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내가 하면 안되냐고...”
“그런 사람... 필요없어요.
그냥 몸살이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또 흔들릴 뻔했다.
하지만 두번은 흔들리지 않아.
그러면.. 완전히 넘어가버릴 것 같으니까..
마음을 주는거.. 사랑하는거..
그게 또 하고싶어질 것 같으니까..
“우리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아뇨, 팀장님..
처음처럼 해주세요.
차가우셨잖아요, 저한테.”
“아니 그건,”
“화도 내세요. 저희집에서 깨는 거 불쾌하다고 하셨잖아요.”
“...여주씨.”
“저는요, 이미 아무것도 없는 빈껍데기에요.
2년전에 같이 죽었으니까..
마음도.. 감정도..
그래서 위로받고 그런거, 필요없어요.”
너를 잃고 정말로 따라 죽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의건이 너 뿐이어야 하니까..
“아뇨. 나중에 다시 얘기 해요.”
내 옆에 앉았던 팀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던 그는
깬거 봤으니 이만 가보겠다고 했다.
내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차가웠나.
화를 냈었나.
여주씨의 말 마디마디들이 머릿속에 박힌다.
모두를 똑같이 대했다고 생각했다.
여주씨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때, 내가 본 여주씨의 눈물이 스쳐지나간다.
그랬지.. 내가 그 사람을 울렸지..
왜 그렇게 흥분했을까,
나답지 못하게..
항상, 단 한번도
남들에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흥분한 상태의 사람은, 자신의 바닥까지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내겐 내 마음을 숨기는 게 쉬웠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언제나 웃으며 차근차근 말하곤 했다.
참 다정하고, 젠틀하다던 나에 대한 소문.
내가 만든 나의 이미지지 진짜 나를 일컷는 말은 아니었다.
“팀장님, 오셨어요?
여주씨는 좀 괜찮아요?”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 안드나요?”
“그게 무슨...”
“모르긴 누가 몰라.
하..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한테도 여주씨한테도 관심가지지 마시라구요.”
회사안에 정적이 흐른다.
웃음기없이 이런 말 하는 거..
처음이다.
내가 쌓아온 이미지를 직접 깨뜨리게 될 줄이야..
어쩌면 혹시나 했던 내 마음이,
좀 더..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팀장님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병실은,
답답하고 적막했다.
무슨 말을 하긴 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괜히 나와 의건이의 일에 팀장님을 끌어들인건 아닌지
후회스럽다.
나한테 할 말이있다고 했는데..
뭐였을까..?
머릿속은 복잡하고, 마음은 먹먹하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애초에 이 회사에 들어온 것부터..
그날부터 뭔가 꼬인 것이다.
“어? 여주씨?”
“아..안녕하세요..”
팀장님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몸도 안좋다던데 쉬시지 왜 나오셨어요~”
“아.. 좀 쉬었더니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과 얘기 중에도 그의 시선을 신경써야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쳐다만 보는 팀장님은, 무슨 생각 중인걸까..
조금은 화난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내자리 책상에 앉아 쌓여있는 서류들을 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이걸 다 하려면 오늘도 야근을 피할 수는 없겠구나..
그 생각에 애써 밝아보려던 표정이 다시 우울해진다.
“말 정말 안듣네요. 여주씨는..”
작게 그렇게 말한 팀장님은 내 책상에 쌓인 서류들을 번쩍 들었다.
“저, 팀장님 지금..”
“딱 한 번만. 이번 한 번만이라도 내말 들어요.
내가 할테니까. 가서 좀 쉬라구요.”
팀장님의 얼굴은 내가 본 중 가장 어두웠다.
서류들이 옮겨지고 텅 빈 책상 위에
젖은 명함이 보인다.
강다니엘.
그 사람의 명함이.
-
어제 저녁 푹 쉰덕에 한결 몸이 가벼웠다.
혼자 깬 아침은 숨이 막힐 듯 조용하다.
팀장님과 티격태격하던 그 하루가 뭐라고..
겨우 하루 그랬는데..
벌써, 혼자 깨는 아침이.. 싫다.
“안녕하세요~”
평소와 분위기가 아주 조금, 다르다.
내가 없는 사이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여주씨. 잠깐 나 좀 볼까요?”
“아, 네.”
팀장실로 불러간 나는 또 달라진 팀장님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이거 복사 좀 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주시구요,
여주씨 메일에 파일 보내놓은거 취합 정리 좀 해주시구요.”
“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네.”
뒤를 돌아 팀장님 방을 나오려던 때였다.
“몸은...
좀 괜찮아요?”
“...네.”
“...그럼 됐어요. 가봐요.”
조금은 다운된,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보이는 팀장님이었다.
팀장님이 주신 서류들을 복사 하고,
또 그것들을 팀장님의 책상으로 가져간다.
“여기요.”
“수고했어요.”
아무래도 뭔가 달라.
표정도, 어투도.
다시,
차갑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사람이,
하룻밤사이에 차가워졌다.
지난밤, 의건이가 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유가, 뭘까..?
컴퓨터로 메일을 열어 팀장님이 보내신 파일들을 찾아 편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팀장님의 차가운 표정이
한가득이다.
‘그 사람.. 내가하면 안되냐고..’
‘아뇨, 팀장님..
처음처럼 해주세요.
차가우셨잖아요, 저한테.’
그 말 때문일까..
약기운에, 지끈거리는 머리에,
전날 밤 복잡했던 마음에, 그럼에도 눈치없이 흔들리는 마음에.
괜히 너무 화를 냈나..
그 말 때문에 화나신 건가..
“여주씨~ 점심먹으러 같이 가요~”
“아, 네.”
점심을 먹으려고 일어난 사람들 사이,
팀장님과 눈이 마주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