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
오늘도 여전히 아침준비로 분주한 석진을 지민이 곁에서 도운다. 지민은 뭔가 곰곰히 생각하는 얼굴로 접시를 닦았다.
"석진이형, 우리 아가씨 말이에요."
"응, 우리 아가씨가 왜?"
"중학교 이후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계시 잖아요.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요? 여전히 사람들이 많은 곳은 무서워하시고."
지민의 걱정은 석진의 걱정이 되었다. 석진은 확실히 이대로 아가씨를 두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준아. 잠깐만 이리 와 봐."
"왜 불러?"
남준은 석진의 부름에 지체없이 부엌으로 걸어들어왔고 석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며 남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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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뭘 하고 하루를 보내지? 태형이한테 놀아달라고 해볼까?"
매일을 집에서 보내는 게 전부니 하루를 보내는 일이 막막하다. 물론 집사들이 있어서 외롭거나 심심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허전한 부분이 있다.
'너 엄마가 널 버리고 갔다며?'
'버림 받은 거네?'
'상종 못할 쓰레기 같은.'
나라고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 나이때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텐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운 좋게 좋은 집안의 딸로 들어와서 사랑을 받고 살지만 이것 또한 나에게 다른 두려움이 된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거니까. 나. 이곳에서조차."
여주의 얼굴에는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깊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여주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여주의 답에 지민이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쏙 내민다.
"아가씨, 잠깐 내려와 보세요!"
"왜?"
"그렇게 계시면 심심하시 잖아요. 빨리요!"
확실히 심심하긴 했으니까. 나는 지민이의 말에 순순히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멀끔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청량미를 뽐내고 있는 집사들이 서있었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야?"
"아가씨, 아가씨도 입어보세요!"
태형이 손에 들고 있던 여자교복 한 벌을 나에게 안겨주고 나를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는다. 교복을 입는 건 두고 두고 피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집사들이 저렇게나 신이 났는데 내 기분때문에 집사들을 내칠 수 없는 일이었다. 교복을 입는다고 꼭 학교에 가는 건 아니니까. 스스로를 다독이며 교복을 입고 나니 묘하게 반가운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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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진짜 청순한 여고생같아요!"
태형은 내가 교복을 입고 거실로 나오는 순간부터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른 집사들도 남 모르게 아빠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교복은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거야?"
"아가씨랑 놀러가려고요,"
"나랑 이걸 입고? 어디를?"
내 물음에 집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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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들과 함께 나온 곳은 인근에 있는 학교근처 였다. 학교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하교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간간히 보인다. 이렇게 학생들이 많은 장소는 나에게 달갑지 않은 장소였다.
"아가씨, 우리 재미있는 거 하러가요."
태형이가 나의 손목을 잡더니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걸음을 옮긴다. 집사들도 뒤이어 내 뒤를 따라온다. 늘 집사들이 하자는대로 움직이던 나였기에 이번에도 군말 없이 집사들을 따랐다. 태형을 따라 도착한 곳은 학생들이 바글거리는 오락실이었다. 요란한 오락기 소리가 그 공간을 낯설고 두렵게 만들었다.
"아가씨, 자랑 자동차 게임해요!"
정국이가 자동차 핸들이 붙어있는 오락기에 동전을 넣는다. 잠깐만 나 이런 거 해본 적 없는데?
"나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냥 운전한다는 느낌으로 핸들을 돌리면 돼요."
정국아. 그러니까 나는 일단 운전을 해본 적이 없단다. 정국이에게 나는 도저히 못 하겠다는 의사를 전하려 했지만 지민이와 태형이가 나를 의자에 앉히는 바람에 나는 생애 처음으로 운전에 도전하게 되었다. 게임이라고 얕보다가 큰 코를 다쳤다. 실제 자동차가 움직일 때 나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와 나를 덮쳐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도로의 모습에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핸들을 이리저리 마구 움직였다. 덕분에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근처 건물을 전부 파괴시킬 기세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정국이는 아주 느긋한 얼굴로 두 손을 채 쓰지도 않고 핸들을 돌리고 있다.
"아가씨, 이러면 게임이 재미가 없잖아요."
얄밉다. 전정국. 얄미워.
"전정국. 다시 해!"
내가 투지를 불 태우며 지민이에게 동전을 넣으라는 눈치를 주자 지민이가 엉겹결에 오락기에 동전을 집어 넣는다. 이차전은 처음보다 안정된 플레이를 펼쳤지만 이 게임에서 이미 신의 경지에 앉아있는 정국이를 쉽게 이길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정국이의 뒤를 쫓는 그림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태형이가 두 손으로 정국이의 시야를 가렸다.
"내가 누구게?"
"김태형, 이거 안 치워?"
태형이의 방해에 정국이는 자신의 페이스를 놓쳤고 나는 자연스럽게 역전승을 했다.
"와! 이겼다."
"앗싸. 아가씨가 이겼다."
"아가씨. 대단해요!"
지민이는 내 승리를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석진은 기뻐하는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남준이는 묵묵하게 박수를 친다. 나는 집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정국이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국이는 웃는 내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환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 디디알이라니 이게 아직도 있어?"
"오랜만에 실력발휘 좀 해볼까?"
태형이와 지민이 사이에 대결구도가 펼쳐졌다. 곡은 베토벤의 교향곡이었다. 태형과 지민의 발이 아주 자연스럽게 hard 모드를 찾아 누른다. 시작을 알리는 노란색 발판을 누르자 화면에 화살표군단이 쏟아졌다. 빠른 템포의 곡에 맞춰 지민과 태형의 발이 악보를 연주하는 것처럼 현란하게 움직였다.
"우와. 대체 얼마나 하면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입을 쩍 벌리고 태형과 지민이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는 중에도 오락실 안의 학생들이 하나 둘 태형과 지민의 대결을 모기 위해 몰려 들었다. 역시 보통이 아닌게 맞는 것 같다. 결과는 둘 다 트리플 에스. 그 게임에서는 나오기 힘든 최고점이라고 말했다.
"에이, 동점이네."
"아가씨, 한 판 더 가능한데 해보실래요?"
"괜찮아. 나는 이거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가씨."
태형이가 나의 손을 잡아 디디알 발판 위로 이끌었다. 주변에 몰려 있던 인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향했다.
"화면에 화살표가 올라오면 그 화살표 방향에 맞게 밟으면 돼요. 아가씨는 처음이니까 한 칸은 제가 맡아드릴게요."
태형이는 자연스럽게 파란색 화살표가 그러진 칸 하나를 손으로 툭 건드렸다.
"그럼 아가씨는 처음이니까 easy모드로 가죠."
지민이가 제일 난이도가 낮은 에이핑크의 미스터 츄를 선택한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골랐을 때와는 달리 화살표가 느리게 화면을 올라온다. 어째 이 편이 더 정신이 없어보인다. 태형이가 맡아주고 있는 파란색 화살표만이 콤보를 만드는 중에 나는 그만 태형이의 손을 밟아버리고 말았다. 미처 참지 못한 태형이의 신음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다.
"태형아. 괜찮아? 미안해. 너무 당황해서."
내가 주저앉아 있는 태형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어 앉아 태형이의 두 손을 감싸쥐자 태형이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내 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본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어디 봐."
내가 태형이의 빨개진 손을 조물거리다 붉어진 부분에 입김을 불어넣자 태형이는 그런 내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는지 시뻘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태형아. 그렇게 아파? 얼굴이 새빨개졌어. 우는 건 아니지?"
"아니요. 아가씨. 저는 더 이상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이 손 좀 놓아주시겠습니까?"
"응? 뭘 못 참는다는 거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형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태형이는 나를 자신의 품에 덥석 안아버린다.
"아가씨가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진짜 사람이 이렇게 인형같이 귀여울 수 있습니까?"
"김태형, 처단."
태형이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윤기의 지시에 의해 다른 집사들에게 양팔이 붙잡힌 채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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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니 허기가 진다. 오락실 근처에 분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분식점 아줌마가 국자로 떡볶이 국물을 젓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분식점이 있었지? 친구라는게 없어서 매일 지나치기만 했지만.
"아가씨, 떡볶이 먹고 갈까요?"
윤기가 분식점으로 향해 있는 내 시선을 알아채고 분식점을 손으로 가리킨다. 그래. 오늘은 교복도 입었고 모처럼 집사들도 함께니까 괜찮아.
"응. 떡볶이 먹자. 배고파!"
"야호! 오랜만이네요."
내가 분식집에 들어서자 집사들도 신이 나서 분식집으로 들어선다.
"아주머니. 여기 떡볶이 10인분만 주십시오."
"아이고. 잘생긴 총각들이 뭐 이리 많이 왔대? 아가씨도 참 예쁘구만."
분식집 아주머니가 집사들과 나를 보더니 손자를 대하듯 예뻐라 해주신다.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예쁘다고 칭찬을 하자 윤기가 기분이 좋았는지 흐뭇한 얼굴이 된다.
"그렇죠? 우리 아가씨, 예쁘죠?"
"민윤기. 그만해."
내가 쑥스러움에 윤기를 말렸지만 이번에는 정국이가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준다.
"왜요? 우리 아가씨가 예쁜 건 사실인데."
"아가씨가 젊은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구만."
나는 어쩐지 아주머니를 마주보기 부끄러워진다. 집사들이라서 잘 해주는 건데.
"아주머니, 제가 떠갈게요. 국자는 이걸 쓰면 되는 건가요?"
아주머니가 홀로 십인분을 옮기는 것이 힘들어 보였는지 석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머니를 거든다.
"형, 저한테 주세요."
지민이 석진을 도우고 정국은 자연스럽게 컵에 물을 담아 나른다.
"이런 건 내가 해야하는 일인데. 미안해서 어쩌나."
"아닙니다. 아주머니. 잠시 않아서 숨 좀 돌리세요."
"잘생긴 청년들이 마음씨도 곱네."
아주머니는 집사들을 제 아들을 보는 것처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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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아 해보세요."
눈 앞에 떡볶이를 두고 멀뚱히 떡볶이를 보고 있으니 윤기가 포크로 떡을 집어서 내 입 앞에 가져다 준다. 나는 자연스럽게 떡볶이를 받아먹고 오물오물 떡볶이를 맛보기 시작했다.
"맛있다."
집사들은 즐거워하는 내 모습에 너도 나도 포크를 집어 들었다.
"형님이 먼저다. 형님 먼저. 비켜라."
석진이 다른 집사들의 포크를 쳐내며 내 앞으로 포크를 내민다. 나는 어미새 모이를 받아 먹는 아기새처럼 떡볶이를 먹는다. 집사들은 내가 떡볶이를 우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아가씨."
"응?"
정국이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나의 눈에 마주쳤다.
"아가씨는 언제까지 귀여울 생각이에요?"
난 갑작스러운 정국이의 질문에 먹고 있던 떡볶이를 뿜을 뻔했다. 정국이의 입은 태형이의 포크에 의해 강제로 봉쇄됐다. 뒤를 이어 지민이도 정국이의 입에 떡을 밀어 넣는다.
"정국이 햄스터 같아."
내가 양 볼이 빵빵해진 정국이를 귀여워하자 태형이는 스스로 자신의 입에 떡볶이를 밀어넣기 시작한다. 태형이의 눈동자는 어느새 나를 향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봐도 칭찬을 원하는 눈길이었다.
"저도 귀엽다구욱."
"김태형, 다 먹고 이야기해!"
"너무 마악."
태형이가 너무 무리하게 떡볶이를 먹은 탓인지 태형이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떡이 삐져나왔다.
"야. 김태형. 얼굴 저리 치워!"
"내 쪽 보지마. 보지 말라고!"
정국과 지민이는 태형의 양 옆에서 서로 태형의 얼굴을 밀어내기에 바빴다. 셋의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웃어버리자 나를 지켜보고 있던 남준과 석진도 서로를 보며 한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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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새 입고 있던 교복과도 정이 들어버린 것 같다.
"아가씨, 오늘 어떠셨어요?"
석진이가 조심스럽게 내 기분을 물어왔다. 오늘은 교복과 조금 가까워 진 것 같다. 학교랑 관련된 모든 게 싫었는데. 이제는 꽤 좋은 기억들이 생겼어.
"많이 좋았어."
즐거운 얼굴로 석진이를 바라보니 다른 집사들도 덩달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앞으로 내가 그날의 기억을 모두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보다 지금은 훨씬 교복이 두렵지 않다. 이게 다 내 곁에 있어주는 소중한 집사들 덕분이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