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영원

03 내 구역이야 (2)

Gravatar
03 내 구역이야 (2)









   애새끼냐?




   고 묻고 싶었다. 책상에 선 그어놓고 여기까지는 내 영역이니까 넘어오지 마! 라는 것처럼 유치해 보였다. 난 그딴 영역 놀이는 진즉에 졸업했는데. 그러나 그런 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저 손에 있는 도끼로 슥삭 될 것만 같았다. 그의 도끼에는 이미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눈동자는 짜증스러움으로 가득 찬 채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합리적인 예상이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다들 긴장한 여력이다.




   다들 긴장한 상태에서 오직 윤정한만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진짜 미친놈인가?




   “야, 내가 묻잖아. 니들 뭐냐고.”




   우리의 대답을 기다려 줄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 싫증을 내며 되물었다.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니 이번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는다면 바로 썰어버릴 작정인 것 같았다. 이대로 죽고 싶진 않아 나라도 입을 열려던 찰나에 윤정한이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곱다는 인상밖에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등을 보니 듬직하단 느낌이 들었다. 역시 생물학적 남자라 그런가.




Gravatar
“너 우리 옆 학교 애지? 네 이름, 최승철이잖아.”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




   자신을 아는 윤정한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승철이라 불리는 애의 눈에는 힘이 점점 풀리는 듯했다. 우리에 대한 경계를 풀고 있는 거겠지. 근데 보통 자신을 아는 상대가 있으면 더 경계하지 않나? 아무래도 얘도 참 정상인은 아닌 것 같았다. 뭐 이런 아포칼립스에서 정상인이 어디 있겠냐만은. 근데 아직 있는 것 같긴 했다. 겁에 질려 있었던 이석민. 보통 좀비를 만나면 그런 반응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고. 아마 지금도 그는 겁에 질려 있을 거다. 나도 무서운데 딱 봐도 겁 많아 보이는 이석민이 과연 지금 이 상황에서 겁에 안 질려 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래도 오늘 통성명까지 다 한 사이이니 걱정되는 마음에 고개를 살짝 돌려 석민을 바라봤다. 역시나 예상대로 겁에 질려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있었고. 그러나 윤정한은 그런 석민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이런 게 바로 비지니스 관계라는 건가.




   “유명하잖아. 난 윤정한이야. 여기 있는 애들은 내 후배들이랑 방금 만난 친구. 바로 옆 학교인데 좀 친하게 지내보는 게 어때?”

   “싫은데.”




   조금이라도 고민해 주는 척이라곤 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에 윤정한은 미소를 살짝 지으며 말했다.




Gravatar
“그럼 우리 죽일 거야?”

   “니들 손에 들고 있는 거 다 여기에 두고 나가. 그러면 안 죽일 테니까.”

   “싫다면?”

   “죽어야지.”




   아무래도 걱정하던 상황이 지금 벌어지려는 것 같았다. 저 둘은 지금 싸울 작정이다.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둘 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라 딱히 큰 감정이 동요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통성명까지 하고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 윤정한이 죽는 꼴은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최승철이 도끼를 휘두르려던 찰나에 달려들고 말았다. 아마 나는 그 도끼를 겨우 칼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정말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정말 무슨 자신감으로 나보다 체구가 더 큰 사람이 휘두르는 도끼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그렇게 달려들었고 속절없이 그 도끼에 팔이 스치고야 말았다. 다행히 도끼에 찍히지는 않았다. 내 팔에 찍히려던 순간에 최승철이 도끼의 방향을 틀어 스치기만 했다. 그럼에도 도끼에 다친 거라 피는 무서울 정도로 흘러내리긴 했다.




   “하… 씹…… 아프네.”




   최승철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나를 죽일 생각은 없던 모양이었다. 내가 달려들 때 도끼의 방향을 튼 것을 보면. 아마 최승철은 여자에게 약한 남자인 듯했다.




   “뭐야……”




   그런데 여기서 제일 당황하고 패닉에 빠진 건 다친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 윤정한이었다. 겨우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스친 것뿐인데, 뭐 피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바로 순영이가 제 옷을 찢어 지혈해 준 덕에 괜찮았다. 그럼에도 윤정한은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을 하며 최승철에게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죽일 듯이.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지금이 아포칼립스에 빠졌다고 해도 무분별하게 같은 사람들끼리 죽이는 건 아닌 것 같아 윤정한의 앞을 막아섰다. 윤정한은 여전히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그런 고운 얼굴에서 이런 감정도 표출할 수 있구나.




   “왜 이렇게 화가 났어? 다친 건 난데.”

   “너니까……!!!!”




   윤정한은 순간 역정을 내더니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너니까…… 네가 다친 거니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의 행동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왜 이렇게까지 내가 다치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심지어 화까지 내는 것일까. 마치 예전에 만난 적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나의 죽음을 경험하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