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D-day 1

 


















"어차피 우린 엑스트라야."


이 말은 내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신조이자, 이 거지 같은 세계관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어기제였다.

지나가는 일행 1, 혹은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비명 지르며 사라지는 소모품 2. 그게 이 세계가 내게 정해준 규격이었다.

좀비가 뇌를 파먹으러 달려들든, 미친 마왕이 하늘을 찢고 강림하든, 아니면 여주인공이 역하렘의 파도 속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든. 1인칭 관찰자 시점조차 허락되지 않는 엑스트라의 문장에선 그 어떤 서사도 사치였다.


그나마 곱게 죽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런데, 세상이 진짜로 망하기 직전이다.


"야, 진짜 안 도망가? 저기 좀비 떼 몰려온다니까!"


멀리서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엑스트라 3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다. 나는 편의점 앞에 앉아 유통기한이 딱 10분 남은 삼각김밥을 까며 대충 손을 흔들어줬다.

도망가서 뭐 하겠나. 어차피 다음 장면에선 주인공이 엑스칼리버든 뭐든 휘둘러서 다 쓸어버릴 텐데. 내가 할 일은 그저 주인공의 화려한 등장을 돋보이게 할 '겁에 질린 배경'이 되는 것뿐이다.

하지만 5분이 지나고, 삼각김밥을 다 씹어 삼킬 때까지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나타난 건 침을 흘리며 괴성을 지르는 좀비 무리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설정 오류인가? 아니면 작가가 연재 중단이라도 때린 건가?

보통 이 타이밍에 여주인공이 비명을 지르고, 남주인공이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구출하며 화면 가득 꽃가루가 날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날리는 건 꽃가루가 아니라 좀비의 부패한 살점들이다. 심지어 그 좀비들이 노리는 건 여주인공이 아니라, 편의점 파라솔 아래서 멍하니 앉아 있는 나였다.


"야, 작가님! 이거 장르가 코믹이라며! 왜 갑자기 하드코어 생존물로 틀어!"


나는 급하게 파라솔을 뽑아 들었다. 엑스트라 인생 20년 차, 위기 상황에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달려드는 좀비의 대가리를 파라솔 끝으로 후려갈겼다. 퍽,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좀비가 바닥을 굴렀다.


"어? 생각보다 약한데?"


그때 깨달았다. 주인공들이 초능력을 쓰고 마법을 부리는 동안, 엑스트라인 나는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생존 근육을 단련해왔다는 사실을. 주인공이 한 번 휘두르는 검강에 수천 명씩 갈려 나가는 게 일상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엑스트라에겐 최소한의 '회피 만렙'과 '방어력'이 필수였으니까.

무엇보다 내 손에 닿은 감촉은 분명했다. 묵직한 파라솔 기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 그리고 두개골이 함몰되며 터져 나오는 불쾌한 점액질의 파편들. 이건 서술 한 줄로 생략되는 ‘엑스트라의 죽음’과는 궤가 달랐다.


“이게 왜 진짜 타격감이 느껴지는 건데?”


나는 당황하며 손에 쥔 파라솔을 고쳐 잡았다. 보통 엑스트라라면 이 대목에서 ‘으악!’ 한마디와 함께 화면 밖으로 퇴장하는 게 국룰이다. 하지만 내 몸은 퇴장은커녕, 다음 타겟을 향해 아주 자연스럽게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었다.




 



​## 1. 개연성의 붕괴, 혹은 생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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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무리는 지능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방금 동료의 머리를 박살 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거리:약 5미터.
개체 수:대략 열댓 마리.
상태:전형적인 초반부 잡몹. 속도는 느리지만 물리면 끝장.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평소라면 ‘주인공 님, 제발 구해주러 오세요!’라고 내면의 비명을 질렀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주인공인 ‘최연준’은 지금쯤 학교 옥상에서 여주인공과 눈을 맞추며 각성 이벤트를 찍고 있어야 했다. 여기서 여기까지 오려면 최소 15분은 걸린다.


“15분을 버텨야 한다고? 이 쓰레기 같은 파라솔 하나로?”


내가 투덜거리며 파라솔을 가로로 휘둘렀다. 붕,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른 파라솔이 좀비 셋의 턱주가리를 동시에 날려버렸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주인공의 화려한 스킬에 휘말려 죽지 않기 위해 했던 고생들을 떠올렸다.
남주가 화염 폭풍을 일으키면 나는 그 열기에 타 죽지 않으려고 편의점 냉동고에 들어가는 훈련을 했고, 여주가 냉기 마법을 흩뿌리면 저체온증을 피하려 핫팩 20개를 몸에 붙이고 다녔다.

그 결과가 이거다. 엑스트라 주제에 웬만한 용병 뺨치는 생존 반사신경을 갖게 된 것이다.


“좋아, 작가가 날 버렸다면 나도 내 맘대로 산다.”


나는 파라솔을 접어 창처럼 고정했다. 그리고 달려드는 좀비의 미간을 향해 정확히 찔러 넣었다.











## 2. 엑스트라의 전용 스킬: [군중 속에 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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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난동 피우다 보니 문득 공포가 엄습했다. 좀비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눈에 띄는 것'이 무서웠다. 이 세계의 법칙은 가혹하다. 엑스트라가 분량 이상으로 눈에 띄면, 작가는 반드시 그 캐릭터에게 ‘시련’이라는 이름의 데드 플래그를 꽂는다.

나는 서둘러 근처에 쓰러진 좀비의 체액을 옷에 묻혔다.
그리고 표정을 풀었다. 입을 반쯤 벌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로 흐느적거렸다.

>[시스템 안내 (비공식)]
>사용 스킬:엑스트라 전용 - ‘공기 같은 존재감’
>효과:주인공 일행이 근처에 있을 때 ‘아, 저기 사람 하나 죽어있네’ 수준으로 인지 저하 발생.


그때였다. 저 멀리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편의점 건너편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드디어 오셨군. 이 세계의 중심, 모든 조명을 독식하는 태양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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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기도 다 틀린 것 같은데······.”


익숙한 목소리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발성. 100미터 밖에서도 들릴 법한 정의감 넘치는 대사. 주인공 최연준이었다. 그는 눈부신 성검(사실은 그냥 야구방망이에 마력을 두른 것뿐이지만)을 휘두르며 좀비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나는 파라솔을 버리고 근처 쓰레기통 옆에 쭈구려 앉았다. 이제 됐다. 이제 저놈이 다 정리해줄 거다. 나는 다시 ‘배경 1’로 돌아가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의 남은 한 입을 즐기면 된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 3. 원작 파괴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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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 이렇게 숫자가 많은 거야···!”


최연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쓰레기통 틈새로 밖을 내다봤다. 말도 안 된다. 최연준의 성검 발동이 꺼져 있었다. 그의 옆에 매달린 여주인공 여주는 발목을 삐었는지 주저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연준아, 저기… 저기서 더 큰 게 오고 있어! 너라도 가!”


여주가 가리킨 곳에는 키가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오우거 좀비’가 등판하고 있었다.


잠깐, 저건 챕터 3 보스잖아?
지금은 챕터 1의 극초반이라고!


작가가 미쳤거나, 아니면 이 소설의 밸런스가 완전히 붕괴된 게 분명했다. 주인공 일행은 지금 저걸 잡을 스펙이 안 된다. 이대로 두면 주인공은 죽고, 이 세계관은 연재 중단과 함께 소멸한다.

세계가 소멸하면?
그 안에 사는 엑스트라인 나도 끝장이다.


“아, 진짜···! 조용히 살고 싶다고!”


나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통 옆에 굴러다니던 녹슨 쇠파이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최연준이 오우거 좀비의 주먹에 깔리기 직전, 나는 전력으로 질주했다. 주인공의 시야 밖, 즉 ‘카메라 사각지대’를 이용하는 건 엑스트라의 기본 소양이다.


슈슉—.


나는 오우거 좀비의 발목 힘줄을 쇠파이프로 정확히 후려쳤다.


드득-!


단단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오우거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틈을 타, 나는 최연준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악! 뭐, 뭐야? 누구세요?”


최연준이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최대한 무색무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3학년 4반. 죽기 싫으면 저놈 눈에 흙이라도 뿌리시든가.”













## 4. 조연도 아닌, 철저한 엑스트라의 전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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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연준에게 공을 넘기고 뒤로 빠지려 했다. 하지만 오우거 좀비는 이미 나를 타겟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놈의 거대한 손바닥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회피 만렙]의 진가가 발휘됐다. 0.1초 차이로 손바닥이 내 코끝을 스쳐 지나가 지면을 박살 냈다. 충격파로 먼지가 일었지만, 나는 이미 놈의 팔을 타고 어깨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주인공의 성검은 마력 소모가 크지만, 엑스트라의 생존술은 마력이 필요 없지.’


나는 쇠파이프를 오우거의 귓구멍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끄아아악!”


놈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나는 그 반동을 이용해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최연준의 옆에 착지했다.


“야, 멍하니 있지 말고 마무리해. 저거 핵(Core)은 목덜미 아래 3센티미터 지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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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네가 어떻게…?”
“아 몰라! 빨리!”


최연준은 내 외침에 정신을 차린 듯,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 내 방망이를 휘둘렀다. 빛이 번쩍이고, 오우거 좀비의 거구가 드디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 5. 분량 조절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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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종료됐다. 최연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경외감과 의구심이 가득했다. 여주인공 여주 역시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이놈들의 기억에 내가 ‘은둔 먼지킨’로 각인되는 순간, 나는 앞으로 모든 메인 퀘스트에 강제 소환되는 불상사를 겪게 될 것이다.

나는 서둘러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아까 버렸던 파라솔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잠깐만! 이름이라도…!”


최연준이 나를 부르며 다가오려 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나. 빨리. 도망쳐-야 해. 아이고, 무서워. 엄마.아빠.”
“방금 그 움직임은 절대 일반인이 아니었어. 너 각성자 맞지? 이름이 뭐냐니까!”


이름을 알려달라고? 차라리 죽으라고 제사를 지내는 게 더 낫지. 주인공 옆에 있으면 사망 확률이 800% 급증하는데.

나는 골목길 안쪽으로 몸을 숨기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착각하지 마. 난 그냥 완결까지 살아남고 싶은 엑스트라일 뿐이니까.”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일단 저 주인공 놈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일은 옆 동네로 거처를 옮겨야겠다. 거긴 아마 다른 조연들이 시간을 끌어주고 있을 테니, 조금 더 평화롭게 삼각김밥을 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몰랐다.

방금 전 내 활약이 근처에 버려져 있던 누군가의 스마트폰 카메라에 찍혔고, 그 영상이 ‘좀비 때려잡는 편의점 파라솔 녀’이라는 제목으로 커뮤니티에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내 평온한 엑스트라 라이프에 시커먼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 [엑스트라 생존 수칙 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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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주인공의 눈에 띄지 마라.' 만약 눈에 띄었다면, 그것은 이미 당신의 장르가 변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다음번엔 반드시, 기필코, 무슨 일이 있어도 비명 지르며 도망가는 ‘시민 4’의 역할에 충실하겠노라고. 하지만 내 손에 들린 녹슨 쇠파이프는 이상하게도 손바닥에 착 감겨 있었다.


망할.
근육이 기억하는 이 생존 본능이 내 가장 큰 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