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ak Hero Virtual Sequel] I Made You Cry Because You're Pretty.

그 투명했던 물방울이 닿은 자리는 아주 느리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기세로 번져나갔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았던 나의 평면적인 세계에 처음으로 생긴 균열이자, 지독하게 선명한 얼룩.

 

연시은.

 

턱을 괴고 가만히 너를 응시했다.

하얀 피부 위로 뜨겁게 피어오른 뺨의 붉은 자국.

그리고 그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짓무른 듯 충혈된 채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동자.

 

누군가에게 맞은 게 분명한 얼굴인데도, 너는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젖은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오만한 저항감이 내 안의 무언가를 날카롭게 긁어내며 소리 없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분명 엉망인 몰골인데, 내 눈에는 그 어떤 풍경보다 선명한 ‘색’으로 보였다.

너의 그 붉은 눈시울을 마주한 순간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이 지루한 무채색 세상을 단번에 물들여버린 유일한 존재.

나의 메마른 도화지 위로 번져버린 너를, 나는 기꺼이 환영하기로 했다

 

 

'안녕, 나의 구원자.'

 

 

 

 

 

 

 

 

 

제2화. 구원자

 

 

 

 

담임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교실 앞쪽에서 먼지처럼 흩어지는 조례 시간. 새로 온 전학생을 향한 아이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쏟아졌지만, 수호는 그 모든 소음을 차단한 채 제 옆에 앉은 시은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 위로,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 홧홧하게 타오르는 뺨. 그 위에 남겨진 선명한 붉은 얼룩이 내 눈을 기분 좋게 자극해온다.

 

나는 턱을 굄 채, 시은을 향해 낮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내 목소리가 분명 들렸을 텐데도, 너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내 가슴 밑바닥을 묘하게 간지럽혔다.

 

“통성명은 해야지. 나랑 이제 짝꿍인데.”

 

내 목소리가 분명 들렸을 텐데도, 시은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정면만을 응시하는 그 지독한 무심함. 하지만 시선조차 주지 않는 그 태도가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틀며 조금 더 몸을 밀착했다.

 

무표정한 얼굴과 어울리는 창백한 피부, 그리고 그 위로 붉게 부어오른 뺨. 그 선명한 대비가 내 안의 기묘한 가학심을 건드렸다. 델 듯한 열기를 머금은 그 상처를 당장이라도 손끝으로 짓눌러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가 거리를 좁힐수록 너를 감싸고 있던 정적이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 한 번을 못 듣네.”

 

나는 귓가에 닿을 듯이 더 깊숙하게 몸을 숙였다.

 

“이러면 나만 신나는데. 대답할 때까지 계속 쳐다볼 핑계가 생기잖아.”

 

내 끈적한 압박에 굳게 닫혀 있던 너의 고개가 그제야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온다.

 

 

나를 밀어내려는 노골적인 적의 서린 그 시선이, 드디어 나를 온전히 담아냈다.

 

혐오가 뒤섞여 붉게 충혈된 그 눈동자.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한 그 눈빛이 오히려 내 가슴 속 깊은 곳을 기분 좋게 긁어내렸다. 아무런 색도 없던 내 무채색 세계가 너의 그 날카로운 눈빛 하나로 순식간에 휘저어지는 기분.

 

불쾌하기는커녕, 나는 이 낯선 감각이 마음에 들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느릿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시은의 왼쪽 가슴에 달린 하얀 명찰. 그 위로 단정하게 새겨진 세 글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연시은.’

 

입안에서 그 이름을 굴리듯 읊조리자, 목구멍을 타고 묘한 흥미가 배어 나왔다. 처음 불러보는 이름인데도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감각이 선명해진다. 

 

나는 너의 그 혐오 섞인 눈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게 들여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반가워, 연시은.”

 

.

.

.

 

한편, 그 기묘한 정적의 뒤편에서 이한은 턱을 괴고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전학 오자마자 제멋대로 자리를 옮겨 앉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저 전학생이라는 놈은 하는 짓거리마다 사사건건 눈에 거슬렸다. 특히 시은이 대답 한마디 없이 정면만 응시하며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데도, 저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은이 대답을 하든 말든 이 상황 자체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수호는 시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인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이한은 까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놈의 손가락이 시은의 붉게 부어오른 뺨을 향해 느릿하게 뻗어 나가는 순간, 이한은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시은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지만, 그 무방비한 뺨에 놈의 손이 닿는 꼴은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대놓고 시은이를 편을 들었다간, 하이에나 같은 반 애들이 시은이를 더 물어뜯을 게 뻔했다. 이한은 최대한 귀찮다는 듯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딩동댕동-'

 

마침 정적을 가르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이한의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거친 마찰음을 냈다. 

 

‘드륵-’

 

갑작스러운 소음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로 쏠렸다. 이한은 쏟아지는 시선을 무심하게 받아내며, 수호와 시은 사이에 흐르는 그 숨 막히는 공기 안으로 성큼 발을 들였다.

 

이한은 수호의 곁을 지나치다 말고, 삐딱하게 놓여 있던 그의 책상을 발끝으로 툭, 걷어찼다.

 

‘쾅-’

 

철제 책상이 바닥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수호의 상체가 그 반동으로 크게 흔들렸고, 시은의 뺨을 향해 뻗어 있던 손가락은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붕 떴다.

 

수호는 제 책상을 발로 걷어찬 이한의 신발 끝을 빤히 응시하다가, 피식,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한을 올려다보았다.

 

“야, 넌 오자마자 존나 나댄다?”

 

낮게 깔린 이한의 목소리가 수호의 귓가에 날카롭게 박혔다. 단순히 짜증 섞인 투정이라기엔 지나치게 서늘하고 날이 서 있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수호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시은을 향해 씽긋 웃고 있던 그 기괴한 표정 그대로, 수호는 이한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응? 나?”

 

마치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사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오히려 보는 사람의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수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려 이한의 신발 끝을 빤히 응시하다가, 다시 시선을 올려 미소 지었다.

 

“아, 미안. 내가 좀 들떴나 봐. 짝꿍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한은 수호의 해사한 미소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걱정으로 일렁이던 속내를 억누르며, 수호의 책상을 다시 한번 발로 찼다.

 

“짝꿍이 마음에 들고 말고는 내 알 바 아니고.”

 

이한은 수호와 시은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서며, 수호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러 내렸다. 시은에게 향하던 수호의 시선을 강제로 차단하며 수호의 코앞까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나대지 마, 죽여버리기 전에.”

 

낮게 깔린 이한의 목소리가 수호의 귓가에 날카롭게 박혔다. 단순히 기 싸움을 거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와 꽂힐 것 같은 살벌한 기세에 교실 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금방이라도 사고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 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마른침을 삼켰다.

 

수호는 이한의 위협적인 태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더니, 제 어깨를 누르는 이한의 손을 무심하게 털어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다시 시은을 향해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무서워라. 그지, 시은아?”

 

이한의 경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수호의 시선은 여전히 시은의 붉게 부어오른 뺨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호는 비아냥거리며 고개를 까닥이더니, 다시금 시은의 영역을 침범하듯 몸을 기울였다.

 

“근데 시은아, 너 이거... 얘가 그런 거지? 딱 보니까 손버릇 안 좋게 생겼네.

 

수호가 이한을 향해 턱짓을 하며 툭 던진 그 한마디. 시은을 위하는 척하며 이한을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그 뻔뻔한 도발에 이한의 이성이 단숨에 끊겨나갔다.

 

'드륵-! 쾅! '

 

이한이 수호의 책상을 거칠게 걷어차며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낚아챘다. 수호의 몸이 공중으로 들썩이며 끌려 올라왔다. 교실 안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에 잠겼다.

 

“야, 내가 작작 하라고 했지.”

 

이한이 이빨을 갈며 수호를 바짝 당겨 세웠다. 살벌하게 타오르는 이한의 눈빛에도 수호는 여전히 입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 속에 서려 있던 장난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서늘하고 날카로운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와... 크큭. 눈빛 봐.”

 

수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낮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이한의 이성을 비웃듯, 수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제 얼굴을 이한의 코앞까지 바짝 들이밀었다.

 

“이러다... 한 대 치겠다? ”

 

낮게 내리깔린 수호의 목소리가 이한의 귓가를 긁었다. 수호는 피할 생각도 없다는 듯, 오히려 턱을 살짝 치켜들며 도발적으로 속삭였다.

 

“그럼 쳐봐. 시늉만 하지 말고 "

 

코앞까지 다가온 수호의 눈동자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어디 한번 휘둘러 봐'라고 재촉하는 듯한 그 기괴한 정적에 이한의 인내심이 완전히 끊겼다. 이한의 오른 주먹이 터질 듯 꽉 쥐어지며 허공으로 치켜들리려는 찰나였다.

 

'드르륵-'

 

뒷문이 거칠게 열리며 담임이 들이닥쳤다. 담임은 멱살을 잡고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한을 향해 소리쳤다.

 

“이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전학 온 첫날부터 친구를 괴롭혀? 당장 손 안 놔!”

 

담임은 정치인의 아들이자 학교 후원자의 자제인 안수호의 눈치를 살피느라 급급했다. 수호가 전 학교에서 어떤 사고를 치고 왔는지, 왜 이곳으로 강제 전학을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담임에게 수호는 학생이라기보다 모셔야 할 상전에 가까웠다.

 

이한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담임은 막무가내였다.

 

“수호야,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이한이 너, 오늘 혼 좀 나봐야겠다. 당장 교무실로 따라와!”

 

이한은 억울함에 눈을 부릅떴지만,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우면 시은에게 불똥이 튈까 봐 결국 멱살을 쥐었던 손을 거칠게 풀었다. 수호는 옷깃을 정리하며 그런 이한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이한은 교실을 나서며 수호의 옆을 스칠 때, 오직 수호만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낮게 읊조렸다.

 

“...넌 이따 보자.”

 

수호는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거렸고, 이한은 분노를 삭이며 담임을 따라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다시 조용해진 교실. 이한이 사라지자 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수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와, 대박. 너 누구길래 선생님이 이한이만 데리고 가?”

“야, 너 혹시 돈 많아? 집안 장난 아닌가 보네?”

 

아이들이 수호를 둘러싸고 떠들어대는 사이, 시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강우영이 던져버렸던 이어폰을 찾기 위해서였다. 시은의 시선이 수호의 발밑에 떨어져 있는 이어폰에 닿았다.

 

시은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수호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폰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여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시은을 빤히 바라보던 수호가 그대로 발에 힘을 실어 이어폰을 짓눌렀다. '드득', 신발 밑창과 바닥 사이에 낀 이어폰이 비명을 지르듯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시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바닥에 깔린 이어폰 위로 시은의 시선이 느릿하게 머물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수호의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수호는 주변 아이들의 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시은의 흔들리는 눈동자만을 눈에 담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 시은의 반응에 수호는 문득 궁금해졌다.

 

시은의 고요한 세상에 나라는 물방울이 서서히 번져가게 될까. 아니면, 결국 참지 못하고 그 평온함을 내 손으로 온통 휘저어 놓게 될까.

 

수호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느릿하게 달싹이며, 오직 시은만이 읽을 수 있는 물음을 그려냈다.

 

"……왜?’

 

그 짧은 입모양 속엔 시은의 단단한 벽을 헤집어보고 싶은, 수호의 얄궂은 호기심이 가득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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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내가 지금 짓밟고 있는 것이 이 아이의 물건이 아니라,

훗날 내가 뼈저린 후회 속에서 갈구하게 될 누군가의 간절한 진심이었다는 것을.

 

내 무채색 세상에 떨어진 건 축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가면을 쓴 채 나를 서서히 잠식하고,

끝내 나의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가장 잔인한 파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