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로잡히다 (22) 적은 가까이
우선 나는 연구실 서버에 접속해서 회계장부를 확인했다. 우리 연구실에서 구입하는 약품 목록 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보질 않던 다른 연구실의 구입 목록.... 이건 연구소 안에서도 행정관련 권한이 있는 연구원들만 볼 수 있는 일종의 극비사항이었다. 연구실 막내라인이다보니 맡고 있던 업무였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해당 약품은 김남준 소장이 직접 관리하는 직속 연구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음...? 개인 후원으로 들어온 거대한 예산도 보였다. 이 비용이 그 연구실에서 다 사용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돈이지..? 연구실에서 만든 약품은 어디로 가는 걸까...? 순간 무서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부디 이 예감이 틀리기를...
딸깍...!
갑자기 닫혀있던 연구실 문이 열렸다. 아 깜짝이야...!
"흑해주 박사님, 아직 집에 안 가셨어요?"
정호석이었다.
"아, 야 무슨 박사님이야, 나 아직 논문 완성 못 해서 아직 박사 학위 마치기 전이야.. 그 호칭 부담스럽다 ㅋㅋㅋ.
그나저나 갑자기 들어와서 놀랬잖아...
최고막내는 할 일 끝나면 칼퇴하고 집에 가는 게 어드빈티지인데 왜 돌아왔어? 너무 늦었네.."
서둘러 회계장부를 닫았다. 나의 요주 인물 정호석... 김남준 소장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왠지 더욱더 긴장되었다.
"아, 저 다이어리를 두고 갔어요... ㅎㅎㅎ
중요한 메모가 있는데 내일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호석은 해맑은 미소를 띄고 실수 했다는 듯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자기 자리로 갔다.
"음.. 호석씨, 저녁 전이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래...?
나도 저녁 전이거든.."
적은 자고로 가까이 두랬다. 아직 햇병아리 신입 연구원이라 내 제안을 거절하긴 어려울 거다. 호석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호석이 자기 자리로 가서 수첩을 챙기는 사이 나도 컴퓨터를 정리하고 나섰다.
"네, 좋아요. 선배님."
. . .
밥은 연구실 근처 이자카야에서 먹기로 했다. 술 한 잔 걸치기도 좋고, 맛있는 요리도 좀 먹고 싶고 해서.. 참치 타다키에 따듯한 정종 한잔이면 하루 피로가 싹 사라지는 것 같아, 가끔 홀로 들리는 나의 단골집이었다.
애시당초 나도 정호석도 연구원들과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호석이와는 단둘이 밥먹는 건 처음있는 일이었다. 가만보니 술을 시켜놓고 보니 호석은 술을 잘 못한다고 했다. 하핫, 연구실 선배라고 거절 못 하고 여기까지 왔구나...
바(Bar) 자리에 앉아서 식사용으로 따듯한 어묵 우동이랑 내가 좋아하는 참치 타다키 한접시, 그리고 꼬치구이 몇 개를 주문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무색하게 정호석은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먹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눴다.
정호석은 결혼한 누나가 있고, 집은 지방이어서 연구실 근처에서 자취중이었다. 이녀석도 김남준 원장 논문과 강연을 보러다니다가 원장님께 반했던 모양이다. 왠지 나랑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니 나는 약간 호감이 느껴졌다.
김남준과는 연구 프로젝트로 한번 같이 했었는데, 석사 졸업하고 일하러 오라며 먼저 김남준 소장이 스카웃 제의를 했던 모양이었다. (아 그건 좀 부럽네.. )
일상도 단조로워 보였다. 그때 주말에 날 따라오던 것이 정호석이 맞을까..? 나는 미행하던 사람이 정호석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는데, 지금으로서는 얘가 맞는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그래도 신고자는 정호석이 맞으니까..
오소리 모임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데.. 어떻게 알아봐야할까...? 아직까진 정호석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할 것 같았다.
"자, 우리 막잔 마시고 일어날까?"
"네, 그러죠. 저는 이미 치사량이에요..ㅎㅎ"
우리가 마지막 잔을 짠 하고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계산하고 나갈려던 찰라 누군가 가게에 들어왔다.
"어..? 흑해주! 너 여기서 뭐하냐..?
얘는 누구야?"
날 반가워 하는 이 목소리는.. 며칠 전에 만났던 그 목소리다. 아니, 너 여기서 니가 날 왜 아는 척하는 건데......전정국이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어께에 손을 올렸다.
"아 뭐야 무겁게.. 팔 내려 이자식아.. ㅋㅋㅋ"
"아이 참, 알았다 그래."
나가려던 정호석이 뻘줌하게 우리를 보고 서있었다.
"아, 이 쪽은 우리 연구실 후배..."
"안녕하세요? 정호석이라고 합니다."
정호석이 전정국에게 인사 했다. 전정국의 표정을 보니, 정호석이라는 이름을 듣자 바로 누군지 기억하는 것 같았다..
"저는 전정국입니다. 보다시피 해주 친구죠"
"두 분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에요..?"
정호석의 질문이 예리했다. 뭐야 얘, 전정국 얼굴을 보니 약간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고 있네..? 그러게 왜 아는 척을 하는 거냐고.. 나도 참 난감하다.
"아, 정국이는 나랑 오래된 친구야..
둘이 비슷한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어서..
그땐 그냥 아는 사이였는데 최근에 엄청 친해졌어..
지금처럼 찐친이 될 진 몰랐지만.."
대충 일단 둘러댔다.
"아, 네 그렇군요...."
"저, 호석아 먼저 그럼 들어갈래?
난 아무래도 얘랑 얘기 좀 해야겠다."
아무래도 전정국이 바로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아서 호석이를 들어보냈다.
"오 해주, 나랑 2차 콜?"
철없는 전정국은 내가 호석이를 들여보내자 눈빛을 반짝였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국은 해맑은 얼굴로 이것저것 주문했다. 아 나 빨리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래서 내가 준 거 확인해봤어?"
정국이가 궁금한 듯 물어보았다. 이녀석을 어쩌지...?
"어차피 그건 내가 따로 전달해줄 예정이었는데,
너 좀 급하다..?"
"아니 뭐, 궁금해서... 스파이는 친구도 만나면 안되?"
"너, 경찰이잖아. 그래서 그렇지..
나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다고.."
"뭐, 여기 정도면 아주 눈에 띄는 것 같진 않은데.. 정호석도 집에 갔고..."
전정국.. 정말 뻔뻔하다.... 에효... 김석진 서장님이 너랑 만나라고 하니까.. 내가 참아야지...나는 얕은 한숨을 쉬고 정국의 말에 대답을 해줬다.
"그거 찾아봤어.
약품을 구입한 연구실은 김남준 원장의 개인 연구실이야.
원장이랑 얼마나 관련되어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팩트만 따지면 그러해."
나는 전정국이 시켜준 하이볼을 꿀걱 한 모금 마셨다.
"그렇구나..
너 김남준 소장이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
"어, 뭐 개인적으로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박사재학 시절에 매우 존경하는 학자이긴 했어.
지금도 그렇고.. 그런데...?"
"그렇구나... 왠지 얽힐 것 같단 예감이 들어서.."
"아, 그래..."
"뭐 다른 내용은 또 없어?"
"사냥 날짜가 잡혔어. 두 달 뒤고, 장소는 하루 전에 공지해 줄 예정이래. 자세한 건 파일로 보내줄께"
"너 또 불려나가는 거야?"
"그런 것 같아.. 나 이제 조금 더 조직 깊숙히 들어가는 것 같아, 아무래도 내가 진수가 하던 일들을 하나 둘 맡게 되고 있어."
정국이 말에 나는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진수가 사라지고 나니 진수가 맡았던 일들이 나에게 슬슬 넘어오는 것 같았다. 다음 사냥제 때 약물 담당자를 내가 맡게 된 것이었다.
"조직에서 새로운 사람이 연락을 주기 시작했어.
진수도 나랑 비슷한 분야의 연구원이었는데,
아마 그 자리에 내가 적격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도대체 날 뭘 보고 믿는 지 모르겠네..?"
정국은 내 말에 싱긋 웃었다.
"너 그렇게 믿음 없게 생기진 않았어..
그나저나 난 너 자꾸 불려다니는 거 무슨 일 생길까봐 좀 걱정인데..."
정국이 내려와 있던 내 머리카락들을 다정하게 귀 뒷쪽으로 넘겨주었다.
"얘가 뭐래.. 넌 나랑 얘네들 깨부시는 거 도와줘야지..
공사는 구분하자고, 그치? 전정국 형사"
정국이 손길이 나쁘진 않았지만, 공사는 구분해야지.. 내가 했던 말을 되뇌이며 자꾸 내 머리칼을 만지는 정국이 손을 떼어 놓았다.
. . .
며칠 뒤 그를 만난 것은 연구소 앞에 있는 한 카페였다.
"흑해주씨라고 하셨죠.?
반갑습니다. 문자로 연락드렸던 박지민이에요."
오소리 모임 간부라고 하는 이 사람은 나에게 약물 운반을 맡아달라고 했다. 문자로 직접 연락을 주고 받은 것도 얼마 안되었는데 벌써 직접 만나다니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번에 실무자들이 체포 되어서 자리가 비어서 그런가...?. 그나저나 벌써 실무를 나에게 맡겨도 되나? 내가 관련 전공자라서? 아니 근데 이건 너무 빠른데..?
어느새 나는 점차 오소리 모임 속으로 좀더 깊숙히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