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그룹 내 연애는 괜찮음
권순영 x 이지훈
회사 건물은 그대로였지만 간판에 쓰여있는 글자는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옆구르기 하면서 봐도 하이브 엔터테이먼트가 맞았다.시x.뭐지?일단 늘 하던데로 출입카드를 찍어야.....엥?출근할 때 항상 입는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출입카드가 없어졌다. 나는 당황해서 외투 주머니는 물론이고 바지 주머니까지 몇번이고 손을 집어넣었다 빼기를 반복했지만 나오는 것은 먼지 뿐이었다.출입카드가 없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나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출근하는 직장인들 답게 다들 묵묵히 바닥만 보고 걸으며 출입카드를 찍고 안으로 하나 둘 들어가고 있을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를 눈 여겨 보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경비에게 얘기해서 임시 출입증이라도 발급해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혼란함에 다소 예민한 몸짓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그는 깜짝 놀란 듯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두어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아, 미안해요. 놀랐어요?"
"............"
"여기에 볼일 있으신 것 같아서....누구 찾아왔어요?"
조금은 긴 까만 앞머리가 눈썹을 덮고있는 남자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누가봐도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있었다. 잘생기다 못해 약간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 딱 봐도 여기 소속 연예인이겠다 싶었다. 입을 다물고 진한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모습은 흡사 사냥감 스캔하는 잿빛 늑대가 연상되어서 온몸에 절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일순 언제 그랬냐는 듯 남자가 눈을 접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어쩐지 긴장감이 풀려 나는 허탈하게 같이 웃고 말았다.
그때,
[1. 알바임?그냥 가던 길 가시죠.]
[2. 진짜 잘생기셨네요.]
[3. 연습실을 찾고 있는데요.]
....네?
남자의 얼굴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스템 창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아마 누가봐도 우스꽝스러운 얼굴일 것이었지만 남자는 그런 내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 듯 여전히 다정한 미소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 상태로 서 있을 것만 같은 남자를 보며 나는 그제야 술 먹고 쓰러져 잠들기 직전에 핸드폰에서 본 문구가 떠올랐다.
어느날 눈을 떠보니 아이돌의 인기멤이 되었다면 어쩌고.....그리고 1년 뒤에 신인상을 받으라는 퀘스트.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크게 부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내가 정말로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거지? 그것도 정체불명의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에? 그것도 또 빌어먹을 연습생 신분으로?아니, 잠깐.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뭐열심히 하던 게임 속에 들어왔으면 당황스럽더라도 익숙하기라도 하지. 나는 이런 게임이 있는 줄도 몰랐단 말이다! 어쩐지 억울한 마음에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이게 정말 게임이라면, 퀘스트를 깨서 엔딩을 보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 눈앞에 선택지창을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이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누군지 참, 선택지 한번 성의 없다. 아니면 지독한 답정너 스타일이거나.
저 선택지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건 어차피 하나밖에 없었다.나는 쭈뼛거리며 손을 살짝 뻗어, 이번엔 어젯밤 술에 취해 No 대신 Yes를 누른 것처럼 잘못 누르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3번 선택지를 가볍게 건드렸다.
"...연습실을 찾고 있는데요."
분명 내 입을 움직여 나온 내 목소리로 만들어진 문장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가 나를 조종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 끔찍하다. 자꾸만 오한이 들어서 나는 두 팔을 슥슥 비볐다.
"연습실.....? 혹시.....이지훈...?"
"어...?맞아요. 저 이지훈"
저 말도 안 되는 선택지창이 뜨지 않았을 때는 내 자유의지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근데 제 이름 어떻게 아세요?"
"오늘부터 같이 연습할 건데 당연히 알아야죠. 아, 저는 최승철이라고 해요."
"아, 네...."
"저희 2개월 뒤에 데뷔하는 건 얘기 들으셨죠? 다들 연습한다고 정신 없는데 막판에 실장님이 꼭 넣고싶은 멤버가 있다고 하는 거에요."
"2개월이요?!?!?"
길거리 캐스팅한 애를 2개월 뒤에 데뷔하는 데뷔조에 바로 꽂아 넣는 회사가 어딨어? 이 미친 설정 같으니.
"어....실장님이 다 설명했다고 하셨는데?우리 데뷔곡 데모 파일도 미리 듣고 익혀두라고 억지로 모닝콜로 해 주셨다면서요."
아.....그 구린 모닝콜이....데뷔곡.
나는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들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직 첫 출근도 안 한 애를 뭘 믿고 발매도 안 한 곡을 유출 해? 이 회사, 정말 괜찮은 걸까. 깊은 생각에 잠겨있느라 나도 모르게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의 나의 버릇이었다. 승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그런 나를 힐끔 보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아끌며 출입카드를 찍고 유유히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있는 보컬 룸과 댄스 룸들을 스쳐보며 나는 원래에 플디 엔테와 완벽하게 똑같은 구조에 다시 한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게임 속이니까 라고 편하게 생각하기엔 이런 설정들이 너무도 수상쩍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승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저 근데....진짜 스물세살 맞아요?"
"아, 네. 저 올해 스물세살이요..."
"와, 진짜 어려보인다. 전 아까보고 고등학생인가 했어요. 아, 저는 스물네살이요. 그...말 편하게 해도 될까, 요?"
"네, 네. 말 편하게 하세요!"
스물네살이라는 말에 내심 놀란 걸 감추려 나는 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크게 대답했다.뭐야, 나보다 나이 많은 스물네살도 데뷔할 수 있는 설정이라니. 정말 눈물나게 다정한 세계관이다.
승철은 연습실 앞까지 와서야 내내 잡고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사실 아까부터 손 좀 놔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을 계속 꾹 참고 있었다. 그렇게 힘을 세게 주고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손목이 조금 시큼거리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게 바로 텃세?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마 이 사람도 긴 터널 같은 연습생 시절을 지나왔을 텐데 설정상 길을 걷다가 갑자기 함께데뷔하게 된 나라는 존재가 영 마뜩잖았을 것이다. 하지만...나도 연습생 생활 만만찮게 해왔거든? 어쩐지 또 울컥하는 마음에 나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승철을 힐끔거렸다. 승철의 까만 머리카락 위로 허공에 텅 비어있는 하트가 문득 깜빡거렸지만 나는 애써 눈을 돌렀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속으로 정신없이 되뇌이는데 승철이 커다란 손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지훈아."
이 사람, 입 다물고 있을 땐 날카로운 인상인데 입 열면 거짓말처럼 나긋나긋해진다. 불안한 마음을 단숨에 갈아앉혀 줄 정도로.
이번엔 그 거지같은 선택창도 뜨지 않았다. 나는 손을 내밀어 승철의 손을 맞잡았다.
"저도 잘 부탁해요, 승철 형."
"많이 긴장되지?"
이런, 손을 덜덜 떨고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걱정마. 우리 애들 다 착해. 오히려 한두명 빼고는 다들 낯가림이 심해서 걱정이지."
"........."
"...그리고 나도 그렇고."
"형이요?"
"응, 나도 지금 좀 떨리는데?나 지금 진짜 최대한 용기 내고 있는거야."
나는 승철의 얼굴을 이번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한쪽 귀에 걸린 은빛 피어싱이 문득 반짝인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의도가 다분한 다정한 미소를 보여주는 얼굴이 솔직히 미친듯이 잘생겨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합격, 합격, 합격!!! 이 정도 비주얼은 돼야 아이돌 하는 거지!!!내가 여자라면 지금 반하는 타이밍이었어!!!
주책맞게 콩콩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아무 생각이나 해대며 나는 조금 바보처럼 헤실거렸다. 승철이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약간 주저하는 듯한 손은 이윽고 내 어께 위에 앉아 가볍게 툭툭 두드려주었다. 날티가 줄줄 흐르는 이 얼굴이 아직은 조금 무섭지만 어쩐지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두 눈을 사르르 감으며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간 승철의 눈이 조금 커진 것 같았다.
[최승철 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음?
반사적으로 나는 시선을 올려 승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작은 하트를 보았다. 하얀색 테두리로 그려진 귀여운 하트는 여전히 투명하게 텅 비어있었지만 아주 미묘하게 붉은색이 차오른 것 같기도했다. 음. 아니야. 깊게 생각하지 말자. 깊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숨을 흡 들이마시며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내가 몇년간 땀 흘려 연습해왔었고 이제는 또 새롭게 시작해야 할 공간.
[미션 성공! 오전 9시까지 연습실에 출근하였습니다.]
[미션 보상 : 멤버들의 호감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열렸습니다.]
[원하는 멤버와 스퀸십을 하면 호감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 진짜 뭐래. 시스템창 뜬금없이 튀어나오는거 적응 안 돼 죽겠네.
"아, 승철이형! 나 일찍왔지?"
"오, 수녕이. 오늘 진짜 일찍 왔네"
"어? 옆에.....누구.....셔?"
아직 멤버 전원이 다 모이지 않은 모양인지 연습실 안에는 나보다 형처럼 보이는 남자 두명이 앉아있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실장님한테 얘기 들었지? 우리의 열세번째 멤버."
"아, 헐. 그 이..."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니 나는 다시금 긴장이 되었다. 사실 아까 승철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나 역시 지독히도 낯을 가렸기에 이 상황이 두렵기만 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함께 데뷔하게 될 동료들과 빨리 친해지는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지훈이에요."
목소리까지 덜덜 떨려 나온 것 같은데 눈치챘을까. 패기 있게 먼저 인사 해놓고 내 눈동자는 갈 곳을 잃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근데....저 사람 뭐야? 왜, 왜 자꾸 다가와? 뭐야, 왜? 왜 그런 눈으로 봐?
"진짜 이지훈이에요?"
"...네."
"진짜 이지훈?"
"네."
"스물세살?"
"네."
"대박. 근데 왜 이렇게 귀엽지?"
"네...네?"
코앞에서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남자의 눈이 어쩐지 감격에 겨워 보였다. 역시나 까만 머리를 한 이 남자도 콧대 오똑하고 눈썹 진한 것이 잘생긴 인상이었다. 승철보다는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나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새까만 눈동자나 짙은 눈썹같은 것들 때문에 약간 무서운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보다 족히 십센치는 큰 것 같은 키에 압도되는게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드는데 남자의 두 손이 내 볼을 덥석 붙잡았다.
"아니, 진짜 너무 귀여운 거 아니야? 진짜 스물세살이라고?이게 나랑 동갑이라고?"
이게? 저기요. 이게라니요.
성질 같아선 한마디 쏴붙여 주고 싶었지만 초면에 차마 그럴 수 없어 나는 눈동자만 굴려댔다.
"아, 나 너 온다고 해서 내가 진짜 얼마나 기대했는데. 아,나는 권순영."
"......"
"모르는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내가 다 알려줄게"
"......."
"근데 너 볼 진짜 말랑거린다."
내 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던 순영이의 손길은 내가 아무말도 하지않으니 점점 더 대담해졌다. 어느새 순영이에게 밀려 내등이 벽에 닿았는데도 순영이는 내 볼을 놔 줄 생각을 하지않았다. 나는 눈을 살짝 돌려 승철 쪽을 쳐다보았다. 승철이 옆에 선 다름 남자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 있었다.
"권순영 뭐야? 쟤 저런 캐릭터 아니잖아."
"내가 쟤를 몇년을 봤는데, 저렇게 적극적인 권순영 처음 봐."
저기요, 이런건 구경할 게 아니라 말려주셔야죠....
"아, 진짜 너무 귀엽다. 지훈아. 지훈이라고 해도 되지? 너도 순영이라고 편하게 불러."
".....응."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 대답하자 순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목소리 뭐야? 아 너무 귀여워. 너 고향 어디야? 살짝 사투리 억양 있는 것 같은데."
응, 한마디 밖에 안했는데 억양은 무슨.
[권순영 이 이지훈 님을 귀여워하고 있습니다.]
[권순영 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시x. 갑자기요?
도대체 이거 장르가 어떻게 되어 먹은 세계관인 거지?
순영이는 이젠 나를 거의 말랑이 취급을 하고있었다. 그의 팔 사이에 갇혀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을 받고 있으려니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키 차이 때문에 더 그런가. 드라마 같은데에 나오는 벽치기하는 잘생긴 남주를 보는 여주의 기분이 이런걸까. 가슴이 묘하게 간질거리는 것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선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그때 또 다시 빌어먹을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선택지 발생! 신중하게 선택하세요.]
[1. 호감어린 시선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2. 초면에 이건 아니지.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손등을 가볍게 때린다.]
[3.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 일단뒤돌아연습실을도망치듯나가서 피한다.]
내가 선택지를 고르지 않으면 이 세계는 굴러가지 않겠다는 듯이 미묘하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공간에서 문득 아까 아침에 들었던 모닝콜의 한 구절이 귓가에 멤돌았다.
운명의 태양에 내일을 걸어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