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78화. 훈지의 전화

sophie97
2026.07.24Vistas 24
파리에 살고 있는
줄리앙과 자주는 볼 수 없었기에,
주로 통화와 메시지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파리에서의 첫 만남 이후,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안 사실이었지만,
그는 나보다 1살이 많았고
외동이었다.
보자르 드 파리라는 미술 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고 했다.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신 뒤에는,
자신도 언젠가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가끔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휴가를 내면
주말까지 이어 스페인으로 와서 나를 만났다.
그날도 휴가를 내고, 스페인으로 와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금요일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난 후,
산책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훈지씨 번호였다.
'아...김대표가 알려 줬구나...'
이 번호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기도 했다.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화 안 받고, 왜 보고만 있어요?"
"한국에서 온 번호에요."
"혹시... 전 남자친구에요?"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 했다.
그 짧은 침묵만으로도
그는 답을 알아버린 것 같았다.
"내가 자리 피해 줄 테니까
편하게 받아요."
그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더니 자리를 피해 주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에요."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네."
"휴대폰 만든 거 왜 말 안 했어요?
나한테 전화도 한 번 안 하고..."
"김대표한테 말 못 들었어요?
내가 전해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무슨 말이요?
당신한테 남자 친구 생겼다는 얘기요?
나는...당신이 한 말 안 믿어요."
"훈지씨... 진짜에요.
나 그 사람 진지하게 만나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미안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전화 하지 말아요.
안 받을 거에요."
"정말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만나고 있다고요?
그게 사실이라고요?"
"...사실이에요."
"당신이 진짜 나한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하고 있다고요?"
"제발 나 좀 흔들지 말고 내버려 둬요.
당신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단 말이에요.
이제 나도 편안해 지고 싶어요.
연락하지 말아요...제발."
"당신이 날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잖아요.
난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그 안간힘... 이제 쓰지 말아요.
어려운 일을 하려니까.
말이 안 되는 일을 하려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나도 내 마음이 어떻게 안 되는데
어쩌라는 거에요..."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전화를 끊고, 전원을 껐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내어 울었다.
멀리 서 있던 줄리앙이 달려와서
주저 앉은 나를 안았다.
"가끔씩 나를 뒤흔들어 놓는 이 사람 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정말...
끈을 놓고 싶은데
그렇게 안 돼서 돌아버릴 것 같아요.
당신이 나 좀 어떻게 해 줘요.
나 좀 그만 흔들리게 해 줘요. 제발..."
흐느껴 우는 나를 안고,
줄리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등을 토닥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내 울음이 잦아 들때까지,
그는 그대로 나를 안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후에,
우리는 좀 더 걸어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갔다.
벤치에 앉자,
그가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부모님이 다음 주에 파리에 오신대요."
"정말요? 줄리앙 보시러 오시는 거에요?"
"음...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당신을 보러 오시는 거죠."
"나를요?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응.
처음 우리 만나기 시작할 때 부터
말씀드려서 아시고 계셨어요."
"그랬구나..."
처음부터 나를 숨기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훈지씨와는 달리
나를 드러내 놓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 주 주말에 우리 부모님 만나도 괜찮겠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모님을 만나 뵙는다는 건,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가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요. 만나 뵐께요."
"그래 줄 수 있어요?"
"응. 그럼요.
한국에서 나를 보러 파리까지 오신다니
감동이에요."
"고마워요."
그는 내 눈을 맞추고,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줄리앙과 함께 있으면
훈지씨와 함께 있을 때처럼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
대신 마음이 따뜻했고, 편안했다.
그 평온함이,
지금의 나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요." <79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