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빙의글] 그 집 남자들

4화. 그 집 남자들

“너희… 기억났어.” 여주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힐 만큼 작게 흘러나왔다. 현관 앞에 서 있던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국은 여주가 쓰러질까 봐 한 걸음 더 다가왔고, 석진은 여주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태형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신발 끝이 젖는 것도 모르고, 그저 여주를 보고만 있었다. 여주는 숨을 고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방금 전까지 없던 장면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있었다.

 

 

낡은 골목, 비 오는 날의 대문, 젖은 교복 소매, 울면서 손을 흔들던 어린 정국, 끝까지 괜찮다고 말해주던 석진,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태형의 얼굴.

 

 

“누나.” 정국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 한마디에 여주는 오래전으로 다시 끌려가는 것 같았다. 늘 자신보다 한 발 늦게 뛰어오면서도 끝까지 따라오던 아이. 삐지면 먼저 말 걸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5분을 못 참고 “누나, 배고프지?” 하고 과자를 내밀던 아이.

 

 

여주는 정국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너… 맨날 나 따라다녔잖아.” 정국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맨날 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면서, 말은 하나도 안 들었어.” 정국은 웃으려다 실패했다. 입꼬리는 올라갔는데 눈가가 먼저 붉어졌다. “그걸 이제 기억해요?” “응.” 여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너무 늦게 기억해서.”

 

 

 

 

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늦은 거 아니에요.”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웃었다. “기억했으면 됐어요.” 그 말이 끝나자 여주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석진은 아무 말 없이 여주를 안쪽으로 데려왔다. 밖에서 들어온 찬 공기가 현관에 오래 머물렀고, 태형은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거실은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여주가 떠나려고 벌려둔 캐리어가 현관 옆에 쓰러져 있었고, 열린 지퍼 사이로 옷가지가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여주는 그걸 보자 가슴이 더 아팠다.

 

 

또 도망치려고 했다. 예전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번에도 세 사람을 두고 가려고 했다.

 

 

석진은 여주를 소파에 앉히고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 컵을 건네는 손은 늘 그랬듯 침착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여주는 그 손을 보고서야 기억했다. 어릴 때도 석진은 그랬다. 겁이 나도 겁나지 않은 척했고, 속상해도 먼저 울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우왕좌왕할 때 가장 먼저 어른을 부르고,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여주에게 휴지를 접어 눌러주던 사람이었다. “오빠.” 여주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석진은 컵을 내려놓다 말고 멈췄다. 여주가 그를 그렇게 부른 건 이 집에 온 뒤 처음이었다. 아니, 아주 오래전 이후 처음이었다.

 

 

석진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기억났구나.” “응.” “다?” 여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다 또렷하게 돌아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기억났다. 자신이 왜 이 집을 낯설어하면서도 익숙하게 느꼈는지. 왜 비 오는 날마다 숨이 막혔는지. 왜 태형이 건넨 말 하나에 마음이 아팠는지.

 

 

여주는 아주 오래전, 이 동네에서 살았다. 엄마와 둘이 살던 집은 좁고 오래됐지만, 옆집에는 늘 세 사람이 있었다. 정국은 매일같이 놀자고 찾아왔고, 석진은 그런 둘을 챙겨줬고, 태형은 말없이 곁에 앉아 있었다. 여주는 그 시간이 좋았다. 집에 돌아가기 싫은 날이면 그 집 대문 앞에 앉아 있었고, 세 사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옆에 있어줬다.

 

 

그러다 어느 날, 여주는 갑자기 떠났다. 어른들의 사정이었다. 엄마는 급하게 짐을 쌌고, 여주는 제대로 인사할 시간도 없이 차에 타야 했다.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정국은 울면서 차 문을 붙잡았고, 석진은 어른들에게 한 번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태형은 대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떼지 않았다. 여주는 그 눈을 보며 울었다. 자신이 떠나면 태형이 가장 오래 기다릴 것 같아서. 그래서 말했다.

 

 

“나 꼭 다시 올게.”

 

 

그 약속을 하고도, 여주는 돌아오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락처는 사라졌고, 동네는 멀어졌고, 기억은 흐려졌다. 아니, 흐려진 게 아니었다. 너무 미안해서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나 잊은 거 아니었어.” 여주가 말했다. “그냥…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서 안 떠올리려고 했던 것 같아.” 정국은 소파 앞 바닥에 앉아 여주를 올려다봤다. “그럼 됐어요. 일부러 우리 버린 거 아니면 됐어요.” 말은 가볍게 했지만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석진은 정국의 머리를 가볍게 밀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형도 궁금했잖아.” 정국이 작게 중얼거렸다. 석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주는 그 침묵을 알 것 같았다. 모두 궁금했을 것이다. 왜 떠났는지,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 왜 다시 나타난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는지. 그 시간 동안 세 사람에게도 상처가 남았을 것이다.

 

 

 

 

여주는 태형을 봤다. 태형은 여전히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다른 두 사람과 달리 가까이 오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태형은 늘 그랬다. 기다리고, 참다가, 마지막에야 한마디를 했다. 여주는 천천히 일어났다. 석진이 붙잡으려 했지만 여주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태형 앞에 섰다.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태형은 여주를 내려다봤다. “할 말이 많아서.” “그럼 해.” “하면 네가 또 갈까 봐.” 그 말에 여주의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태형은 억지로 웃었다. “어릴 때도 그랬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말하면 네가 더 울 것 같아서 못 했어.”

 

 

“그때 무슨 말 하고 싶었는데?” 여주가 물었다. 태형은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거실에는 빗소리만 가득했다. 한참 뒤, 태형이 낮게 말했다. “가지 말라고.” 여주는 입술을 꾹 눌렀다. “근데 말 못 했어. 네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닌 걸 아니까.” “태형아.” “이번에도 똑같았어.” 태형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붙잡고 싶은데, 네가 힘들어 보여서 못 붙잡겠더라.” 그는 여주를 똑바로 봤다. “근데 아까 네가 나가려고 할 때, 진짜 그때랑 똑같아서… 또 놓치면 안 될 것 같았어.” 여주는 결국 울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너무 작고, 고맙다는 말은 너무 늦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한 걸음 다가가 태형의 손끝을 잡았다. 태형은 놀란 듯 굳었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날 밤, 네 사람은 거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대단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정국은 어릴 때 여주가 자기 딸기우유를 뺏어 먹었다며 투덜댔고, 여주는 기억난다며 웃었다. 석진은 여주가 사라진 뒤 정국이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안 먹었다고 폭로했고, 정국은 그런 얘기를 왜 하냐며 얼굴을 붉혔다. 태형은 말없이 듣다가 가끔 아주 짧게 웃었다. 여주는 그 웃음을 보면서 생각했다. 돌아왔구나. 아주 오래 걸렸지만, 결국 자신은 돌아왔다. 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도망치지 않고 마주 볼 수는 있게 됐다.

 

 

다음 날 아침, 여주는 캐리어를 다시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어제 급하게 넣었던 옷들을 하나씩 꺼내 옷장에 걸었다. 책상 위에는 태형이 예전에 적어둔 메모지가 그대로 있었다. 비 오는 날엔 창문 너무 오래 열어두지 마요. 여주는 그 메모를 손끝으로 눌러보다가 작게 웃었다. 방문이 열리고 정국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안 가는 거 맞죠?” “응.” “진짜?” “응.” “계약서 써요?” “뭐?” 정국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또 갑자기 사라지면 안 되니까. 도망 금지 계약서.” 여주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때 뒤에서 석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전에 밥부터 먹어. 둘 다.” 정국은 기다렸다는 듯 “오늘 뭐예요?” 하고 뛰어나갔다.

 

 

 

 

여주는 방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복도 끝에는 석진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정국은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있었다. 태형은 창가에 서서 여주를 보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이 이상하게 꿈 같았다. 여주는 천천히 거실로 걸어갔다. 석진은 아무렇지 않게 밥그릇을 하나 더 놓았다. “앞으로 밥은 같이 먹어요. 혼자 방에서 먹지 말고.” “응, 오빠.” 석진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웃음을 숨겼다. 정국은 바로 투덜댔다. “나는?” “너는 정국 씨.” “아, 너무하네. 기억났는데도 정국 씨예요?” 여주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볼게.” 정국은 억울한 얼굴을 했지만,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여주는 현관 옆에 세워둔 캐리어를 완전히 비웠다. 빈 캐리어를 접어 창고에 넣는 순간 묘한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 떠날 준비를 멈춘 것 같았다. 여주는 거실로 돌아와 세 사람을 바라봤다. “나 여기 조금만 더 있어도 돼?” 정국이 제일 먼저 대답했다. “조금만 말고 오래 있어요.”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 비워둘 이유 없으니까 편하게 있어.” 마지막으로 태형이 말했다. “이번엔 네가 가고 싶을 때 말하고 가.” 여주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웃었다. “이번엔 말없이 안 가.” 태형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 오래 걸린 약속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비는 완전히 그쳤다. 창문을 열자 젖은 공기 대신 맑은 밤바람이 들어왔다. 여주는 창가에 섰고, 세 사람은 각자 거실에 흩어져 있었다. 석진은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고, 정국은 소파에 누워 영화를 고르고 있었고, 태형은 여주 옆에 조용히 다가왔다. “괜찮아?” 태형이 물었다.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상하게 괜찮아.” “다행이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예전 같았으면 불편했을 침묵이 이제는 편했다. 여주는 창밖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 사실 아직 다 기억나는 건 아니야.”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기억해.” “그래도 돼?” “응.” 태형은 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우리 여기 있으니까.”

 

 

그 말에 여주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거실에서 정국이 큰 소리로 불렀다. “누나, 영화 골랐어요. 근데 태형이 형 옆자리 금지.” “왜?” 여주가 묻자 정국이 당당하게 말했다. “형은 어제 너무 많이 진지했으니까 오늘은 내 차례.” 석진이 주방에서 한숨을 쉬었다. “둘 다 시끄럽고, 여주는 가운데 앉아.” 정국이 바로 반박했다. “그럼 형이 제일 이득이잖아요.” 태형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여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예전에도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별것 아닌 걸로 투닥거리고, 괜히 자리를 두고 싸우고, 결국 다 같이 웃었을 것이다.

 

 

여주는 소파 가운데에 앉았다. 정국이 왼쪽에 털썩 앉았고, 태형은 오른쪽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석진은 담요를 가져와 여주 무릎 위에 덮어줬다. “추우면 말해.” 여주는 담요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웃었다. “응.” 영화가 시작되고, 거실 불이 조금 어두워졌다. 화면 속 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여주는 문득 이 순간이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거를 완전히 돌릴 수는 없고, 잃어버린 시간을 모두 되찾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제는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는 모른 척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영화가 중반쯤 지났을 때, 정국이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누나는 우리 중에 누가 제일 좋아요?” 석진이 바로 쿠션을 던졌다. “그걸 왜 지금 물어봐.” 정국은 쿠션을 맞고도 씩 웃었다. 태형은 화면을 보는 척했지만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여주는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직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어도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집에 다시 돌아온 지 고작 하루였고,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가 아직 너무 많았다.

 

 

대신 여주는 담요를 끌어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일단 오늘은… 아무 데도 안 가.” 그 말에 세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주는 느낄 수 있었다. 정국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석진의 시선이 부드러워지고, 태형이 아주 작게 숨을 내쉬는 것을. 그걸로 충분했다. 여주는 화면을 바라보며 편하게 몸을 기댔다. 오래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자리가, 사실은 계속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다시, 그 집 남자들과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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