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69화. 1108호 (1)

sophie97
2026.07.21Vistas 24
"매니저님.
부탁이 있는데요...
저 오늘 여기서 봤다는 말,
훈지씨한테 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아...네...
그렇게 할께요. 걱정하시지 마세요."
"네...감사합니다.
저는 여기 여행왔어요.
촬영 잘 하시고, 조심히 가세요.
이런 데서 뵈니 더 반가운데요."
매니저님과 인사를 하고,
빨리 체크인을 마쳤다.
'와...아무리 세상이 좁다지만..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룸에 짐을 갖다 놓고,
옷을 갈아 입고 나왔다.
오늘 둘러 볼 루트를 확인한 뒤,
호텔 컨시어지에게 근처에 간단히 식사할 곳이나
디저트 맛집이 있는지 물었다.
컨시어지는 호텔 근처에 유명한 크레페 집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추천해 주었다.
'오늘의 디저트는 커피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좀 전에 매니저님을 마주친 이후로,
자꾸 주변을 두리번 거리게 되었다.
"그래...낮에는 촬영하느라 바쁠거고,
밤에는 룸에서 쉬겠지...
걱정하지 말고, 난 내 여행을 즐기자!!"
아직 첫 끼도 못 먹어서 배가 많이 고팠다.
캐나다에서도 프랑스인이 하는 유명한 크레페 집을
종종 가곤 했는데...
파리에서 먹는 크레페는
얼마나 더 맛있을까 하는 기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줄이 길긴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아무리 맛집이어도
줄까지 서서 먹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여행 온 첫 날이니
좀 다르게 행동하고 싶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달콤한 크레페는
정말 완벽한 브런치였다.
'두 번째 도장을 깨러 가보자!!'
만족스러운 크레페 맛에,
호텔 컨시어지가 추천해 준 아이스크림도
기대가 됐다.
다행히도,
아이스크림은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어서,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행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훈지씨가 왜 거기서 나와..?...'
나와 훈지씨,
우리 둘은 얼음처럼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때였다.
배우 같은 분위기의
어리고, 예쁜 여자가 훈지씨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빨리 가요."
그 여자는 훈지 씨의 팔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 당겼고,
그렇게 그 둘은 내 눈에서 멀어져갔다.
나는 순간 돌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여기 서 있는지
모든 뇌 활동이 정지해 버린 듯 했다.
곧 내가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이스크림은 까맣게 잊은 채,
가게 앞에 놓여진 벤치에 앉았다.
그렇게 앉은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누군가 숨을 헐떡이면서 내 앞에 멈춰섰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누군가가 훈지씨라는 걸 알았다.
"프랑스로 온 거였어요?"
"아니요....여기는 여행 온 거에요.
책이 한 권 끝나서..."
"혼자 온 거에요?"
"네..."
"호텔은 어디에요?"
"훈지씨랑 같은 호텔이에요."
"내가 묵는 호텔을 어떻게 알아요?"
"아까 호텔 프론트에서 매니저님을 뵀어요."
"내가 묵는 방은 1108호에요."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따 밤에 꼭 와줘요."
"알았죠?
"꼭이에요.. "
"제발 부탁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 든 생각은...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함께 광고를 찍는 배우겠지?
팔짱을 낄 만큼 가까운 사이인 걸까?'
라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들...
그와의 갑작스런 만남 후,
어디를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모든 기운이 빠저나간 것처럼 피곤했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스크림은 먹어 보지도 못 한 채
호텔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1108호...'
아직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여자 생각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누구면 어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데 이대로 스페인으로 돌아가면
끝내지 못한 과제를 안고 돌아가는 기분일 것 같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드디어 마음을 먹었다.
'그래...가서 그 여자가 누군지는 물어봐야겠어.'
"여긴 파리잖아요.
옛 연인과 키스도, 원나잇도 할 수 있는 곳이라구요."
<70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