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decided not to cross the line.

2화. 전화 한 통화

내가 가고 싶었던 과는 꽤 높은 인기에 지원해봤자

합격할 리 만무하여 안전하게,


그리고 문과에서 그나마 실용적이라고 생각되는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번역일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 한 선택이었다.


영미 소설과 시와 희곡을 공부하면서

나름의 해석을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재미있었고,


학교 다니는 동안 잘 한 과 선택으로 인해서,

줄곧 과외를 하면서 용돈도 잘 벌어 썼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살아보니 알겠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내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과연 이 일로 나의 노후를 책임지면서 살 수 있을까.


파파고에, GPT에 물어만 보면 되는데

나 같은 번역가가 더 이상 필요나 있을까 싶다.


차라리 다른 일을 해 볼까 싶기도 하다.


'영어 학원은 어떨까?'



이런 저런 생각에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 밤이 많아진

날들이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버티던 중에 들어온 행운 같은

기회.




휴대폰 화면에 '내 친구 수연' 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나의 하소연과 시름을 공유하는 대학 친구.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외국계 화장품 회사에서 근무했지만,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로 중2병 걸린 자신의 아들

디스를 일삼는 독설가.




"뭐 하고 있냐?"

전화를 받자 마자 수연이는 타박하듯이 따진다.



"어...그냥 있지 뭐.

 웬일로 전화씩이나 했어? 급하게 할 말 있어?"



"눈치는 빨라가지고...

내가 너한테 일자리 하나 줄라고 전화했지.

빨리 얘기해 주고 싶은데 니가 카톡 늦게 읽으면

어떻게 해. 못 참고 전화했지."



"일자리? 누가 번역가 찾고 있어?"

나름 '일자리' 라는 단어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아니, 번역은 아닌데, 엄청 핫한 일이야.

 너한테 활력을 줄만한 새롭고 신선한 일.

 뭔지 궁금하지?"

수연이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런 일이 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영어랑 관련된 일 아니야?

혹시 누가 과외 선생님 구해 달래?"



"어!! 맞아. 과외 선생님. 근데 학생이 겁나 특별해."



'특별한 학생? 엄청 부잣집 아이인가?

아님 진짜 공부를 잘 하는 학생?'



"너 어쩌면 아이돌 영어쌤 될 수도 있어."



"엥?? 아이돌? 뭔 소리 하는 거야? 꿈 꿨어?" 

하도 예상치 못한 말에 나도 모르게 콧방귀가 껴졌다.



"아니~ 꿈 같은 소리 한다. 진짜라니까!!

 왜 우리 3년 선배 중에 석진 선배 있지?  

 키 크고 잘 생겨서 인기 많았잖아.

 그 선배 지인이 엔터 쪽에 있는데,

남자 아이돌 영어 선생님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대.

석진 선배 와이프랑 나랑 좀 아는 사이인데

와이프 통해서 얘기가 들어왔어.

듣자 마자 네 생각 나서 얘기했는데 괜찮지?

우선 고정적으로 수입 들어오고.

아이돌 얼굴 보면서 수업 하면 사실 니가 돈을 줘야 돼.

얼마나 즐겁냐고."



수연이가 숨도 안 쉬고 하는 말에

도통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아니,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짜로 나를 추천했다는 건가?'



"그래서, 나보고 아이돌 과외 선생을 하라는 거야?

 과외 손 놓은 지도 한참 됐는데 이제 와서?

 그리고 아이돌인데 너무 부담스럽다.

 괜히 소개한 너나 석진 선배한테 민폐 끼치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되고..."

망설이는 나에게 수연이는 쐐기의 한 마디를 했다.




"너 얼마 전에 나랑 영화 본 거 있지?

 거기 나온 애야.

네가 잘 생겼다고, 연기 너무 잘 한다고

그 후에 혼자서 여러 번 더 봤다고 했잖아.

이런 기회를 놓친다고?

너 말고도 소개해 준다고 하면

다들 장난 아니게 달려 들걸."




오...마이...갓....그 아이돌 배우?

커다란 눈에 눈물 가득 머금고 연기하던 그 배우?

물 속에서 처연한 표정을 지었던 그?

그 배우의 연기에 푹 빠져 3번을 더

혼자 극장으로 갔었다.

전에 못 봤던 어떤 장면을 찾아낼까 설레기도 하고,

기억에 남았던 그 배우의 대사를 따라해 봤다.

매번 눈물이 났고,

눈물 범벅 얼굴로 부끄럽고, 창피해서

제일 처음으로 극장을 나왔다.



나는 그 영화에서 그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길로 유튜브 영상도 찾아 보고,

자신의 외모만 믿지 않고, 노력하는

참 괜찮은 인성을 가진 사람 같아 보여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배우의 영어 선생님이 될 수 있다니...

마치 꿈 같았다.




"여보세요? 전화 끊은 거야? 야. 유정아!!" 

수연이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나는 이미 내 안의 세계로 빠져들어

수연이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 어.. 듣고 있어.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인터뷰 같은 거 봐야 하는 건가?"

나는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억지로 침착한 채 입꼬리를 눌러 가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쭈...? 꽤 침착한데?

너 지금 좋아서 웃음이 비실비실 나오지? 

춤추고 있는 거 아냐?"




'귀신 같은 기지배'

"야...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아이돌이라고 난리치고

좋아하냐?

그래서 뭐?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너 지금 자존심 부리냐?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른 사람 소개시켜 줘버린다."




"아니, 누가 안 하겠대? 나야 부수입 생기고 좋지.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 

다급한 처세 전환이 필요했다.



"사실 석진 선배한테 진중하고,

말 안 나올 수 있는 사람으로 소개해 달라고

엄청 부탁했대.

아마 연예인이라서 조심스러운 거겠지?

근데 내 주위에서 제일 진중한 사람이 너야.

푸하하. 다 나같은 사람들 밖에 없어. 너도 알지?"



화끈한 나의 친구, 이수연.

인터뷰가 가능한 날짜를 얘기해 주고,

컨펌을 받는대로 기획사 사무실로 가서

대표와 면접을 보기로 했다.

잔잔한 나의 호수에 커다란 돌을 던져 준 내 친구,

수연 사랑해...




인터뷰를 위해서 나는 뭘 해야 하지? 

인터뷰 때 그 아이돌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건가?

오..마이..갓..너무 떨린다.



"대표님, 저는... 저 선생님 괜찮은 것 같아요."
<3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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