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소년
08.
반으로 돌아온 나는 책상에 엎드려 볼펜을 딸깍거렸다. 거절 당하는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거절은 처음이라 좀 후달렸다. 멋있게 말했어야 했는데. 정말 너를 도와줄 수 있다고. 그렇게 힘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주변이 없는 게 처음으로 좌절스러웠다. 첫만남부터 잘못된 건가. 그래. 솔직히 내가 윤아름이었어도 이게 무슨 미친놈인가 했을거야. 다짜고짜 달려들면 어떡하냐. 생각할 수록 쪽팔렸다. 결국 죄없는 머리만 헤집었다. 야, 너 왜그래. 짝꿍이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어왔다. 걍. 인생 좆된 것 같아. 내 대답에 짝꿍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범규야. 그게 하루 이틀이니.
봄은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유독 커플이 많은 이유도 이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추운 겨울바람을 맞다가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면 마음이 말랑해질 수 밖에 없다. 꽝꽝 얼어있던 몸이 한순간 녹아내리듯이. 눈에 가득 들어차는 꽃들도 한 몫 한다. 세상이 아름다워지는데 들뜨지 않을 수가 있나. 창문 밖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계절.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간지러운 계절. 가만히 있어도 몸이 노곤해지는 계절. 그래서인지 잠도 솔솔 왔다. 인생 좆됐다며 넋놓고 있던 난 어느새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벌써 하교할 시간이었다. 미친. 나 얼마나 잔거야. 입가에 흐른 침을 급히 닦으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 일어났냐?"
"야, 왜 안 깨웠어?"
"너가 안 깼을거란 생각은 안 들어?"
"뺨 한번 때리지."
"과연 안했을까?"
투덜대지 말고 짐이나 싸. 더 말하면 진짜 맞을 것 같아 말없이 책상을 정리했다. 어쩐지 뺨이 좀 욱씬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진짜 때리진 않았겠지.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아, 최범규."
"엉."
"너 우산 있어?"
"우산? 왜?"
"밖에 비와."
"비?"
"응. 소나기라더라."
일기예보에선 내내 맑을 거라고 하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오네. 우산 있어? 없으면 같이 쓸래? 말을 듣고 다급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니 정말 비가 오고 있었다. 그것도 봄비. 낭만적인 봄비. 세차게 내리는 비는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야 최범규. 우산 있냐고. 뒤에서 물어오는 친구의 말이 먹먹하게 들렸다.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우산 없어."
"그럼 같이 나가면 되겠..."
"윤아름 우산 없다고."
미친놈이 뭐래. 이와중에 걔 걱정? 친구는 질린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알아서 갔겠지. 걔가 한 두살 짜리 어린 애도 아니고.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윤아름에겐 비를 맞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비가 오는 게 문제였다. 하필 이런 날에 잠이 드냐. 평소 같았으면 종이 울리자마자 윤아름 반으로 뛰쳐가는건데. 난 급히 짐을 쑤셔 넣고 반을 빠져나왔다. 야! 뒤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외침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또 울고 있으면 어떡하지. 심장이 빠르게 쿵쿵 거렸다.
09.
하교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윤아름을 찾았다. 유독 동그란 머리통을.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질 않았다. 초조함에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러다 문득 한 곳이 생각났다. 윤아름이랑 처음 만났던 그 옥상.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윤아름이 그곳에 있을 거라는. 난 주저없이 내달렸다. 거세지는 빗줄기가 바닥에 물웅덩이를 만들어냈다. 달릴 때마다 찰방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운동화가 빗물에 흠뻑 젖어갔다. 항상 가던 길인데도 떨렸다. 옥상이 눈 앞에 보이자 빠르게 뛰던 심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만약에 없으면 어떡하지. 막연한 걱정이 들었다. 오래 가진 않았다.
없으면 계속 찾아야지. 찾아서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줘야지. 비를 멈춰줘야지. 때로는 단순한 결론이 도움될 때가 있다. 한참을 뛰었지만 또 뛰었다. 옥상에 빠르게 닿기 위해.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꾸역꾸역 삼켜냈다. 마침내 문 앞이었다. 누군가 먼저 들어왔는지 녹슨 철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여기로 왔구나. 잘게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애타게 찾던 윤아름이 보였다.
"아름아!"
손으로 귀를 막고 벌벌 떠는 윤아름은 내 부름에도 일어서지 못 했다. 처음 봤던 그때처럼. 빠르게 달려가 반쯤 쓰러져있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름아. 정신 차려봐. 윤아름! 애타게 귀를 틀어막고 있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난 내 손으로 윤아름의 손을 붙잡았다. 그제서야 윤아름은 눈을 뜨고 날 바라봤다.
"정신 차려봐. 응?"
"...허억.”
"네 소원 들어줄게. 비 멈춰줄게."
"....."
"그러니까 떨지마. 응?"
“선배가... 뭐를 안다고.”
"알아. 다 알아. 그러니까 한번만 믿어봐."
윤아름은 온통 파랗게 질려있었다. 맞잡은 손이 차가웠다. 꼭 죽을 사람처럼. 텅빈 눈동자로 눈물만 쏟아내던 윤아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 난 손을 모았다. 언제나처럼.
“비를 멈춰줘.”
느슨하게 눈을 감고, 모은 두 손에 힘을 주고, 하늘을 향해 또박또박. 거창한 건 필요 없었다. 비를 멈춰달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세게 내리던 비가 잦아들었다. 먹구름 사이로 다시 햇빛이 비춰왔다. 감은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봤다. 비로 씻겨진 세상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던 난 시선을 돌려 윤아름을 확인했다. 텅빈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꾹 닫혀있던 입은 약간 벌어져있었다. 벌어진 상황에 많이 놀란 듯 싶었다.
"...이게 무슨.”
"봐. 네 소원 안다니까."
그냥 능력이야. 소원을 빌면 비가 멈춰. 너가 옥상와서 비 멈춰달라고 빌었던 날. 그때도 내가 그치게 한 거야. 너 우는 거 보기 싫어서. 그니까, 너한테 한 말 진심이었다고. 친해지자고 했던 거. 네 소원 안다고 했던 거.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던 거. 윤아름은 넋이 나가보였다. 하긴 그렇겠지. 살면서 비를 멈추는 사람을 볼 거란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 난 말없이 기다렸다. 한참을 뜸들이던 윤아름은 겨우 말을 꺼냈다.
"...그래서 따라다닌 거에요?"
"응?"
"다 알고 따라다닌 거냐구요."
"...그런거지."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날은 정말 우연히 봤던 거였어. 네가 명찰 떨어뜨리고 가서 네 이름 알았던 거고. 무작정 달려들어서 미안해. 근데, 난 진짜 친해지고 싶어서... 조금 화난 듯한 표정에 말이 무작위로 튀어나왔다. 윤아름은 또다시 말이 없었다. 한참 혼자 얘기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주변이 없으면 조용히라도 하자. 그때 윤아름의 손이 내 머리로 다가왔다.
"하나도 안 젖었네요."
"....."
"진짜구나."
손이 이마를 스쳤다. 스쳐진 부위가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몸이 확 달아올랐다. 윤아름은 두어번 머리를 쓸더니 중얼거렸다. 진짜구나 라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야.
"이런 걸로 거짓말 안쳐."
"봐도 믿을 수가 없어서요."
"그건 그렇지."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고."
세상 일이 다 이렇지 뭐. 어깨를 으쓱거렸다. 윤아름은 그런 날 보고 살짝 웃었다. 미미하지만 확실하게. 어, 웃었네. 윤아름 웃었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웃는 모습이 예뻤다.
"최범규였죠."
"응?"
"선배 이름."
"어어."
"혹시나 해서요."
야, 내가 널 그렇게 따라다녔는데 이름도 몰랐던 거야? 조금 서운했다. 그런 날 눈치챘는지 윤아름은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알았는데 진짜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에요. 진짜 혹시나. 당황어린 모습은 처음이라 웃음이 나왔다. 완전 다람쥐잖아. 내가 소리내어 웃자 윤아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 웃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몰라도 괜찮아."
"....."
"내가 몇 번이고 다시 알려줄 거니까."
최범규. 내 이름. 넌 그때마다 기억하면 돼. 이번엔 반대로 내가 윤아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축히 젖어있지만 상관없었다. 머리카락 끝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내 손 위로 떨어져도 괜찮았다. 이제서야 겨우 시작이 됐으니까. 윤아름은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았다.
"이제 나가자."
"....."
"비 멈췄으니까."
난 손을 내밀었다. 윤아름은 잡지 못 하고 우물쭈물댔다. 이런 것도 귀여우면 나한테 문제가 있는건가. 웃지 않으려 입술을 꾹 물었다. 결국 내가 윤아름의 손을 이끌었다. 여전히 손이 차가웠다.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었다.
"앞으론 망설이지 말고 잡아."
항상 비워둘게. 윤아름은 맞잡은 손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난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옥상 위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그 중심에 우리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