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03
늘 그랬듯, 늘 그렇듯
그로부터 4년 후. 나는 어느새 언니와 같은 리셸 아카데미에 갈 나이가 되었다. 언니가 끝내 들어가지 못한 그 아카데미에 말이다.
새해 첫날어서 그런지 그날처럼 날이 매우 추웠다. 물론 언니에게 보여주고싶어 아카데미 춘추복을 미리 입고 나온것도 내가 추위를 느끼는데 한몫 했을 것이다.
나는 두 눈을 감고 마차의 떨림을 느꼈다. 잡생각이 많을때 하는 버릇이었다. 떨림은 점점 줄어들더니 마차는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
문이 똑똑 두번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태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옆자리에 살며시 올려둔 꽃을 쥐고 마차 문을 천천히 열었다. 마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태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게 고개를 살짝 꾸벅였고 나는 고개를 휙 돌려 마부를 바라보았다. 태현이는 그런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사이가 좋았던 우리인데 찬바람이 쌩쌩부니 마부는 어쩔 줄 몰라했다.
'' 여기서 기다려요. 얼마 안걸릴테니까. ''
내 말을 들은 마부는 모자를 벗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태현이가 마차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태현이가 조심스럽게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 뭐해? ''
당황한 나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태현이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덤덤하게 그 눈빛을 받으며 내게 케이프를 둘러주었다.

'' 날이 많이 춥습니다. ''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태현이는 조심스럽게 리본까지 묶어주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태현이가 매준 리본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마차에 내린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흰 백합을 들고 있는 손으로 검은 드래스 자락을 잡았고 반댓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 동행해드릴까요? "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천천히 그와 맞잡은 손을 땠다. 물론 그와 함께 가는 편이 훨씬 안전하겠지만 지금은 혼자있고 싶었다.
" ...미안, 여기서 기다려줘 "
평소같으면 내가 싫다고 해도 같이 가줄 태현이였지만 오늘은 날이다보니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아마 날 위로해주지 못하니 자신만의 방법으로 날 배려해준 것이다.

" 아가씨의 명대로, "
태현이는 마차 문을 닫았고 나에게 살짝 고개를 꾸벅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것이 곧 비가 올 듯했다. 나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언니가 잠든 그곳으로 향했다.

#03
끝없는 악몽
일부로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이 애매한 시각에 왔는데 이미 먼저 자리를 잡은 이가 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내 앙숙이자 숙명과 만나버렸다.
" 허? "
나는 내 언니와 함께 묻힌 로미오의 묘를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죽은 고인이어도 로미오는 나에겐 내 소중한 언니, 줄리엣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였다. 당연히 로미오의 동생인 최연준은 내게 살인마의 동생이자 살인현장을 보여준 장본인이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로미오가 잠들어 있는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이를 낮게 갈았다. 그의 얼굴을 보니 기분은 이 날씨보다 더 안좋아졌다. 잊고싶었던 그 역겨운 얼굴이 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일부로 크게 바람새는 소리를 내고 그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찌나 쌔게 땅을 집었는지 구두의 굽이 땅에 박혀 걸음마다 작은 구멍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는 절대로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로 팔을 꼬고 비아냥거리듯 말을 걸었다.
'' 오, 로미오... 로미오, 로미오, 로미오. 그놈의 로미오. 너흰 지치지도 않나봐. 그치? ''

내 물음에 연준이는 이제서야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면서도 그는 절대 나를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내 시선은 그가 일어나며 점점 위로 올라갔다.
'' 갈테니까 제발 그냥 닥쳐 ''
'' 혼잣말이야. 내가 너한테 미쳤다고 말을 걸어? ''
연준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 하... 너 존나 지겨워. ''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눈밑이 붉어진 것을 보니 또 혼자서 청승맞게 울고있었나보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그의 모습에 다시금 화가 울컥 올라왔다.
'' 내가 할 소리야. ''
그는 내 표정을 보고 키득 웃으며 양손을 골반에 올리고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쳤다.
" 반응을 보니 너도 들었나보네? 그치? "
연준이는 짜증나는 미소를 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딴 놈이 내 약혼자라니 혐오스러웠다.
" 언니랑 로미오의 한을 우리로 푼다, 정말 우습지 않아? 그 둘로 인해 우리 사이는 갈라질대로 갈라졌는데 화합이라니! 이보다 더 우스운 소리가 세상에 있을까? "
나는 언니의 묘 앞으로 걸어갔다. 연준이는 그런 나를 그저 아무말 없이 바라보았고 우리 사이엔 짧은 침묵만 흘렀다.
나는 언니의 비석을 천천히 쓸었다. 생전 언니의 고운 손과는 다르게 거칠고 언니의 환한 미소와는 다르게 삭막했다. 나는 그런 비석이 아름아리따웠던 언니의 모습을 반의 반이라도 닮길 바라며 살며시 나와 언니의 머리 색과 닮은 흰 백합을 올려두었다.
'' ...로미오, 그 개자식만 아니였으면 난 지금 너의 존재조차 모르겠지. ''
'' 정유화!!!! ''
내 말을 들은 연준이는 버럭 소리를 쳤다. 내 이름 석자를 부른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연준이는 화가난 표정으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가 내게로 오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 형은 훌륭한 보좌관이 되어 폐하를 보필했을거야. 강력한 황권 아래 귀족파의 대표인 너희 캐플릿가문은 우리 위대한 몬태규 발 밑에 있었겠지. 올려다보지도 못하게 짓밟힌 채로! ''
최연준은 전율이 온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대사를 강조한 그의 목소리에 그의 새하얀 목을 조르고 싶었다. 아니면 지금 머리에 꽂은 핀으로 그의 목을 찌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머리 핀을 강하게 잡았다. 결국 잡기만 할 뿐 그의 목을 찌를 용기가 없어 그를 노려보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최연준은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아무말 없이 휙 돌아서 제 갈길을 갔다.
멀어지는 연준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언니를 바라보았다. 언니곁에 조금 더 있고싶었지만 로미오라면 속이 울렁거리고 토가 나올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 ...내 언니 욕하지마. "
나는 최연준을 향해 소리쳤다. 내 소리가 들렸는지 그는 가던 길을 멈추더니 나를 향해 돌아봤다.
" 너는 어쩜 가면 갈 수록 그 ㅅㄲ랑 똑같아지냐? 그래서 너가 너무 역겨워. "

" 너의 모든 행동이 역겨워서 미칠거 같아. 너만 보면 내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리거든. 그뿐만이 아니야. 그냥 너가 죽도로 싫어. 널 죽여버리고 지옥에나 나가떨어지고 싶을 정도로 ''
'' 내가 할 소리야. 너도 니 언니랑 똑 닮았어. 그래서 이해가 안되더라. 형은 왜 이리 멍청하게 생긴 여자를 사랑했는지. ''
나는 울면서 연준이의 멱살을 잡았다. 반듯하게 펴져있던 그의 옷이 나로 인해 구겨져갔다.
'' 나에게 로미오는 살인자야. 내 언니와 사촌오빠의 목숨을 앗아간. ''
내 말을 들은 연준이는 내 손을 뿌리쳤다. 그는 다시 옷깃을 정리하며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 제대로 말하자. 그 멍청한 것의 자살소동 때문에 우리 형이 죽었어. ''
우리 사이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엔 저번과는 다르게 주변은 요란하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날과 같은 첫 눈이었다.
'' ..... ''
'' .... ''
우리는 그 날처럼 함께 첫눈을 맞았지만 그 날처럼 서로를 마주보지는 않았다. 각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내던지며 암묵적으로 떠난 이를 위해 묵념했다.

'' .... 아가씨 ''
태현이가 오기 전까지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다. 연준이와 태현이와 눈이 마주쳤는지 태현이는 흠칫 놀랐다.
'' 왔어...? ''
'' ... 감기 걸리시겠어요 ''
'' 보고싶었어. ''
내말에 태현이는 움찔하더니 우산을 펴서 내게 씌어주었다. 이미 내 머리며 어깨며 옷에 눈이 쌓였지만 태현이는 내게로 우산을 기울어 씌어주었다.
'' 아까 제게 그리 매정하게 대하셔서 보고싶지 않으신줄 알았습니다. ''
'' 짓굳기는. 그래서, 위로... 안해줄거야? ''
'' 제게 달리 선택권이 있나요? ''
'' 그치. ...나 울고싶어 ''
'' 편하게... 우십시오. 제가 가려드리겠습니다 ''
어느새 연준이는 자리를 떠났고 나는 맘편히 울며 주저앉았다. 태현이는 어쩔줄 몰라했다. 그저 어깨에 쌓인 눈을 치워주고 자신의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얹어주었다.
'' 늘 그렇듯, 위로해드릴까요? ''
'' 응 안아줘 ''

'' 정말 그걸로 충분하시겠습니까? ''
나는 울면서 태현이를 올려다보았고 태현이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나는 그의 손에 내 뺨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고 평소와 다르게 따스히 안아주었다.
'' ...응, 늘 그랬듯. ''
그의 품에 안겨도 내 끝없는 악몽은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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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왔네요😅
이번 소제목은 사실 3개가 이어졌는데요! 늘 그랬듯, 늘 그렇듯 끝없는 악몽이 찐 소제목이었습니다!
근데 너무 길어서 잘라봤어요🙂
올해 마지막 연재는 이 작품으로 끝내고 싶어서 후다닥 달려왔습니다!😁 올해도 너어무 수고하셨고 2022년의 끝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