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GAME [Serial discontinued]

NO.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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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07

W. 설하

[서브 퀘스트 : 조력자]

힌트 1. 메인 퀘스트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부여됩니다.

이딴 것도 힌트라고-,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해대는 파란 퀘스트 창에 주먹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그걸 모르냐고! 힌트라길래, 내가 찾는 그 플레이어의 위치라던가, 어느 가문의 사람이라던가 하는, 그와 관련된 쓸만한 정보들을 알려줄 줄 알았건만 정작 퀘스트 창에 뜬 힌트 문장은 저게 전부였다. 안 그래도 에반 경을 뒤꽁무니에 달고 북부의 온 동네를 싸돌아다녔는데도 코빼기도 비추질 않는 플레이어 덕분에 열불이 났건만은, 힌트랍시고 던져진 문장도 저게 전부이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아카데미의 면접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서 플레이어를 찾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곧 메인 퀘스트를 포기하겠노라-, 하는 선언과도 같았기 때문에 하루 온종일을 쪼개고, 또 쪼개서 그를 찾아다녀야 할 판이었다. 아, 머리야. 서브 퀘스트를 끝내기 위해 메인 퀘스트를 포기할 순 없잖은가.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었다.

"에반 경,"

"네 공녀님…."

"…오늘은 이쯤 하고 돌아갈까요?"

하루 온종일을 나와 함께 북부 거리를 싸돌아다니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었는지, 다 죽어가던 에반 경의 얼굴이 확 살아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정확히 뭘 찾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날 호위하라는 진의 명령을 듣고 날 따라 북부의 거리를 하루 종일 쏘다닌 그가 고맙고도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여관으로 되돌아가자는 나의 말에 예! 하는 우렁찬 대답을 남기고는, 에반 경은 걸음을 돌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플레이어를 찾는 일은 실패한 셈이었다.

'진짜 막막하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플레이어를 찾을 이렇다 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미루는 게 답인가? 면접시험이 바로 하루 전날로 다가온 차였다. 내일 있을 면접시험이 끝나면, 진은 지체 없이 날 데리고 공작령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를 찾는 일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곁에서 호위하던 에반 경이 무슨 일이 있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난 별다른 말없이 여관으로 향할 뿐이었다.

아무튼 간에, 퀘스트에 시간제한이 없다는 점이 몹시도 다행스러웠다. 하루든 이틀이든 간에,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었더라면 나는 또다시 진에게 북부에 남겠노라 생떼를 부려서라도 이곳에 남으려 했을 테니까. 지금도 충분히 어색한데, 여기서 더 어색해지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작령에 가지 않겠다 말하는 내 모습과, 그런 내 모습에 반응하는 진의 모습을 잠시간 상상해보다 이내 고개를 휘저으며 그를 떨쳐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불편함은 지금 느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북부에는 메를린 아카데미의 입학 건으로라도 다시 오게 될 것이 분명하니…,

"…어?"

홀린 듯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곁에 따라붙은 에반 경이 공녀님?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대답해 줄 정신 따윈 없었다. 그래, 힌트가 괜히 힌트가 아니었는데…! 여기가 북부 거리의 한복판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환호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친! 제국의 공녀가 입에 담기에는 퍽 상스러운 언행에 에반 경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금 여관 쪽으로 옮길 뿐이었다. 반쯤 뜀박질에 가까운 내 걸음걸이에 에반 경이 사색에 되어 다치십니다! 하며 외치는 것이 들렸다.

"경, 내일 공작령으로 출발하는 게 몇 시라고 했죠?"

"예? 아, 아마 늦은 저녁쯤 될 거라고 소공작님께서…, 그보다 아가씨! 뛰지 마십시오! 그러다 다치십니다!"

됐다, 됐어. 충분하지, 충분하고말고! 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추운 북부의 거리를 다시금 내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환한 웃음을 내건 채였다.

IN GAME

사내는 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더 깊게 잡아당겼다. 얼굴이 보여 좋을 것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쯤이면 저가 창문의 잠금장치고 뭐고 죄다 부숴버리고 탈출했다는 사실이 저택 내에 파다하게 퍼져있을 것이다. 욕심 많은 그 영감탱이는 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을 테고. 어쩌면 이미 아카데미 근처까지 사람을 풀어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얼굴을 죄다 가릴 만큼 음침한 로브를 몸에 휘감고 있는 사내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은 없었다. 메를린 아카데미는 원체 그러했다. 수상한 사람들이 몇 지나다녀도 이상할게 하나 없는, 참 괴상한 아카데미.

"이깟 퀘스트가 뭐라고…."

남자의 입에서 자조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깟 퀘스트. 이깟 퀘스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저택에서 탈출한 사람이 입에 담을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사내는 허공에 띄워진 새파란 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공에 수상한 것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이 새파랗고 반투명한 창은, '플레이어'인 사내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으니까. [메인 퀘스트 : 아카데미], 남부의 저택에서 북부의 아카데미까지, 사내가 목숨을 걸고 도망쳐온 이유이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이상하고도 낯선 세계, 사내가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한 행동은, 여기저기 상처 난 몸 곳곳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멍 자국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따금 깊은 자상으로부터 새겨진 흉터 또한 여러 개 보였다. 그 흉한 몰골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체 이 흉터는 왜 생겨난 것이고 몸 곳곳은 이렇게도 아픈가 하는 의문을 가졌더랬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의문은 사내가 이 세계에서 눈을 뜬지 딱 일주일이 되던 날에 풀렸다.

그 이유를 온몸으로 깨닫게 된 이후, 사내는 죽자 살자 그 저택에서부터 도망쳐 나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오직 저택에 있는 귀중품 몇 개를 쓸어 담은 채로. 그는 창문의 잠금장치를 부수고, 날랜 몸놀림으로 저를 제지하려는 저택의 사병을 따돌린 채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지체할 것 없이 북부로 향하는 마차를 빌리고, 알맹이가 커다란 보석을 여비로 내주었다. 그가 이렇게도 빠른 판단을 내려 저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 퀘스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난데없이 부여되기 시작한 퀘스트와 아카데미,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본 채 뛰쳐나온 것이다.

그 뒤로 사내는 퀘스트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어째서 이런 퀘스트들이 부여되는지, 난데없이 왜 이런 곳에 떨어져야만 했는지 하는 의문은 미뤄둔 채, 이따금 발동되는 퀘스트들을 모조리 끝냈다. 7D 11H 21M, 그가 이런 상황들에 의문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제 상황이 조금이라도 안정되길 숨죽여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으니, 오늘 면접만 잘 끝낸다면 제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은 틀림없을…,

"찾았다."

조곤조곤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입고 있던 로브의 끝자락이 누군가의 손에 붙잡힌 터라, 누구냐 추궁할 새도 없이 휙-, 당겨지는 몸에 사내의 몸이 휘청거렸다.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저와 비슷한 디자인의 로브를 입은 누군가에 의해, 사내는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사실 뿌리치려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단지, 사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주변이 아카데미의 면접시험을 보기 위해 찾은 이들로 바글거렸기 때문이었다. 과연 여기서 이 사람에게 덤비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사내가 망설이는 새에도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은 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택의 사람일까, 제 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해보기라도 하려는 듯 사내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저기,"

"…?"

"그쪽 나 알죠?"

인적 드문 골목, 메를린 아카데미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한 곳까지 저를 끌고 와놓고는, 기껏 내뱉는 말이 저게 전부인 것이다. 사내는 멀거니 제 앞의 사람을 쳐다보았다. 힘쓰는 걸로 보아 그저 작은 체구의 사내아이인 줄 알았더니, 얼굴을 반쯤 가린 후드 아래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분명히 여성의 것이었다.

"…설마 기억 안 나요?"

"……."

"아…, 이걸 뭐, 뭐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고…."

어째서 그 목소리가 퍽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로브에 가려진 사내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이곳에 저와 연이 닿은 사람은 없다. 없어야 하고, 없는 것이 당연했다.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손톱을 물어뜯는 제 앞의 여인도 저는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사내의 손이 서서히 제 허리춤으로 향했다. 죽일까? 아니, 죽이는 것 까진 무리더래도 어쨌든 무력화 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알아서 와 주었으니, 못할 것도 없었다. 저택에서 찾아온 사람이라면, 필히 여기서 무력화를 시키던 죽이던 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살포시 불어온 바람에 여인의 후드 자락이 흔들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음에 볼 땐 그렇게 무턱대고 덤비지 말고,"

"대화로 해결하자고, 대화로."

사내의 눈이 부릅뜨였다. 여인이 반격할 새도 없이 사내의 손아귀가 여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악! 하는 비명소리에도 사내는 손아귀의 힘을 푸는 법이 없었으니, 그 여린 체구의 몸이 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사내의 눈이 형형하니 빛났다.

"너,"

"야! 내가 대화로 해결하자고 했잖아 저번에! 쓰읍, 아파라…,"

"됐고, 그때 그 플레이어, 맞지?"

사내가 물었다. 살짝 올라간 후드의 그림자 아래로 소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안녕,"

"……."

"우리 구면 맞지?"

'와, 진짜 개 무섭네….'

마른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하게 굴고는 있다지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워낙에 살벌한 탓에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괜히 데려왔나? 사람 많은 데서 이야기할 걸 그랬나? 너무 성급하게 군 건가? 아, 망했다…,

메인 퀘스트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부여된다. 이는 즉 나와 마주했던 그 플레이어를 포함한 모든 플레이어들이 메를린 아카데미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란 소리였다. 그러니 즉, 재학생이던 입학생이던 아카데미에서 한 번은 마주친단 소리였으며, 가장 가까운 시일 내 이루어지는 행사가 바로 메를린 아카데미의 면접시험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는 에반 경과 생고생을 해가며 북부의 거리를 돌아다닐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그 [메인 퀘스트] 때문에라도 플레이어들이 아카데미로 알아서 와줄 테니까! 그래서 첫 번째 힌트가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내용이었던 것이다. 시험 전날, 어제가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아챈 나는 억울함에 이불을 뻥뻥 찼더랬다. 아무튼 그렇게 면접시험을 보러 오자마자 나는 그 플레이어를 찾아 나섰고, 몇 날 며칠을 새빠지게 찾아다니던 장본인이 바로 내 눈앞에 계신다 그것도, 눈을 아주 형형하게 빛내면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뭔데,"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심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아마도 저번의 만남에서 내가 명치를 때렸던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억울하다, 나는 살려고 그런 건데. 억울한 속내를 숨긴 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탁할게 있어서."

"뭔데,"

"들어줄 거야?"

"뭔지 들어보고."

"이왕이면 들어주는 게 어때? 혹시 모르잖아, 내가 너보다 이 세게에 대해 아는 게 많아서 되려 널 도와줄 수도 있는 거잖아."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해."

쪼잔하다, 쪼잔해. 어쩐지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사내가 쉽게 협력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초조함에 타들어가는 속내를 쏙 감춘 채 사내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짙은 눈썹이 꿈틀, 하며 움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협력하자, 나랑."

"…협력?"

"플레이어끼리 좀 돕고 살자고. 너도 혼자보단 둘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잔뜩 찌푸러진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내가 왜? 하는 그의 대답에는 거절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서브 퀘스트'는 포기하려고?"

"뭐?"

"너도 누군가의 '협력'을 받아야 할 텐데, 그리고…,"

나는 여태 내 시야를 답답하게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긴 금발이 찰랑이며 내 어깨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훤히 드러난 얼굴, 내 눈을 마주한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너는 '내' 협력이 필요할 거야, 그렇지?"

[서브 퀘스트 : 조력자]

힌트 2. 해당 퀘스트는 2인의 플레이어에게 부여된 퀘스트입니다.

/

"도련님이었어?!"

끅끅대며 웃음을 터트린 나를 보며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넌 공작가 막내 따님이었고…, 하는 그의 말에는 성의 없이 맞아, 하는 대답만을 들려주었다.

형형하니 서로를 꿰뚫을 듯 쳐다보던 눈빛들은 어디 가고, 퍽 친근한 말투, 퍽 친근한 모양새로 메를린 거리를 거닐었다. 어찌 된 일인가 하니,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서로의 퀘스트 완료를 위해 적당히 협력하는 사이가 되는 것에 그가 동의했다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물론, 남자 쪽에서는 그 잘난 얼굴을 사정없이 구겨 트리며 마지못해 한 '협력'이긴 하지만.

면접시험이 끝난 직후, '아카데미 시험날 만나 사귀게 된 친구'라는 빚 좋은 핑계를 붙여 진에게 그를 소개하고는, 한동안 못 만날 테니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진을 먼저 여관으로 돌려보낸 뒤였다. 물론, 에반 경은 여전히 내 뒤를 지키고 있었다. 그 덕에 우리는 사이좋은 친구 연기를 하며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는데,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 중 가장 우습고도 충격적이었던 것이-,

"세상에, 무려 후작가의 막내 아드님이셨을 줄이야,"

"너야말로, 제국에 단 두 개뿐인 공작가의 고명딸이, 굳이 아카데미에, 그것도 군사학부에 들어가겠다는데, 너희 가족들이 그걸 가만히 두고 봐?"

"당연히 아니지.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골머리 좀 썩었지."

"어떻게, 머리를 좀 잘 굴리긴 했나 봐."

"그래. 후작가 보안장치를 죄다 부숴먹고 도망친 너보다는 낫지?"

반테 라 루미안, 그의 이름이었다. 현대에서 불리던 이름은 '김태형'. 그는 무려 후작가의 철통 보안을 뚫고 몰래 탈출해 북부까지 온 능력자였다. 그저, 메를린 아카데미에 입학하라는 퀘스트 하나만을 위해서.

나는 김태형에게 얼마 전 시스템과 나누었던 대화 중 몇 가지를 그에게 말해주었다. 가령, 내게 '오류'라는 것이 생겨 상태창이 엉망이라던가, 튜토리얼이고 뭐고 죄다 건너뛰어 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처음엔 그 '시스템'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가 싶더니, 이야기의 후반에 와서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네가 나보다 아는 게 많네 뭐네 하더니."

"공갈 협박이지. 속아넘어간 널 탓하렴."

"…개짜증 나네, 너."

얼굴을 구기며 말하는 김태형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누가 속으래? 하는듯한 내 표정에 그는 열이 뻗치는 듯, 허공을 향해 후-, 하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키득거리며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 와봤다고 꽤 익숙해진 골목을 지나, 투박한 종이 달려있을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오랜만에 듣는 대장장이의 호탕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서 오시… 아, 아가씨!"

"로시아, 그동안 별일 없었나요?"

"작은 대장간에 별일이랄 게 뭐가 있겠소. 참, 의뢰하신 물건은…,"

"맞아, 안 그래도 그걸 찾으러 온 참이에요."

"예, 오늘쯤 오시지 않을까 해서 준비해두었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고마워요,"

투박한 종소리를 내며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선 김태형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대장간 내부를 훑는 것이 보였다. 하기야, 신기할 법도 했다. 현대에서야 이런 곳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후작에게 쫓기는 신세인 그가 여유롭게 메를린 거리의 대장간들을 하나하나 구경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벽에 걸린 온갖 가지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로시아, 이 자그마한 대장간의 주인은, 내 뒤를 따라 들어온 김태형에게 눈길을 한 번 주더니, 먼젓번과 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호탕한 웃음을 다시금 터트린 그 대장장이는, 기어코, 내가 아니었으면-, 하고 그토록 바라던 말을 입에 담는 것이었다.

"이제 보니 이쪽이 아가씨의 애인이었구먼그래!"

정신없이 대장간을 훑던 김태형의 시선이 내게 콕,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뭐가 어쩌고 저째, 하는 듯한 그 사나운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나는 못내 억울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누군 좋은 줄 아나…. 퍽 억울한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헛짚었는걸요,"

"그럴 리…,"

"됐고, 의뢰했던 물건부터 보여주지 않겠어요? 내가 좀, 많이, 급해서."

생긋 웃으며 뱉은 내 말에 로시아는 아, 그렇지! 하는 말을 남기고는 그제야 쪽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꽤 특이한 모양새의 의뢰이다 보니 대장간 내부에 보란 듯이 전시해두기보다는 그의 작업실에 숨겨두는 쪽을 택한 듯싶었다.

"…애인?"

"…조용히 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것뿐이니까…."

낮게 중얼거리는 김태형의 목소리는 섬뜩할 지경이었다. 나는 애써 그의 시선과 중얼거림을 무시한 채, 대장간 구석에 자리하던 소파에 걸터앉았다. 김태형은 고요한 눈으로 내 움직임을 좇는가 싶더니, 이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내 앞에 자리한 소파에 저 또한 걸터앉았다.

여긴 또 왜 온 건데? 후작가의 도련님답게-, 팔짱까지 척 끼고 묻는 김태형에 나는 흘긋, 에반 경을 향해 눈짓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 할 소리가 아니란 뜻이었다. 비록 의뢰를 맡기기 위해 에반 경과 함께 이 대장간에 들른 전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내가 이 대장간에 왜 온 건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진에게 내 의뢰 내용을 숨기고 싶었다. 저번과는 달리 내가 로시아와 쪽방으로 향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심한 채 문가를 지키는 에반 경을 본 김태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답답해서 어떻게 사냐…?"

"……."

그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은 채, 나는 옅은 미소만을 띨뿐이었다. 답답하긴 했으나, 진의 과보호가 율리아에 대한 걱정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름 버틸만했다. 물론 김태형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문을 벌컥 열고는 호쾌한 걸음걸이로 나에게 다가오는 로시아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커다란 상자가 하나 들려져 있었다.

저건 또 뭐냐는 듯, 에바 경을 피해 내게 눈짓하는 김태형을 깡그리 무시한 채, 나는 로시아가 건네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상자는 묵직한 편이었다. 게다가, 크기도 감히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정도의 상자였다.

"자, 아가씨께서 의뢰했던 물건이오. 감히 단언컨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을 거요!"

나는 상자를 열어보는 대신, 로시아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하는 내 말에 로시아 또한 호쾌한 미소를 얼굴에 띄워주었다.

/

마차는 멈추지 않고 어둑한 길을 달렸다. 나는 땅거미가 내려앉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파랗던 하늘이 점차 붉은색에 먹혀들어갔다. 이윽고 붉던 하늘조차 새카만 어둠에 잠겨, 하늘에는 간간이 몸을 불사지르는 별들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죄다 캄캄한 어둠으로 물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진은 하루 더 머물다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내 은근한 제안을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짐을 꾸렸다. 번복은 없단 뜻이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나는 미리 챙겨두었던 짐을 별말 없이 마차로 옮겨 실었다. 북부에서부터 오르테 공작령까지의 거리는 꽤 먼 편인데다가, 우리가 출발하는 시간이 늦은 저녁임을 고려해 우리는 해가 완전히 저물 때 즈음 도착할 마을에서 하루 쉬었다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벌써 아카데미에서 친구를 사귀었다고,"

나는 진의 말에 마차의 창 너머에 던져두었던 시선을 거두어들었다. 아 응, 친구…, 하는 마뜩잖은 대답을 내놓은 채 진을 바라보니, 그는 꽤 오래전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 허공에서 시선이 맞물렸다. 어김없이 솟아오르는 불편한 기운에 나는 괜스레 손을 꼼지락거리며 진이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가령, 김태형에 대한 말들이라던가.

그가 루미안 후작가의 차남이라는 것이나, 나와 같은 군사학부에 지원했다는 사실이라던가, 오늘 함께 대장간에 갔던 일이라던가 하는 말들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물론, 개중에서도 대장간에서 무얼 했는지,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스템'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쏙 뺀 채로 말이다. 

진은 어색함에 못 이겨 내가 늘어놓는 이야기들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얹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간간이 '그래', '그렇구나', 하는 재미없는 추임새를 넣어준 것 외에, 그는 김태형에 대해서라던가, 아카데미에 대해서라던가 하는 것들은 일체 묻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내 옆에 보란 듯이 얹어둔 큼지막한 상자에 대해서조차.

"새로 사귄 친구가 꽤 마음에 드나봐,"

"응,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오라버니가 보기에는 어때?"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언뜻 듣기에 무심하게 느껴질 법한 진의 대답을 끝으로 마차는 작은 마을의 여관 앞에 멈추어 섰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진이 손을 내밀었다. 단정한 면장갑이 씌워진 진의 손 위로 나는 손을 얹은 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옆구리엔 상자를 낀 채였다.

"먼저 올라가있을래, 리아?"

"…응, 내일 봐, 오라버니."

진이 생긋 웃어 보였다.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미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유 모를 위화감을 느끼며 여관의 계단을 올라갔다.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