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전 (7) 기적
상담을 마치고 책상에 한참 앉아있던 나는 한자한자 꼬옥 눌러서 편지를 썼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떻게 악몽과 싸워왔는지, 그리고 얻은 결론은 무엇인지, 보고 싶었던 마음에 대해서도..
쓰다보니 편지가 꽤나 두툼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부치고 오는 날 마음이 너무나 가벼워졌다.
답장이 오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편지를 받으면 바로 전화가 올 수도 있고, 전화가 아니여도 어떤 식으로든 금방 답변이 올 줄 알았다.
하루 이틀 1주일, 2주일....
하지만 바램과 달리 답장이 오지 않자 나는 약간 초조해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기다림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본국에 있는 정국이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뭐라고 적어야할까... 이런 저런 말이 생각났지만, 결국 간단하게 보냈다.
[ 잘 지내..? 편지 잘 받았나 궁금해서.. ]
답장이 오질 않았다. 없어지지 않는 1이라는 숫자가 야속했다.
이틀 뒤 전화를 걸었다.
[ 본 번호는 고객님의 사정으로...]
헉...
전화번호가 막혀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해서 주저앉았다. 정국이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나...? 문득 민팀장이나 김석진 서장이 생각나긴 했지만, 손이 떨려서 연락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반송 도장이 찍힌 편지가 돌아왔다. 정국이가 날 잊었거나 피하는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정국이가 날 잊은 걸까...? 하루 종일 마음이 저 먼 심연으로 단단히 굳어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동안 함께 나눴던 3년 남짓한 시간이 이렇게 끝나 버리는 걸까...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후로 강의가 머리에 잘 들어오질 않았다. 어떤 날은 아예 늦잠을 자기도 했다.
"해주~ 특강 들으러 가자, 외부에서도 들으러 온다고 해서 빨리 가야 좋은 자리 맡을 수 있어."
스테피가 오늘도 축 처져 있는 나를 독촉하느라 옆에서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요 며칠 내가 처져 있자 스테피는 나의 변화를 눈치채고는 열심히 끌고 다니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달력을 보니 특강이라고 해둔 표시가 있었다. 수사의 실재라는 과목이었는데, 유명한 사건들을 맡았던 형사들의 현장 경험을 듣는 과목이었다. 이번에는 해외에서 온 수사관이 진행한다고 했었던가..?
"알았어. 금방 준비할게"
힘없이 대답하고 일어섰다. 그래도 큰맘 먹고 온 건데 펑크는 내지 말아야지..
이번 수업은 외부 사람들도 들으러 오는 강의여서, 평상시에 강의를 듣던 곳이 아닌 넓은 강당 같은 곳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안 그래도 조금 늦게 나왔었는데, 가는 길도 헤매면서 예상보다 많이 늦었다. 강의실을 겨우 찾아서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콜로세움처럼 수강생들이 강단을 둘러싼 모습에 위압감이 느껴졌다. 강의 시작 몇 분 전에 겨우 도착한 우리는 이미 자리가 가득 차 있어서 할 수 없이 맨 위에 구석진 자리로 갔다.
"그래서 아직도 연락이 안된 거야..?"
스테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스테피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안일했나봐... 너무 나만 생각했어.
연락이 안될 수도 있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애는 항상 자기 자리에 있었으니까"
"해주... 힘내, 우리 주말에 드라이브갈까? 다케시가 바다에 갔다 오자고 하던데... 이럴 때 기분 전환이라도 해보면 어때?"
내가 이 지경인데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정국이와 연락이 되질 않는 다는 사실에 내가 의기소침해진 이후, 스테피는 금요일 저녁에 파티에 가자고 하거나, 외출하자고 하며 나를 달래주려 애썼다. 이렇게 축 처져 있다가는 여기에서 겨우 사귄 친구도 잃지 않을까...?
나는 정국이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스테피가 어딘가에 가자고 하면 계속 거절해왔다. 정국이 마음이 정말 바뀐 걸까...? 손에 아직도 끼워진 반지를 보자 마음이 욱신거렸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나는 결국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갑자기 소란했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사회자가 강의를 진행할 사람을 소개하고 있었다.
"해주, 혹시 너 아는 사람이야? 너네 나라에서 왔대"
고개를 들어 강단에 선 사람을 보니, 검은 머리의 얼굴이 하얗고 동글동글한...
"안녕하세요? 이렇게 큰 강의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력계 수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수사 공조로 왔는데 온 지 두 달 정도 되었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강단에 서있는 사람은 정국이었다.
...!!!
나는 숨을 멈춘 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래, 날 보러 온댔잖아...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마음이 두근거리며 소란해졌다.
정국은 누군가를 찾는 듯 강의실을 몇 번 둘러보더니 프레젠테이션을 켜고는 강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구석에 있는 나를 봤을까...? 강의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냥 그가 움직이는 하나하나가 뮤트된 동영상처럼 눈에 들어와 박혔다.
. . .
"해주야...? 강의 어땠어?
너 눈도 떼지 않고 열심히 듣더라...? 완전 푹 빠졌나 봐?"
"아, 강의 끝났어?"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스테피의 말에 강의가 끝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응, 우리 점심 먹으러 카페테리아 갈까?
가서 강의 어땠는지 얘기도 나누고,
토요일에 어떻게 움직일지 계획도 짜보자"
아직도 정국이를 봤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저쪽에 사회자와 인사하고 있는 정국이가 일어나는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현실이야. 저기 있다고...! 빨리 움직이자.
"스테피, 점심은 나중에 먹자~ 조금 있다가 연락할게!"
"어...? 알았어"
나는 당황해하는 스테피를 두고는 사람들 사이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맨 위쪽 꼭대기 자리에서 달려 내려가는 사이 정국이가 입구로 쏙 나가버렸다. 젠장, 놓치면 안되..!
오늘 따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나름 빠르게 움직였지만,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따사로운 햇살에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었다. 눈이 빛에 적응할 때 쯤 저쪽에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정국이가 보였다.
"전정국...!!!"
큰소리로 외쳤다. 외국어가 난발하는 이 곳에서 또렷한 본국의 말을 들은 정국이 멈추어 섰다. 아직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내가 안 보이는지 정국이가 두리번거렸다.
"정국아..!!"
최선을 다해 뛰었다. 정국이가 이번에는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보더니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해주야~~"
그렇게 달려가 정국이 품에 안겼다.
. . .
"너무 보고 싶었어... 정국아..."
정국이는 뛰어든 나를 그대로 꼬옥 안아줬다. 여전히 정국이 품은 따듯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너... ㅜㅠ
아무리 연락하려고 해도 연락도 안되고...
번호는 왜 막혀있어.."
정국이 품에 안겨서 나는 눈물 흘리며 원망의 말들을 내뱉었다. 울던 나를 토닥여주던 정국은 주차장 곁에 있던 벤치에 와서 나를 앉혔다.
"해주야, 내가 너 보러 온다고 했잖아. 우리 해주 나 못 믿나.."
장난스럽게 말을 하던 정국은 내가 계속 울자 어께를 감싸안았다.
"저... 해주야,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거든...?
편지 보내니까 반송되어 돌아오고... 연락은 안되고...
으어엉엉엉.."
한참을 울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옆에 앉아있던 정국이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
갑자기 오게 된 데다가 생각보다 오래 있게 되어서 엄마가 번호 장기 정지시켜주셨는데, 연락을 받을 수 없게 정지시키신 것 같아. 집은 이 곳에서 경찰 사택 제공해주면서 짐을 빼게 되었어...
나는 네가 연락이 없길래, 시간이 더 필요한 줄 알고..."
"야, 이 나쁜 놈아... 그래도 왔으면 왔다고 알려주지... ㅜㅠ
나는 널 영영 못 보게 되는 줄 알았잖아..."
울다 말고 나는 원망의 손길로 정국이 어깨를 쳤다쳤다. 그리고 또다시 치려고 하자 정국이는 내 손을 잡았다.
"반지, 끼고 있었네...?"
정국이는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손을 펴서 보여줬다.
"나도 끼고 있어."
정국이는 반지가 끼워진 우리 둘의 손을 나란히 하더니 꼬옥 손을 잡았다.
"나도 엄청 보고 싶었어. 오자마자 연락하고 싶었는데, 수사 때문에 연락을 못 했어. 마침 특강 제의가 들어왔는데 네가 밟고 있는 연수와 관련이 있어서 겨우 시간 내서 수락한 거야...
오늘 강의에서 못 만나게 되면 여기서 널 찾아보려고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이거 안 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나 못 믿어? 나 강력계 형사잖아.
여기서 너 하나 못 찾으려고.."
나는 이렇게 가슴이 요동을 치는데, 전정국은 너무 여유로워 보였다. 치잇... 이러면 나만 매달리는 것 같잖아... 자존심 상해..
"쳇, 너 미워.
지난주에 편지 반송받고 내가 이기적으로 굴다가 전정국을 잃은 줄 알고 진짜 얼마나 마음이.."
"흠, 알고 있었어? 너 이기적인 거..?"
"야,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ㅇ....."
쪽-
원망의 소리를 늘어놓으려던 나의 입술을 정국이가 덮쳐왔다.
"그래서 왔잖아, 나 약속 지켰다. 그치...?
너 나 잃은 거 아니야... 전정국 여기 네 눈 앞에 있잖아."
정국이는 내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을 엄지로 쓰윽 닦아주었다.
그래 이 체온... 정국이가 눈앞에 있다.
나는 두 팔을 뻗어 정국이를 꼬옥 안았다.
주차장 한 쪽에 있던 벤치에서 우리는 좀 더 깊은 입맞춤을 나눴다. 정국이의 체온이 느껴지자, 그동안 어둡게 굳어있던 마음이 다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이게 뭐라고... 며칠 동안 마음고생한 것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게 느껴지자 한편으로 심술도 느껴졌다.
그래도 이 낯선 땅에서 이 아이를 만나다니, 벤치 위로 드리워진 나무 그늘도, 햇빛에 하얗게 빛나는 건물들도, 맞닿은 우리 둘 사이로 흐르는 부드러운 바람도 모든 것이 기적 같았다.
그리고 그 기적이 너무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