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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深淵) : 심연
=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구렁.
= 무저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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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 심연
_ 2022년 1월 16일 / 일요일
그날은 평소와 같은 날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느때와 같이 아침을 맞이하고, 밥을 먹고, 기울어가는 해를 보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어느 하나 특별한 일 없는 그저그런 24시간, 하루. 그 뿐이었다.

어둠이 살짝 걷혀 어스름한 빛이 밝아오던 하늘을 웬 검은 연기가 가득 채운 것은 새벽경의 일이었다. 바닥이 흔들렸고, 쿵- 쿵- 하는 폭발음과 함께 창문 밖이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매연과 먼지로 가득찼다.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인 나는 이불과 베개로 몸을 감싸 덜덜 떨고만 있었다.
"뭐야... 지진인가?"
이 요란한 소란의 정체가 뭔지도 몰랐다. 내 몸의 무사함과 가족들, 친구들의 생존 여부가 우선이었다. 급히 주변을 더듬어가며 핸드폰을 찾아낸 뒤 지인들에게 모두 연락을 돌리고 나서야 겨우 폭발음이 멎었고, 온몸에 힘이 빠진 나는 아직도 창문 밖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뒤로 한 채 거의 쓰러지듯 다시 잠에 들고 말았다.
내 핸드폰 속에서 곧이어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상상도 못 한 채로 말이다.
지잉- 지잉-
얼마나 지났을까, 갑작스레 쏟아지는 핸드폰 알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음에도 창 밖은 여전히 어두웠기에 낮인지 밤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와중에도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확인하기 위해 전원 버튼을 꾹- 누르자,

"뭐, 뭐야...!!"
친구들과 부모님의 연락이 가득 쌓여져 있었다. 심지어는 얼마간 연락이 끊겼던 지인도, 얼굴 스친김에 번호만 교환했던 아는 사람도 모두 쉴새없이 카톡이고 메세지고 보내대는 탓에 화면 컨트롤이 어려울 정도였다. 겨우 엄마의 카톡창을 클릭하여 들어간 뒤 그 내용을 확인했을 땐, 나는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전쟁...?!!"
한가득 쌓인 엄마의 카톡에서 눈에 띈 한 단어, "전쟁".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다급히 엄마에게 전화를 건 나는 초조한 침을 삼켜야 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오가고, 시곗바늘이 계속해서 한 바퀴, 두 바퀴를 돌아갔지만 엄마의 목소리는 들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발... 엄마 제발...!!"
난생 처음 느껴보는 절박함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야속한 신호음은 이내 끊긴 뒤 애꿎은 상담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마지막까지 엄마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났으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빨리 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온갖 부정적인 상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겨우 정신줄을 다잡고 이성적인 판단을 해보려 해썼다.
정말 전쟁이라면 필시 재난문자나 뉴스가 한가득 떠있을 터, 떨리는 손으로 타자를 친 뒤 들어간 인터넷 뉴스창은 그야말로 난리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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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인 | 2022년 1월 16일 23시 16분 경 북한 남침... 제 2의 6.25 전쟁 발발되나]
[북한, "평화적 통일 결렬, 허울뿐인 한민족은 헛된 망상]
[유엔 안보리 "북한의 기습남침 인정, 유엔군 파병 예정]
["핵전쟁으로 과열되어선 안 돼" 다급한 전문가들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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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느지막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닌 한밤 중 전쟁이라니, 믿기지도 않으면서 믿고 싶지 않은 위험이 코 앞에 성큼 다가와있다 생각하니 머릿속은 깜깜하고 나아갈 길은 없어진 듯 막막하기만 했다. 지진인줄만 알았던 땅의 진동은 미사일, 후폭풍의 잔해인줄만 알았던 창 밖의 검은 연기는 폭탄 투척의 흔적이었단 사실이 마치 영화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좀 더 자세히 밖을 살펴보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마구잡이로 무너진 건물들과 자동차,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전투기들이 하늘을 헤집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상당히 무지한 나의 정신머리였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전쟁용 비상가방을 쌌다. 손전등, 성냥, 비상식량, 담요, 신문 등 별의별 것을 찾는다고 난리를 쳤지만 그에 비해 아직은 멀쩡한 집 안 상태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불안한 하루가 저물어갔다.
그렇게, 전쟁 1일차가 지나갔다.
_2022년 1월 17일 / 월요일

조금 더 매캐한 맛이 올라오는 둘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창문을 열어두고 잔 것도 아닌데 목이 건조하고 텁텁하여 몸을 일으키자마자 물을 들이켰다. 갈증이 한소끔 해결되자 도로 핸드폰을 들어 뉴스와 카톡창을 전부 정독했다.
"...오늘도 별반 다를 건 없구나."
여전히 혼란스러운 댓글창과 온갖 유언비어가 쏟아져 나오는 커뮤니티, 게시판. 뉴스라도 보자 싶어 유튜브를 실행시켰더니 동영상이 자주 끊겨 재생이 잘 되지 않았다. 5G 시대의 사람에겐 끊기다 말다 하는 와이파이가 심히 거슬렸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정부의 공식 브리핑 영상을 틀었다.

"현재로서의 대한민국은, 지난 6.25 전쟁과 IMF 이후에 또 한 번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혼란과 불안을 겪으시는 국민 여러분을 위하여 국방부는 최정예 군대를 배정하여 사태를 잠재우고자..."
정부 브리핑이라고 해봤자 별반 다를 건 없었다. 그저 공식 석상에 선 윗사람들의 안일하고 무성의한 연설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뻔한 말들. 현재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정보는 그 어떠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무료한 20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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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아무 생각도 없이 혼잣말을 내뱉은 나는 그대로 매트리스에 푹- 엎어졌다. 사실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연락이 끊긴 가족들의 생사는 어떻게 확인할 것이며, 당장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이 너무 컸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안전이 보장된 최소한의 활동이었다.
조금의 허기를 달래려 냉장고에 박혀있던 과일을 꺼내 먹고, 시원하진 않았지만 방치된 생수까지 들이키고 나서야 비로소 머리가 조금 굴러가기 시작했다.
'...난 이제 뭘 해야하지?'
군인도, 고위계층도, 정부 소속도 아닌 그저 이 황망한 땅에 내버려진 일반인 1에 불과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어찌보면 답은 없는 듯 보였으나, 금세 실마리는 잡혔다.
위기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것. 독립적인 행동이 제일 위험한 바로 지금, 사지 멀쩡하고 정신 멀쩡하고 그나마 멀쩡한 주거지까지 있겠다,
생존자를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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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2022년 1월 25일 / 화요일

생존자를 찾아 헤맨지 벌써 1주째가 되었다. 멀쩡한 집이든 다 무너져 내린 집이든 무작정 문을 두들기고 담을 넘었지만, 생존자는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다들 벌써 피난을 간 걸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와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일, 사명감 그따위는 집어치운 채 그저 필사적으로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외로움이 가져다 준 고통은 생각보다 더 악랄했고, 괴로웠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면 사무치게 밀려든 고독함과 불안함이 정신을 갉아먹었다. 와중에도 한시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폭격음과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것이 느껴져 내 몸은 점점 더 무너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으윽...!!!"
며칠 전과 비교해도 훨씬 탁해진 공기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와 기도를 간지럽혔다. 덴탈도 아닌 의료용 마스크인데, 아무 쓸모없는 천 쪼가리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하나 둘씩 물건들이 못 쓰게 되어버리고 식량도 떨어지자 나는 큰 무기력함에 휩싸였다.
전기도 물도 다 나갔는지 집안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 했다. 싱크대와 세면대 모두 흙먼지가 가득한 구정물이 흘러나왔으며 그나마 멀쩡히 되나 싶던 휴대폰과 텔레비전도 이내 맛이 가버려 나는 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으..."
군대는 어디까지 온걸까, 우리나란 지금 어떤 상황인가, 엄마아빠 친구들은 안전한데에서 잘 있는 건가, 날이 갈수록 머리는 복잡해지고 행동력은 줄어들었다.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우리 동네엔 사람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이렇게 전쟁통에서 굶어 죽는것도 총살도 아닌 고독사로 가는건가. 싶어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흙먼지와 섞여 따가운 액체가 코와 볼을 타고 이불을 흠뻑 적셨지만 닦을 힘도 없었다.
하루하루 폐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느끼며, 나는 그렇게 썩어갔다.
부스럭-
"...응...?"

저벅- 저벅-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경,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무엇인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혹 군대면 군대, 차라리 죽여보라지. 기운이 다 떨어진 나는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어 후레쉬를 비추었다.
"야, 저거 보여?"
"...불빛 아니야?"
"설마...!!"
...잠시만, 이건... 사람의 목소리?
그렇다면...
"여기 사람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