 그저 다같이 노는게 더 재밌어서 그랬을 뿐이었다.

 

OT는 정말 재밌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많았고, 재밌는 사건들도 시간단위로 터져나왔다.

이 정도로 많은 또래들과 정신없이 놀아본건 처음이었다.

나는 이 방 저 방을 쏘다니며 놀았다. 들어갈 때마다 붙잡혔고, 술을 꼭 받고 나왔고, 술게임을 하다가 모두 이겨내고 나왔다. 그 짓을 반복하길 10번, 시간은 새벽 2시를 향해 가고있었다.

 

조금 취한 것 같은데. 그래도 재밌다!

이 생각으로 내가 처음 있었던 방의 문을 열었다. 빼꼼, 고개를 내미는데 조용하다. 아 여긴 벌써 전멸이구나.

처음에 많이 달린다 싶었다. 그대로 돌아서 나갈까, 하다가 안 쪽을 바라보니 여자애 하나가 조용조용 움직이고있었다.

 

다들 취해서 뻗었는데, 그 여자애는 혼자 멀쩡한 얼굴로 방을 치우고 있었다. 도와달라고도 안 하고, 생색도 안 내고, 그냥 묵묵히. 서하린. 단톡방에선 말 한마디 없던 이름이었다.

아까 벌칙도 꽤 걸려서 마시던 여자아이.

 

"너 아직 안 자?"

 

말을 먼저 거니까 흠칫 어깨가 떨렸다. 내가 들어온 기척도 못 느꼈나보다. 얘도 꽤 취해보이는데.

 

"너 술 센가보다. 왜 안 자고 있어?"

"이거 다 치우고 자려고."

"아ㅡ."

 

흠, 취해보였는데. 강한척을 하는게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나도 뭐, 할 일 없기도 하고. 다른 방에서 많이 어지럽혔으니까. 근처에 있는 캔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무뚝뚝해보이는데 말을 걸면 또 대답은 잘 해준다. "약았다, 너." 했더니 입만 살짝 씰룩하고 대꾸도 안 하는데, 그게 왜 그렇게 웃기던지. 분리수거까지 같이 하고 올라왔을 때 걔 입술이 새파래져 있길래, 나도 모르게 담요부터 찾았다. 베개도 하나 던져주고. 그러고 방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그 무뚝뚝한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조금 특이한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

 

 

전공수업에서 같은 조가 됐을 땐 솔직히 좀 신났다. 티는 안 냈지만. 비 오는 날 우산을 줬던 건 별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냥 걔가 입김 불면서 손 데우고 있는 걸 보니까, 우산이고 뭐고 그냥 주고 뛰고 싶었다. 추운 건 뛰면 그만이니까.

OT때도 그러더니 추위를 잘 타나ㅡ 그 이후로는 그 애가 입은 옷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춥지 않나? 오늘은 옷 안 빌려줘도 될까? 이런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 애를 만날 때만.

 

우리는 조별과제 덕에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벚꽃이 피고 지는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 둘 뿐이었던 건 아니고, 다른 동기들도 많았다.

 

우연히 같이 수업을 듣고 조모임을 함께 가게 되었을 때.

벚꽃길에서 머리에 앉은 꽃잎을 떼줬을 때, 하린이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한 발 물러나면서 "어, 어." 하며 맨날 무표정이던 애가 그렇게 당황하니까—...

 

너무 귀여웠다. 가슴 한 켠이 쿵,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그날 집에 가는 내내 그 얼굴이 계속 생각났고, 더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별다른 이슈 없이 1학기는 끝이 났다. 친구들을 못 만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여름방학에 알바를 시작했다. 그냥 용돈 때문에.

 

하린이가 들어섰을 땐 깜짝 놀랐다. 어, 내가 얘를 좋아하나? 헛것이 보이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 카페 단골이라는 걸 알고는 출근길의 걸음이 가벼워졌던 것 같다.

 

걔는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셨다. 그래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 미리 내려놨다. 별거 아닌데 "어떻게 알았어." 하고 신기해하는 게 좋아서 자꾸 더 챙기게 됐다.

 

더 자주 마주치고싶다. 그래, 더 보고싶어. 좋아하는건 맞는 것 같아.

계속 생각이 나는건 그런 거겠지. 하린이가 카페에 들어올 때마다 가슴 한 켠에서 바람이 살랑이듯 간지러웠다. 이 카페의 단골이라고 말하던 하린이의 말을 끊었다.

 

"맞아. 햇볓도 잘 들어서...."

"자주 와, 하린아!"

"나 이미 매일 오는 것 같은데."

 

멋쩍어 볼을 긁었다. 너무 솔직했다. 그리고 타이밍도 엉뚱했다. 이런 대화 내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 쑥맥같은 행동에 하린이는 푸핫 웃음이 터졌다. 나는 그게 마냥 신기하고 좋았다. 곧이어 나도 따라웃었다. 하린이의 웃음은 전염성이 강한 것 같아.

 

"나 너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조금, 진실되게 행동할까. 너에게만은 다른 모습을. 너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을, 솔직한 행동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나가는 말들은 전부 진심이었다. 너에게 닿기를 바라며, 조금씩 스며들길 바라며.

 

"더 자주와, 매일매일 보게."

"......."

"너랑 얘기 더 많이 하고싶어."

 

전부 진심이다.

 

 

-

 

 

2학기가 시작되었고, 나는 여름방학에 은근슬쩍 물어보기 작전으로 하린이가 월요일에 공강을 만든 점을 알아냈다. 2학기때도 그렇게 짤 것 같다는 뉘앙스에, 같이 시간표를 맞추고 싶었으나 내가 1학기때 듣지 않은 1학년 필수 수업을 하린이는 이미 들었다고했다. 어쩔 수 없이 시간표가 갈렸다. 뭐, 다 똑같으면 너무 스토커같은가.

 

과방에서 동기들과 대화중이었는데 하린이가 들어왔다.

어, 올 줄 몰랐는데. 원래 잘 안 들르지 않았나? 반가운 마음에 손을 붕붕 흔들며 인사를 건넨다.

 

"헐, 그럼 너네 방학동안 계속 만난거야? 썸이야?"

 

그 질문에 대답을 못했다. 아니, 짝사랑인데요....

눈을 굴려 하린을 보는데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 그래, 썸은 무슨. 아직 하린이는 내가 자길 좋아하는 것조차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괜히 심통이 났다. 하린이한테가 아니라, 나한테. 그 동안 제대로 어필을 못한 내 잘못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양, 같은거 신청했었지. 하린의 팔을 이끌고 과방 문을 향해 걸었다.

 

"어, 너 이 수업 신청했었어?"

 

하린이는 당황스러운듯 물었다. 순순히 나에게 끌려오면서.

 

"응. 하린이가 듣고 싶대서."

 

여름 내내 카페에서 들은 얘기였다. 듣고 싶은 교양이 있다고. 그래서 신청했다. 같이 듣고 싶어서.

눈치채라. 눈치채라. 내 마음이 들린듯, 하린이의 귀까지 빨개졌다.

 

 

-

 

수업이 끝나고 함께 집에 가는 길, 하린이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근데 그 침묵이 싫지 않은 침묵이라는 걸 나는 안다.

하린이는 내 마음을 이제 막 눈치챈 것 같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도. 이제부터는 기다릴 뿐이었다. 마음이 더 활짝 열릴 때까지. 천천히 와도 되니까. 나 기다리는 거, 생각보다 잘하거든.

피식 웃으니 하린이 물었다.

 

"왜 웃어?"

"좋아서."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 더 적극적으로 나가본다.

여름에 비해 해가 짧아졌다. 바람은 선선해졌고, 노을은 더 빨리 진다. 빨개진 노을이 하린의 얼굴을 뒤덮었다. 물론, 내 얼굴도. 그렇게 우린 같이 걸어갔다.

 

겨울에 시작한 계절이 한 바퀴를 다 돌아서, 다시 겨울 앞에 와 있다. 다음 계절도, 그다음 계절도—

아마 우리는 같이 있을 거다. 그건 그냥, 알 수 있는 거였다.


 

 

FIN.

 

사실 운학시점이 보고싶어서 썼던 작품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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