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은 붉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눈앞에는 작두가 있었고, 그 위에는 태형이 맨발로 서 있었다. 꿈속에서 몇 번이나 봤던 장면인데, 이번에는 달랐다. 태형의 얼굴이 흐릿하지 않았다. 눈썹 끝도, 입술도, 정국을 바라보는 눈빛까지 전부 선명했다.
“왔네.” 태형이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너무 슬퍼서 정국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정국은 작두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번엔 안 늦었어요.”
그 말을 뱉는 순간, 정국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이 쏟아졌다. 비 오던 골목, 태형의 젖은 머리카락, 손목에 몇 번이고 태형의 이름을 쓰던 자신의 손끝. 그리고 작두 앞에서 태형을 붙잡고 울던 자신. 정국은 기억했다. 태형은 사람들에게 불길한 존재로 불렸다. 작두가 부르는 사람, 운명을 대신 받아내는 사람. 태형은 매번 누군가의 불행을 대신 가져갔고, 결국 마지막에는 정국의 불행까지 대신 가져가려고 했다.
그때 정국은 태형에게 매달렸다. “가지 마요.” 지금의 정국이 중얼거렸다. 과거의 자신과 같은 말이었다. 태형의 눈이 흔들렸다. “기억났구나.” “왜 그랬어요.” 정국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나 혼자 잊게 했어요.”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작두 아래로 붉은 천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방울 소리가 가까워졌다. 딸랑. 딸랑.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태형의 발밑 칼날이 희미하게 빛났다.
태형은 정국을 보며 낮게 말했다. “네가 나를 기억하면, 계속 나를 찾을 테니까.” “그래서요.” “찾다가 다칠 테니까.” 정국은 헛웃음을 흘렸다. 화가 나는데, 동시에 너무 아팠다. 태형은 늘 이런 식이었다. 혼자 아프고, 혼자 떠나고, 혼자 정국을 살렸다고 믿었다.
“형은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태형의 표정이 무너졌다. 정국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작두 앞에 서자 손목의 이름 자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잊어서 산 게 아니에요. 그냥 이유도 모르고 계속 허전했어요. 누굴 잃어버린 사람처럼 매일 이상했어요.” “정국아.” “그러니까 이번엔 형 마음대로 못 가요.” 정국은 작두 위의 태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형은 그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잡고 싶은데 잡으면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내려와요.” “안 돼.” “왜요.” “이번에도 내가 내려가면, 네가 대신 올라가게 돼.” 정국은 그 말에 잠깐 멈췄다. 작두가 원하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누군가가 운명을 받아내야 끝나는 꿈. 태형은 그걸 알면서도 계속 혼자 작두 위에 섰던 거였다.
정국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태형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같이 내려와요.” 태형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건 없어.”
“해본 적 없잖아요.” “위험해.” “형 혼자 가는 것보다 덜 위험해요.” 정국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작두 위로 손을 뻗어 태형의 손목을 잡았다. 순간 칼날이 날카롭게 울었다. 손목에 새겨진 태형의 이름이 붉게 번졌고, 태형은 정국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놔. 정국아, 이러면 너까지 끌려가.” “그럼 끌려갈게요.” “제발.” “싫어요.”
정국은 이를 악물고 태형을 끌어당겼다. 손끝이 닿자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태형이 처음 웃어주던 날. 정국이 태형의 손을 잡고 도망치자고 말하던 밤. 서로 좋아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결국 작두 앞에서 헤어졌던 마지막 순간. 그 모든 기억 속에서 정국은 늘 태형을 잡고 있었다. 놓은 적은 없었다. 태형이 혼자 놓고 간 거였다.
정국은 울듯이 웃었다. “형이 틀렸어요.” 태형이 정국을 바라봤다. “나는 형 때문에 위험해진 게 아니야.” 정국은 태형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형이 없어서 위험했던 거야.” 그 말이 끝나자 방울 소리가 멈췄다. 붉은 천이 공중에서 멎었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정국을 보고 있었다. 오래 참았던 눈물이 결국 태형의 뺨을 타고 떨어졌다.
정국은 작두 위로 한 발을 올렸다. 태형이 놀라 정국을 붙잡았다. “하지 마.” “그럼 내려와요.” “정국아.” “같이.” 태형은 한참 동안 정국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 내민 손을 잡은 채, 태형은 작두 위에서 한 발을 내렸다.
순간 작두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붉은 방이 흔들렸다. 촛불이 한꺼번에 꺼지고, 바닥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둠이 몰려왔다. 정국은 태형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태형도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 두 팔로 정국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이번엔 내가 먼저 찾았어요.” 정국이 속삭였다. “응.” 태형의 목소리가 정국의 어깨에 묻혔다. “이번엔 네가 안 늦었어.”
눈을 떴을 때, 정국은 연습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새벽은 아니었다. 환한 오후였다. 음악은 꺼져 있었고, 창밖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정국의 앞에는 태형이 있었다. 태형은 정국의 손을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정국은 숨을 멈추고 태형의 이름을 불렀다.
“형.”
태형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정국을 본 태형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웃었다. “또 그렇게 부르네.” 정국은 대답 대신 태형을 끌어안았다. 태형의 몸이 잠깐 굳었다가, 이내 정국을 마주 안았다. 꿈이 아니었다. 붉은 방도, 작두도 없었다. 태형은 정국의 품 안에 있었다.
정국은 태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말했다. “다시는 혼자 가지 마요.” “응.” “나 잊게 하지도 말고.” “응.” “그리고 좋아한다는 말도 혼자 삼키지 말고.” 태형이 조용히 웃었다. 젖은 숨이 정국의 목덜미에 닿았다.
“좋아해, 정국아.” 정국은 태형을 더 세게 안았다. 이제야 오래 비어 있던 곳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도요.” 손목의 붉은 선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아주 희미한 이름만 남아 있었다. 태형. 정국은 그 자국을 보다가 태형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태형의 손목에도 같은 자국이 있었다. 정국.
태형이 그걸 보고 작게 웃었다. “이제 서로 못 잊겠네.” 정국은 태형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을 천천히 끼웠다. “안 잊을 건데요.” 태형이 정국을 바라봤다. 더 이상 오래 기다린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이제야 돌아온 사람을 눈앞에 둔 얼굴이었다.
정국은 태형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이번 생은 같이 가요.” 태형은 대답 대신 정국의 손을 꼭 잡았다. 방울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작두도, 붉은 방도 사라졌다.
남은 건 서로의 이름이 새겨진 손목과,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약속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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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