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빙의글] 그 집 남자들

3화. 기억나면 안 되는 일

“이거… 나 맞죠?” 여주가 사진을 들고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색이 조금 바래 있었고,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사진 속에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셋이 나란히 서 있었다. 여자아이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그 옆에 선 아이 하나는 장난스럽게 브이를 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는 조금 뒤에서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보고 있었고, 가장 키가 큰 아이는 여자아이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웃고 있었다. 여주는 사진 속 여자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자신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지만, 그 얼굴은 아무리 봐도 나였다.

 

 

거실에는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정국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고, 석진은 주방 쪽에 서서 물끄러미 사진을 바라봤다. 태형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여주가 사진을 꺼내 들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주는 다시 물었다. “왜 아무도 대답 안 해요?”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나왔다. 하지만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사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만 모르는 얘기예요?” 정국이 먼저 입을 열려고 했다. “그게…” 그러나 석진이 낮게 불렀다. “정국아.” 그 한마디에 정국은 입을 다물었다.

 

 

여주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며칠 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석진이 자신이 못 먹는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피해주는 것도, 정국이 자신이 좋아하는 간식을 알고 있는 것도, 태형이 비 오는 날 창문을 열어두지 말라고 한 것도. 처음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이 아니었다. 세 사람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자신만 몰랐다. “처음 보는 사이 아니었네요.” 여주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말했어야죠.” 석진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말고 설명을 해줘야죠.” 여주의 눈이 붉어졌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왜 이 사진에 내가 있는 건지, 왜 당신들은 다 아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는지.”

 

 

 

 

정국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말하고 싶었어요.” “정국아.” “형, 언제까지 숨길 건데요.” 정국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는 여주를 바라봤다. 장난기 많던 얼굴은 없었다. 대신 오랫동안 참아온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누나는 여기 살았어요. 아니, 정확히는 우리 옆집에 살았어요. 아주 어릴 때. 우리 넷이 매일 같이 다녔고, 맨날 싸우고, 놀고, 혼나고 그랬어요.” 여주는 숨을 삼켰다. 누나. 그 호칭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정국은 이어 말했다. “나는 맨날 누나 따라다녔고, 태형이 형은 말은 안 해도 누나만 봤고, 석진이 형은 우리 셋 사고 치면 맨날 수습했어요.”

 

 

“그런데 왜 나는 기억을 못 해요?” 여주의 질문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번에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석진이 천천히 거실로 걸어왔다. 그는 여주 앞에 섰지만, 너무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늘 그랬듯 적당한 거리를 지켰다. “어느 날 갑자기 이사를 갔어요. 아무 말도 없이.” “제가요?” “응.” 석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날 비가 많이 왔고, 너는 울고 있었어. 우리는 따라가려고 했는데 어른들이 막았고, 그 뒤로 연락이 끊겼어.” 여주는 사진을 내려다봤다. 비. 또 비였다. 이 집에 들어온 뒤로 계속 자신을 따라다니던 단어. 기억 저편에서 자꾸만 문을 두드리던 장면.

 

 

 

 

태형이 그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그날 나한테 약속했어.” 여주의 시선이 태형에게 향했다. 태형은 천천히 일어나 여주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눈은 전혀 담담하지 않았다. “다시 올 거라고.” “제가요?” “응.” 태형은 아주 작게 웃었다. 웃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슬퍼 보였다. “그래서 기다렸어.” 여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태형의 말이 너무 무거웠다. 기다렸다는 말이 단순한 인사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래 닫아둔 문 앞에 계속 서 있던 사람의 말 같았다.

 

 

정국은 고개를 숙인 채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처음엔 진짜 화났어요. 어떻게 아무 말도 없이 가냐고.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화도 못 내겠더라. 누나가 왜 갔는지도 모르니까.” 그는 억지로 웃었다. “근데 다시 봤는데, 누나는 우리를 진짜 하나도 기억 못 하고. 그래서 더 화났어요. 반가운데, 서운하고, 웃긴데, 짜증나고.” 정국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나는 아직도 다 기억하는데.” 여주는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아팠다.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 미안해하는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국의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 미안하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왜 말 안 했어요?” 여주가 물었다. 이번에는 태형을 보고 있었다. 태형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네가 무서워할까 봐.” “이미 무서워요.” “알아.” “근데 왜 계속 숨겼어요?” 태형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석진이 말했다. “네가 기억을 잃은 건지, 잊고 싶은 건지 몰랐어.” 그 말에 여주의 손에서 사진이 조금 내려갔다. 석진은 천천히 이어 말했다. “사람은 가끔 너무 힘든 기억을 일부러 밀어내기도 하니까. 우리가 그걸 억지로 끄집어내도 되는지 몰랐어.” 여주는 입술을 꾹 눌렀다.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집에 있는 동안 자신은 계속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했고,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집 안의 공기는 달라졌다. 세 사람은 더 이상 완전히 숨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말해주지도 않았다. 여주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석진은 여전히 밥을 챙겨줬고, 정국은 여전히 시끄럽게 굴었고, 태형은 여전히 조용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여주가 그 모든 행동을 처음처럼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는 것뿐이었다. 석진이 “당근 싫어하지?” 하고 묻는 순간, 정국이 “누나 원래 이 과자 좋아했잖아” 하고 말하는 순간, 태형이 말없이 현관 쪽 우산을 챙겨두는 순간마다 여주는 모르는 기억 앞에 혼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여주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밤늦은 시간이었다. 캐리어를 펼쳐놓고 옷을 아무렇게나 넣었다. 이 집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고마운 사람들인데도 숨이 막혔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자신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괴로웠다. 캐리어 지퍼를 올리려는 순간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정국이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여주를 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가려고요?” 여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국은 한 걸음 들어왔다. “왜요. 우리 때문에요?” “정국 씨.” “또 정국 씨래.” 정국은 작게 웃었지만 금방 웃음을 거뒀다. “가지 마요.” 그 말은 장난스럽지 않았다. “기억 안 나도 되니까 그냥 있어요. 우리 아는 척 안 할게요. 불편하면 말 안 걸게요. 그러니까 가지 마요.”

 

 

여주는 정국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요.” “그 말 하지 마요.” “여기 있으면 계속 이상해요. 내가 나를 모르는 기분이에요.” 정국은 더 붙잡지 못했다. 손을 뻗었다가, 결국 거둬들였다. 그때 석진이 복도 끝에서 걸어왔다. 그는 정국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뒤로 물렸다. “정국아, 잠깐.” 정국은 억울한 얼굴로 석진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진은 여주를 바라봤다. “정말 나가고 싶어요?”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은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요. 밤이 늦었어요.” 그 말에 오히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붙잡지 않는 다정함이 더 아팠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태형이었다. 그는 복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던 사람처럼 조용했다. 여주가 캐리어를 끌고 나오자 태형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가면 편해져?” 여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형은 여주의 캐리어를 보다가 다시 여주를 봤다. “그럼 가.” 정국이 놀란 듯 태형을 돌아봤다. “형.” 태형은 정국을 보지 않았다. “대신 도망치는 거면, 또 후회할 거야.” 그 말에 여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또. 그 한 글자가 이상하게 아팠다. 여주는 이를 악물었다. “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요.” 태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알고 싶어서 안 게 아니야.” “그럼 뭔데요.” “잊히고 싶지 않아서 기억한 거야.”

 

 

여주는 더 듣지 못하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운동화를 신고, 문을 열었다. 밖에서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낮부터 흐리긴 했지만 이렇게 쏟아질 줄은 몰랐다. 빗소리가 현관 안까지 밀려 들어왔다. 여주는 멈춰 섰다. 이상하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빗냄새가 코끝에 닿는 순간, 머릿속 어딘가가 세게 흔들렸다. 낡은 골목, 젖은 운동화, 어린 정국이 울먹이는 얼굴로 손을 잡던 장면. 석진이 우산을 씌워주며 괜찮다고 말하던 목소리. 그리고 태형이 대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눈.

“가지 마.”

 

 

어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여주는 숨을 헛삼켰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쿵, 하고 캐리어가 바닥에 쓰러졌다. 뒤에서 정국이 급하게 달려왔다. “누나!” 석진이 여주의 어깨를 잡았고, 태형은 비에 젖은 현관 앞까지 따라 나왔다. 여주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비 오는 날, 자신을 부르던 세 사람. 닫히던 차 문. 끝까지 놓지 못했던 작은 손. 그리고 자신이 울면서 했던 말.

 

 

나 꼭 다시 올게.

 

 

 

 

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빗소리 사이로 세 사람의 얼굴이 흐리게 보였다. 정국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고, 석진은 여주가 무너지지 않게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다린 사람처럼, 아주 조용히 여주를 보고 있었다. 여주의 입술이 떨렸다.

 

 

“나…”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여주에게 닿았다.

여주는 젖은 숨을 삼키며, 아주 오래 묻어두었던 이름들을 처음으로 제대로 떠올렸다.

 

 

“너희… 기억났어.”

 

 

다음 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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