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69화. 1108호 (1)



"매니저님.

부탁이 있는데요...

저 오늘 여기서 봤다는 말,

훈지씨한테 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아...네...

그렇게 할께요. 걱정하시지 마세요."





"네...감사합니다.

저는 여기 여행왔어요.

촬영 잘 하시고, 조심히 가세요.

이런 데서 뵈니 더 반가운데요."




매니저님과 인사를 하고,

빨리 체크인을 마쳤다.





'와...아무리 세상이 좁다지만..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룸에 짐을 갖다 놓고,

옷을 갈아 입고 나왔다.





오늘 둘러 볼 루트를 확인한 뒤,

호텔 컨시어지에게 근처에 간단히 식사할 곳이나

디저트 맛집이 있는지 물었다.




컨시어지는 호텔 근처에 유명한 크레페 집과

아이스크림 가게를 추천해 주었다.





'오늘의 디저트는 커피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좀 전에 매니저님을 마주친 이후로,

자꾸 주변을 두리번 거리게 되었다.




"그래...낮에는 촬영하느라 바쁠거고,

밤에는 룸에서 쉬겠지...

걱정하지 말고, 난 내 여행을 즐기자!!"




아직 첫 끼도 못 먹어서 배가 많이 고팠다.



캐나다에서도 프랑스인이 하는 유명한 크레페 집을

종종 가곤 했는데...

파리에서 먹는 크레페는

얼마나 더 맛있을까 하는 기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맛집으로 소문난 곳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줄이 길긴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아무리 맛집이어도

줄까지 서서 먹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은 여행 온 첫 날이니

좀 다르게 행동하고 싶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달콤한 크레페는

정말 완벽한 브런치였다.




'두 번째 도장을 깨러 가보자!!'




만족스러운 크레페 맛에,

호텔 컨시어지가 추천해 준 아이스크림도

기대가 됐다.




다행히도,

아이스크림은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어서,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행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훈지씨가 왜 거기서 나와..?...'




나와 훈지씨,

우리 둘은 얼음처럼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때였다.

배우 같은 분위기의

어리고, 예쁜 여자가 훈지씨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빨리 가요."




그 여자는 훈지 씨의 팔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 당겼고,

그렇게 그 둘은 내 눈에서 멀어져갔다.





나는 순간 돌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여기 서 있는지

모든 뇌 활동이 정지해 버린 듯 했다.




곧 내가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이스크림은 까맣게 잊은 채,

가게 앞에 놓여진 벤치에 앉았다.





그렇게 앉은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누군가 숨을 헐떡이면서 내 앞에 멈춰섰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 누군가가 훈지씨라는 걸 알았다.




"프랑스로 온 거였어요?"




"아니요....여기는 여행 온 거에요.

책이 한 권 끝나서..."



"혼자 온 거에요?"



"네..."



"호텔은 어디에요?"



"훈지씨랑 같은 호텔이에요."



"내가 묵는 호텔을 어떻게 알아요?"



"아까 호텔 프론트에서 매니저님을 뵀어요."



"내가 묵는 방은 1108호에요."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따 밤에 꼭 와줘요."


"알았죠?


"꼭이에요.. "


"제발 부탁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 든 생각은...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함께 광고를 찍는 배우겠지?

팔짱을 낄 만큼 가까운 사이인 걸까?'


라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들...





그와의 갑작스런 만남 후,

어디를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모든 기운이 빠저나간 것처럼 피곤했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스크림은 먹어 보지도 못 한 채

호텔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1108호...'



아직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여자 생각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누구면 어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데 이대로 스페인으로 돌아가면

끝내지 못한 과제를 안고 돌아가는 기분일 것 같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드디어 마음을 먹었다.



'그래...가서 그 여자가 누군지는 물어봐야겠어.'





"여긴 파리잖아요.

옛 연인과 키스도, 원나잇도 할 수 있는 곳이라구요."

<70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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