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1화. 쫓기는 밤, 손을 내밀다

노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산 그림자가 마을을 덮었다.

여주는 몸종 단이와 함께 약초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산 어귀 쪽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닿아야 했다.

 

"아가씨, 좀 더 서두르셔야겠어요. 곧 캄캄해지겠어요."

 

단이의 재촉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길옆 수풀 너머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짐승인가 싶어 발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사람의 형체임을 알아챘다.

그것도 옷자락이 온통 붉게 젖은 채 쓰러져 있는 사내였다.

 

"아가씨, 가시면 안 됩니다!"

 

단이가 소매를 붙잡았지만 여주는 이미 몸을 돌린 뒤였다.

사람이 죽어가는 걸 뻔히 보고도 지나칠 수는 없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약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옆구리께가 깊게 베인 듯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팔에도 화살이 스친 자국이 선명했다.

누군가에게 쫓기다 당한 상처였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어렴풋이 사람들 발소리와 낮게 깔린 고함이 들려왔다.

여주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방향을 바꿔 산 아래쪽으로 멀어졌다.

누가 이 사내를 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발소리에 서린 살기만큼은 분명했다.

 

"단아, 도와다오. 이대로 두면 죽는다."

"하오나 아가씨, 이 사람이 대체 누구와 얽혀 이 꼴이 됐는지도 모르는데……."

"모르니까 더더욱 그냥 둘 수 없지 않느냐."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이유를 따질 겨를이 어디 있어."

 

여주의 단호한 말에 단이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반대편에서 사내의 팔을 부축했다.

둘이 힘을 합쳐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 무게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워 여주는 잠시 휘청였다.

그 바람에 사내의 얼굴이 달빛 아래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옷은 흙과 피로 범벅이 되어 원래 색을 알아보기 힘들었고, 머리칼도 헝클어져 이마에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 얼굴만은 이상하리만치 고왔다.

짙은 눈썹 아래 드리운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다.

핏기 없이 창백한 낯빛과 대조되어, 지저분한 행색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목구비였다.

고통에 겨워 미간을 찌푸린 채로도 이토록 단정한 얼굴이라니.

여주는 저도 모르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다 문득, 그의 옷깃 사이로 흘러나온 무언가가 달빛에 옅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옥으로 깎은 노리개 같았다.

자세히 살필 틈도 없이 사내의 몸이 다시 축 늘어졌다.

 

"단아, 서두르자. 숨이 얕아지고 있어."

 

두 사람은 사내를 양쪽에서 부축한 채 비틀거리며 산길을 내려갔다.

등 뒤로 멀어졌던 발소리가 혹여 다시 들려오지는 않을까, 여주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마을 어귀에 다다를 때까지 쫓아오는 기척은 없었다.

 

 

*

 

 

집에 이르자 놀란 하인들이 뛰쳐나왔다.

김유형은 마루에 서서 딸이 피투성이 사내를 데려온 것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단 사랑채로 뉘어라" 하고 낮게 일렀다.

원래 이 집은 오가는 나그네를 매정히 내치는 법이 없었다.

굶주린 이에게 밥 한술 나눠주고, 다친 이를 하룻밤 재워 보내는 것은 낙향한 뒤로 오히려 더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사내를 눕히고 서둘러 의원을 부르러 보냈다.

 

 

한식경쯤 지나 당도한 의원은 상처를 살피더니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옆구리 상처가 깊습니다. 화살에 스친 자국도 그렇고, 예사 시비로 얻은 상처가 아니에요."

"오늘 밤을 넘기는 게 우선입니다."

그 말에 안채가 술렁였다.

자칫하면 이 낯선 이가 집 안에서 숨을 거둘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탕약을 손수 달여 오겠다며 부엌으로 향했다.

김유형은 그런 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무어라 말을 얹으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방으로 들었다.

밤이 깊어지자 열이 오른 사내는 몇 번이고 낮게 신음을 흘렸다.

여주는 젖은 수건으로 이마를 짚어주며 그 곁을 떠나지 못했다.

핏기 걷힌 얼굴, 앙다문 입술,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딘가 익숙한데…….

 

 

 


 

아리도록 — 인물소개

 

김여주 (김가) — 원래는 잘나가던 집안이었지만, 지금은 시골에 내려와 사는 양반 집안의 외동딸. 강단 있지만 속은 여리고, 다치고 기억을 잃은 낯선 사내를 보고 지나치지 못해 마음까지 내주고 만다.

 

최범규 (최가) — 하루아침에 집안이 무너지고 혼자 살아남은 사내. 무표정일 땐 서늘하고 처연하지만, 마음을 열면 낮처럼 밝고 다정한 반전 매력의 소유자. 정체를 숨기려 기억을 잃은 척한다.

 

김유형 (김가) — 여주의 아버지. 한때 범규네 집안과 가까운 벗이이었다.

 

태현 — 범규의 동료. 옛날 범규네 집에서 일하던 사람의 자손.

 

조승학 — 나라의 높은 벼슬아치. 몰래 사병을 길러온,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

 

 


 

 

안녕하세요! 신작으로 빠르게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투바투 범규 조선시대물로 가져왔습니다 ㅎㅎ

범규 한복 사진 중에 장면과 어울리는게 많이 없어 사진은 그냥 범규 사진 여러개 쓸 수 도 있습니다!!

그래도 시대는 계속 조선시대라는거 기억해 주세요 ㅎㅎㅎㅎ

이번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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