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바투 범규] 아리도록

9화. 그날의 진실

한참의 침묵 끝에, 김유형은 결국 자리에 주저앉듯 앉았다.

 

"단아, 잠시 자리를 비켜다오."

 

단이가 조용히 물러가고, 방 안에는 부녀만 남았다.

김유형은 나무 패를 손에 쥔 채, 한참을 그것만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십 년 전, 내겐 벗이 하나 있었다. 최시헌이라고, 도총관을 지내던 사람이었지. 네 정혼자였던 범규의 아버지다."

 

여주의 숨이 턱 막혔다.

 

"범규…… 요?"

 

잊고 있던 그 이름 석 자가, 순식간에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 너희 둘, 아주 어릴 때 정혼한 사이였다. 그리 놀라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엔 남아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 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최시헌은 사병을 몰래 길러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정말 그런 일을 하셨던 거예요?"

"아니다. 사실 사병을 기르고 있던 건 최시헌이 아니라, 우의정 조승학이었다."

"…조승학이요?"

"들키기 전에 먼저 손을 쓰려 했겠지. 그자는 그 죄를 통째로 최시헌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최가의 창고에 몰래 병장기를 심어놓았어. 최시헌이 사병을 길러 역모를 꾸민 것처럼 보이도록."

 

김유형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그리고 그 계획을, 내게 미리 알려왔다. 밀서로."

"왜 아버지한테……"

"내가 최시헌과 가까운 걸 알고 있었으니까. 침묵하라고, 혹은 그자가 사병을 기르는 걸 봤다고 위증하라고 했다."

"…따르지 않으면요?"

"너와 네 어미부터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두려웠다. 그래서 최시헌에게 알리지도, 조정에 진실을 고하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승학이 또 밀서를 보내왔다. 며칠 안에 일이 터질 테니 식솔을 데리고 조용히 낙향하라고."

"그게…… 저희가 시골로 내려온 이유였어요?"

"네게는 어미가 아파서라고 했지. 사실이 아니었다."

 

여주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때 저, 범규한테 인사도 못 하고 왔어요. 아버지가 범규는 옆나라로 유학 갔다고, 절대 만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미안하다. 그때는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말하면, 너도 나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

"그럼 저희가 떠나고 나서……"

"우리가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조승학이 최가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최시헌을 끌고 갔지."

 

여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다 화살에 맞아 죽었고."

 

두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그럼…… 범규는요? 범규는 어떻게 됐어요?"

"…나도 그때는 죽은 줄로만 알았다. 어미와 함께 화살에 맞았으리라고."

 

김유형이 나무 패를 여주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마 전, 이 집에 머물던 손님이 있었지."

 

여주의 눈이 커졌다. 설마, 하는 마음이 스쳤다.

 

"설마…… 그 손님이……"

"그래. 그 아이가, 범규였다. 나도 옥패를 보기 전까진 짐작조차 못 했다."

 

숨이 멎는 듯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여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어떻게…… 제가 그걸 몰라볼 수가……"

"나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가 살아서 내 집 안까지 들어왔으니, 옥패를 보고도 한참을 믿기지 않았어."

"그때 그 아이는 늘 너보다 작았으니까. 이만큼 자랐을 줄, 누군들 알았겠느냐."

 

입 안에서 그 이름을 다시 굴리자,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갔다.

댕기로 상처를 싸매주던 여름날, 마당에 나란히 앉아 웃던 얼굴.

기억을 잃었다던 사람이 유독 매화를 알아보던 것도, 북두칠성을 무심코 짚어내던 것도.

그 모든 순간이 실은, 잊은 게 아니라 몸에 새겨진 채 남아 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왜 저는…… 옥패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원래 짝이 있었을 텐데."

 

김유형의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없앴다. 최가와의 연을 조금이라도 지우고 싶어서."

 

여주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 사람을 쫓아내신 거예요?"

"…그 아이가 여기 있으면, 조승학이 우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럼 지금 그 사람은, 혼자서……"

"아직 밀서를 찾고 있을 거다. 조승학의 죄를 증명할 물증. 내가 십 년째 가지고 있는 그것을."

 

여주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가, 그걸 가지고 계세요?"

 

김유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릴 수도, 쓸 수도 없어서, 그저 십 년을 품고만 있었다."

 

방을 나서는 여주의 다리가 휘청였다. 벽을 짚고서야 겨우 몸을 지탱했다.

머릿속엔 오직 하나의 이름만이 맴돌았다.

 

범규. 잊었던 게 아니라, 잃어버렸던 이름.

 

그 이름과 함께, 지난 열흘 남짓의 모든 순간이 전혀 다른 얼굴로 되돌아왔다.

여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햇갈리실까봐 설명 드리자면

  • 최시헌 - 최범규

  • 김유형 - 김여주

  • 조승학

이렇게 가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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