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步之遙
距離


다음날, B닐라코 촬영 현장.

이른 아침부터 세트장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의상팀, 메이크업팀, 카메라 크루, 감독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했다.

서연은 일찍 도착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지난번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밤새 콘셉을 복기했고,

동선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정리해왔다.

그녀는 스튜디오 안을 둘러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세트장으로 들어섰다.

무광 블랙 SUV의 문이 열리고, 정한이 컨셉 의상을 입은 채로 차에서 내렸다.

아직은 준비가 덜 된 얼굴, 그러나 특유의 긴 실루엣이 먼 거리에서도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연은 반가운 마음에 먼저 다가갔다.

이서연
“선배님..! 오셨어요?”

예전과는 사뭇 다른, 조금 더 밝고 가까워진 인사였다.

하지만 돌아온 건 단조로운 반응.


정한
"아,네.."

짧은 대답. 눈빛은 피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감정은 읽히지 않았다.

정한은 인사를 받고는 가볍게 고개만 숙인 뒤, 말없이 대기실 안으로 사라졌다.

이서연
‘…응?’

서연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눈을 껌뻑였다.

뭔가 이상했다. 며칠 전만 해도 분명 따뜻했던 그의 말투, 눈빛.

그게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이후 촬영은 곧 시작됐다.

서연은 준비한 대로 정확하게 움직였고, 정한 역시 정확한 타이밍, 정확한 각도, 정확한 포즈로 현장을 리드했다.

모든 건 프로페셔널했다. 하지만,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서연은 마주보는 컷에서도 그의 눈빛에서 어떤 교감도 읽을 수 없었다.

저번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의 정한은 한 발 먼저 다가와 그녀를 리드해주고, 카메라가 꺼졌을 때도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데 오늘은… 딱 일만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적당한 거리만 유지하며, 절대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이서연
‘나한테… 뭐가 서운하셨나?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서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전과 똑같이 웃었고, 인사도 했고, 연락도 했고… 그런데 왜?

촬영이 종료되고, 마지막 모니터링이 끝났다.

감독이 박수를 치며 모두 수고했다고 말하자 정한은 가볍게 인사만 하고 차량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서연은 지금이라도 뭔가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서연
“아, 저… 선배님!”

정한이 차 문을 열고 타려던 순간. 서연은 그를 부르며 달려갔다.

하지만 정한은 들은 듯 못 들은 듯, 차에 올라탔고 자동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이서연
“잠깐만요…!”

서연은 급히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문틈에 손이 살짝 끼였다.

이서연
"아야...!!"

자동문이 다시 열리고 정한은 급히 차에서 내렸다.


정한
"괜찮아요?!!"

놀란 눈으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은 정한.

당황한 표정으로 서연의 손등과 손가락을 세심하게 살폈다.

이서연
"네...괜찮아요.."

서연은 손에 전해지는 열감보다 그의 손에 잡혀 있는 이 감정이 더 벅차게 다가왔다.


정한
“그렇게 문 닫히는데 손 내밀면 어떡해요. 손 부었잖아요… 할 말 있으면, 전화로 해도 되고…”

정한은 조급하게 말끝을 흐리며 차에 다시 올라탔다.

그리고 텀블러에 담긴 따뜻한 물을 조심스레 타올에 적셔 서연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정한
“…이거라도 대고 있어요. 많이 아프면 꼭 병원 가고.”

그 말에 서연은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을 그 따뜻한 손길에 손을 맡긴 채,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서연
‘이렇게 따뜻하신데… 왜…’

이서연
"선배님..."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그의 이름. 정한은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피하지 않고.

서로의 마음속, 아직 말로 꺼내지 못한 것들을 담은 눈빛이 조용한 정적 위로 포개졌다.

서연은 잠시 침묵했다.

정한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고, 그 눈을 마주하자니 자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가 품고 있는 깊이를 함부로 건드려도 되는 건지 망설여졌다.

이서연
"아니에요..."

결국 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을 삼켰다.

조심스러운 그 한마디는 마치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이유를 달지 않겠다는 방어 같았다.

정한은 그 말을 듣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의 눈동자 아래로 시선을 내리더니,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있던 수건 위에 다시 한 번 손을 얹었다.


정한
"여기... 좀 많이 부었네요. 시간 지나도 진정 안 되면 병원 꼭 가봐요. 진짜로."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온기와 걱정이 섞여 있었다.

서연은 작은 숨을 들이마셨다. 무언가가 안에서 꽉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그 감정을 삼켰다.

이서연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선배님."

정한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

서연은 멍하니 그의 차가 멀어져 가는 걸 보았다.

은은하게 선팅된 유리창 너머, 정한은 조용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정한은 깊은 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정한
'그만...그만 생각하자."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눈을 감는다. 공기가 조용히 얼어붙었다.

서연은 천천히 차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 속에, 자꾸만 정한이 떠올랐다.

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감싸주던 따뜻한 손길, 무심한 듯 다정한 말투.

이서연
'혹시... 내가 너무 친한 척 했던 걸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자꾸 연락하고, 장난도 치고... 혹시 정한은 그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이서연
'선배님은 그냥 호의로 잘해주셨던 건데, 내가 너무 앞서갔나...'

그렇게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지고, 창밖을 보던 시선이 흐려졌다.

서연은 작게 숨을 내쉬며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그가 보인 친절과 다정함이 전부 '그냥 선배로서의 배려'였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저릿했다.

이서연
'정한 선배님은 좋은 사람이신데...'

서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