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엔 삼각김밥을 먹으며 좋아한다고 말했고,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도 한 번 더 확인시켜 줬다.
그런데도 오늘 아침, 동민은 다시 원래의 거리로 돌아가 있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 복도에서 동민을 붙잡았다.
"…잠깐 얘기해요."
빈 회의실로 끌고 들어갔다.
동민이 문 앞에 선 채로 시선을 피했다.
"…왜 자꾸 피하세요."
"…피하는 거 아니에요."
"운학 씨랑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제 마음도 말씀드렸고요. 그런데도 계속 이러시잖아요. 이유가 뭔데요."
동민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화가 나기보다 서러워졌다.
"…저 싫으세요?"
"아니에요."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왔다.
그 빠름이 오히려 솔직했다.
"그럼 왜요."
동민이 한참 바닥만 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들릴 거 아는데."
"말씀해 보세요."
"…저도 설명은 잘 못 하겠는데, 그쪽을 보면 가끔 뭔가 스치듯 지나가요. 장면 같은 건데,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근데 이상하게 그 안에, 좋았던 감정이랑 아팠던 감정이 같이 들어 있어요. 분명 좋아했던 것 같은데, 동시에 그게 제일 아팠던 것 같고. 그게 무서워서 자꾸 거리를 두게 됐어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저 사람도 뭔가를 겪고 있는 걸까.
"…그 장면이, 구체적으로 어떤 거예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느낌이에요. 근데 요즘 그쪽 보면 자꾸 그래서, 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동민이 스스로도 당황한 얼굴이 됐다.
하려던 말보다 더 많이 뱉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냥. 말이 이상하게 나왔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말씀해 주세요. 이상해도 괜찮아요."
"…지금은, 저도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정리되면 말씀드릴게요."
더 캐묻고 싶었지만, 동민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회의실에서, 방금 들은 말을 몇 번이나 되짚었다.
동민이 뭔가 안고 있다는 의심은 세 번째 삶이 시작된 그날부터 있었다.
그런데 "장면이 스친다"는 말을 이렇게 직접 들은 건 처음이었다.
자신이 세 번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어쩌면 동민도 어떤 방식으로든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
오후, 자료실에서 운학과 마주 앉았다. 오늘은 미뤄 둘 수 없었다.
"…생각은, 다 끝났어요?"
운학이 잠깐 숨을 골랐다.
"…네. 여주씨 돕기로 했어요. 더 끌면 저도 성호 실장쪽으로 끌려 갈 것 같아서."
그 한마디로, 어제까지의 망설임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어제 말했던 거, 알아냈어요?"
운학이 수첩을 꺼내 펼쳤다.
"네. 결재 라인 따라가 봤는데, 성호 실장 선에서 안 끝나요. 한 단계 더 올라가요, BND 이사급 선에서. 이름까지는 아직 못 봤는데, 직급이랑 라인은 확실해요."
생각보다 더 깊었다. 성호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렇게 눈으로 확인한 건 처음이었다.
"…이름은 언제쯔음 나올 것 같아요?"
"그건 더 파야 알아요. 근데 시간이 많지 않아요. 정산일까지, 이제 딱 2주예요."
2주.
생각보다 짧았다.
두 번째 생 때도 이쯤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그날을 맞았다.
"저는 선일 캐피탈 쪽 자금 흐름에서 패턴 찾아볼게요. 과거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돈이 빠진 적 있는지, 그게 전부 성호 실장 선에서 끝나는지."
"저는 계속 결재 라인 팔게요. 누구 책상까지 가는지 끝까지 따라가 볼게요. 위험하긴 한데, 지금 안 하면 더 늦어요."
"조심해요. 눈에 띄는 행동 하지 말고."
"그쪽도요. 그 사람, 아직 따라붙어요?"
"…모르겠어요. 요 며칠은 안 보였는데, 그래서 더 불안해요."
운학이 수첩을 접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2주 안에 못 찾으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두 번의 생에서 모두 그다음은 죽음이었다.
이번엔 다를 거라고 믿고 있을 뿐, 확신은 없었다.
"…찾아야죠. 무조건."
2주라는 숫자를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두 번째 생 때는 이런 식으로 날을 세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세고 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달라졌다는 증거였다.
*
밤,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선일 캐피탈 쪽 자료를 다시 펼쳤다.
숫자 사이를 훑는 손이 자꾸 멈췄다.
자꾸 동민의 그 말이 떠올랐다.
장면이 스친다는 말.
좋았던 감정과 아팠던 감정이 같이 있다는 말.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두려움이 아니라, 반가움이었다.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반가움.
그런데 곧바로 다른 걱정이 뒤따라왔다.
지금은 동민도 그게 뭔지 모른다지만, 그 느낌이 언젠가 선명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었다.
그때 뭔가를 알게 된 동민이 혼자 움직이기 시작하면, 저번처럼 또 위험한 자리에 서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동민이 뭘 알게 되든, 그 전에 자신이 먼저 끝을 내야 했다.
그래야 이번 생에서는, 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창문을 닫고 자료를 다시 들여다봤다.
2주. 정답을 찾을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