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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중 첫째 날 아침

윤 선생이 식당에서 손뼉을 한 번 쳤다.
윤 선생님 "오늘 오후엔 능력 검정 시험이 있다"
성호 "원래 월말인데 왜 지금 해요?"

성호가 투덜거렸지만 윤 선생님은 웃기만 했다.
윤 선생님 "졸업식이 한 번 더 있잖니 겸사 겸사 너희들 잘 크고 있는지도 보고"
오전은 길찾기 수업이었다.
은하원 뒤편엔 생울타리 미로가 있다.

머리를 살짝 넘는 둥근 울타리가 물결처럼 휘어지며 끝도 없이 겹쳐 있고
그 사이로 자갈 깔린 좁은 길이 이어진다.
까치발을 들어도 건너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미로 끝엔 뾰족한 측백나무들이 병정처럼 줄지어 서 있다.
위에서 보면 예쁜 무늬 같지만 안에 들어서면 곧은 길이 하나도 없어서 금방 방향을 잃는다.
구조는 매주 바뀌고 짝마다 들어가는 입구도 걷는 길도 다르다.
길 곳곳엔 관문이 있다.
몸으로 넘어야 하는 것도 있고, 문제가 있어 머리를 써서 풀어야 하는 것도 있다.
어떤 관문이 나올지는 들어가 봐야 안다.
출구는 하나뿐이기 때문에 출발하는 모두는 한 출구를 위해 달려간다.
항상 수업 이후에는
출구까지 걸린 시간을 순위 게시판에 붙였다.
비가 와도 항상 수업은 강행 했었다.
어제까지 유리 언니 이름이 붙어 있던 자리였던 게시판 맨 위칸이 비어있다.
윤 선생님 "오늘 짝은 제비뽑기다"
운학 "누나! 나 누나랑 할래!"
운학이 내 소매를 잡고 늘어졌지만 제비는 공평했다.

성호와 이한은 줄 하나의 패
재현과 운학은 줄 두개의 패
나와 태산은 줄 세개의 패
오늘은 홀수로 참여 하여서 한 명은 혼자 뛰었다.
리우 혼자 줄 네개의 패를 가졌다.

색마다 입구가 달랐다.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고 각자의 입구로 흩어졌다.

호루라기가 울렸다.
태산은 들어서자마자 입속으로 숫자를 셌다.
태산 "열둘 열셋… 왼쪽"
태산 "스물하나 여긴 지난주 구조를 뒤집은 거야 오른쪽"

나는 태산의 등만 보고 걸었다.
길은 자꾸 휘어졌다.
걷다 보면 왔던 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젖은 잎 사이로 빗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 위로 자꾸 어젯밤 그 목소리가 겹쳤다.
'살려줘 누가 좀'
울타리 너머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우르르 지나갔다.
성호 "이한아 이거 진흙이야! 빠진다 빠져!"

반대쪽 어딘가에선 잎사귀가 크게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운학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학 "형 이거 어떻게 건너!"
재현 "천천히 해 나 여기 있어"

모퉁이를 돌자 길이 막혀 있었다.

울타리 사이에 나무 벽이 세워져 있었다.
사람 키 두 배는 될 만큼 높은 벽에 매듭 진 밧줄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비에 젖은 밧줄은 미끄러웠다.
나는 매듭에 발을 걸고 한 칸씩 올라갔다.
손바닥이 쓸려 따가웠다.
꼭대기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니 태산이 밧줄을 붙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태산은 숫자는 잘 세도 철봉엔 일 초도 못 매달리는 애였다.
하나 "손 줘"
태산 “…나 무거워”

하나 "알아 빨리"
태산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안경이 비뚤어진 태산이 겨우 벽 위로 올라왔다.
벽을 넘자 이번엔 나무 문이 길을 막고 있었다.
문엔 숫자 다이얼 두 개가 달린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 위에 칼로 새긴 글씨
‘1 1 2 3 5 8 13 □ 34’
태산의 눈이 반짝였다.
이런 건 태산 차례였다.
태산 "앞에 두 개를 더하면 다음 숫자… 그럼 여긴…"
태산이 손가락을 꼽는 사이
누군가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리우였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내 옆에 서 있었다.
미로 안에서는 누가 가까이 오면 다 들렸다.
자갈 밟는 소리 잎사귀 스치는 소리
성호가 어디쯤 있는지도 운학이 어디서 헤매는지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리우가 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바로 등 뒤에 설 때까지
리우는 문에 새겨진 글씨를 보지도 않았다.
그냥 다이얼을 돌렸다.
이, 일
딸깍
자물쇠가 열렸다.
태산 “…너 흰 패잖아”
태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태산 "여긴 다른 패 길이야 넌 여기 올 수가 없어"

리우 "길을 잘못 들었나 보지"
태산 "그럼 문제는? 보지도 않았잖아"
리우 "감이지"

리우가 웃었다.
젖은 앞머리가 흘러내렸다.
리우 "하나야 손 미끄러워"

리우가 내민 손을 잡고 문을 지나 출구로 나왔을 때 앞엔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일등이었다.
리우는 출구 앞에서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분명 같이 나왔는데..
한참 뒤 빨간 패가 나왔다.
성호는 허리까지 진흙투성이였다.
성호 "진흙 구덩이 위에 밧줄 하나 걸어놓고 건너래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고"
이한 "형이 두 번 빠졌어"
성호 "그걸 왜 말해!"

파란 패는 꼴찌였다.
재현이 운학을 등에 업고 나왔다.
외나무다리 관문에서 운학이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고 했다.
재현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재현 "괜찮아 중간만 하면 돼"

저러니 맨날 순위가 중간이지
게시판 맨 위 빈칸에 내 이름이 붙었다.
유리 언니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뒤돌아보니 태산이 흰 패를 오래 보고 있었다.
웃지 않는 얼굴로


점심시간
태산이 내 옆자리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태산 "너 어제 어디 있었어?"
숟가락을 든 손이 멈췄다.
태산 "아까 벽 올라갈 때 봤어 신발 밑창에 붉은 진흙 운동장 흙은 회색이야 그 색 흙은 북쪽 숲에만 있어"
태산은 밥을 먹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목소리만 낮았다.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이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한 "어제 나랑 청보리밭 뒤에 있었어"

이한은 고개도 들지 않고 국을 떠먹었다.
이한 "비 와서 미끄러졌어 내가 잡아주려다 같이 넘어졌고"
태산 "청보리밭 흙도 회색이야"
이한 "그럼 네가 잘못 봤나 보지"
이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태산을 봤다.

평소처럼 조용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식탁 밑에서 이한의 발끝이 내 신발을 툭 건드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이
태산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신발을 한 번 더 보고 숟가락을 들었다.
오후엔 능력 검정 시험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늘 보던 시험이었다.
교실에서 문제를 풀고 의무실에서 피를 조금 뽑고
머리에 차가운 쇠 테를 쓰고 그림을 보면 끝나는
어제까지는 무섭지 않았다.
첫 장은 늘 보던 문제들이었다.
미로 그림에서 출구 찾기
숫자 열두 개 외웠다가 거꾸로 적기
조각난 지도 맞추기
연필 소리만 사각사각 났다.
마지막 장에서 손이 멈췄다.
'졸업식 날 배웅하며 본 것을 모두 적으시오'
매달 나오던 문제였다.
지난달엔 무엇을 적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옆자리 운학은 벌써 연필을 굴리며 다 썼다고 입 모양을 했다.

운학 마지막 질문 답지 '비 우산 손 흔드는 유리 누나'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였다.
나는 연필을 쥔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철문 까만 공간 문틀을 붙잡던 하얀 손
그런 걸 적을 수는 없었다.
결국 운학이 똑같이 적었다.
비 우산 손 흔드는 유리 언니
쓰는 내내 손끝이 떨렸다.
주사주의
의무실에선 윤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윤 선생님 "따끔하다"

바늘이 팔 안쪽을 찔렀다.
작은 유리관에 붉은 피가 차올랐다.
선생님은 유리관에 내 이름을 적은 종이를 감고 쟁반 위에 세웠다.
쟁반엔 아이들 이름이 붙은 유리관이 일곱 개 나란히 서 있었다.

윤 선생님 "이제 마지막이다"
선생님이 내 머리에 쇠 테를 씌웠다.
관자놀이에 닿은 금속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테에서 뻗어 나온 전선들이 벽의 낡은 기계로 이어져 있었다.
바늘이 종이 위를 사각사각 긁었다.
윤 선생님 "눈 뜨고 앞에 그림을 보렴"
벽에 걸린 판에 그림이 한 장씩 넘어갔다.
바다
선착장
운동장의 청보리
식당의 월명차 잔
그리고 이끼 낀 철문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바늘이 미친 듯이 종이 위를 휘갈겼다.

삐 하는 짧은 소리
윤 선생님이 기계를 들여다봤다.
아주 오래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내 시험지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 장을 오래 보았다.
윤 선생님 “…긴장했구나 괜찮다 하나야”
선생님은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쇠 테를 벗겼다.
기계에서 나온 종이를 찢어 시험지와 함께 서류철에 끼웠다.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었다.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의무실을 나서다 뒤를 돌아봤다.
쟁반 위 일곱 개의 유리관 중 하나만 따로 옮겨져 있었다.
내 이름이 감긴 유리관이었다.

D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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