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물놀이를 다녀온 후에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집사들도 나도 모두 뻗어버렸나보다. 눈을 감고 있어도 햇살이 따가운 걸 보니 아침인데 분명히 충분한 숙면을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 걸까? 돌덩이가 내 몸 위에 올려져 있는 것처럼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아가씨, 아직 일어나시기 전이세요?"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게 지민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 힘조차 없다. 지민이는 내가 아직 잠에 들어있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가씨, 이제 일어나셔야해요. 아가씨?"
지민이가 침대 위에서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심각한 얼굴로 내 이마에 손을 올린다.
"아가씨, 몸이 아프시면 말을 하셨어야죠. 이렇게 열이 많이 나는데. 잠깐만요. 아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아가씨."
지민이가 방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지민이의 목소리가 집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비상사태에요! 아가씨가 아파요! 우리 아가씨가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지민아. 나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지민이를 부르려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천장이 빙 도는 걸 느끼고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이층을 향해 몰려들었다.
"아가씨!"
"아이고. 우리 아가씨."
집사들은 내 침대 앞까지 와서 난리법석을 떤다. 누가 보면 내가 죽을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 같다. 석진이는 다른 집사들을 재치고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아무래도 아가씨가 감기몸살에 걸린 것 같다."
"아가씨가 감기몸살에?"
석진의 진단결과에 자연스럽게 화살은 윤기에게로 향했다. 윤기는 자신을 계곡 쪽으로 몰아세웠던 인물들을 떠올렸지만 그들의 기세에 억눌리고 말았다.
"윤기형 때문에 아가씨가 감기에 걸렸잖아."
"나도 어쩔 수 없이 몰린 거라고."
"다들 떠들지 말고 정국이는 물수건 가져오고 윤기는 약 가져오고 남준이는 따뜻한 차를 끓여와."
석진의 지시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너희 둘은 아가씨를 돌보고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부르고."
"알았어."
지민이와 태형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석진은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가씨, 이렇게 아프시면 제 마음이 찢어져요."
지민이는 끙끙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쥐었다. 태형이는 내 이마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댔다가 열이 오른 것을 느끼고 안절부절 못한다.
"이거 구급차라도 불러서 병원에 가야하는 거 아냐? 우리 아가씨 이러다가."
태형과 지민이 서로를 심각한 얼굴로 마주본다. 지민은 홀로 상상속에서 아가씨의 장례식까지 다녀와서는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건다.
"여기 응급환자가 있어요. 네. 우리 아가씨가 많이 아파요."
"아니, 지민아. 제발 그만."
"우리 아가씨 몸에서 열이 막 나고요."
"열이 나는 정도가 아니야. 불이 날 것 같다고."
나는 지민이를 말리기 위해 목청을 높혔지만 태형이는 지민이의 곁에서서 한 술 더 뜬다. 결국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워 지민이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아.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집사들이 오해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냥 끊어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아가씨, 병원에 가셔야한다고요."
"구급차에 실려갈 정도로 아프지 않아. 그냥 단순히 감기몸살이니까 그냥 쉬게 해줘."
지민이는 내가 아픈 모습을 보는게 정말 힘들어 보였다.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요. 아가씨가 죽으면 저는 못 살아요. 아가씨."
"지민아. 나는 괜찮아. 태형아. 지민이 데리고 밖에 좀 나가있어 줄래?"
지민이와 있다가는 병이 더 도질 것만 같아서 태형이에게 부탁을 하자 태형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 강제로 지민이를 끌고 나간다. 지민이의 칭얼거림이 겨우 멎었을까. 그나마 좀 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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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물수건과 물통을 든 정국이었다. 정국은 아가씨가 잠 들어 있다는 걸 확인하고 곁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수건을 정성스럽게 짜서 예쁘게 접어 아가씨의 이마 위에 올리는 정국이의 손길이 분주하다. 정국의 눈동자가 아가씨의 이마에서 눈썹으로 눈썹에서 눈으로 내려온다. 정국의 시야에 아가씨의 입술이 들어왔을 때 정국은 반사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마도 정국이 아가씨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인터넷 검색이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정국이 검색한 것은 감기가 빨리 낫는 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정국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든 것은 지식이늘의 답변의 힘이 컸다.
[여자친구가 감기에 걸렸는데 감기가 빨리 나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미친척 진하게 키스나 한번 해볼까.
답변을 본 정국은 다급하게 핸드폰의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상황을 종결시켰지만 답변에 대한 여운이 남는 모양이었다.
"나도 참. 아가씨를 상대로."
정국이 안될 일이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도 잠이 든 아가씨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쩌면 아가씨라서 가능한 생각일지도."
아가씨의 모습을 바라보는 정국이의 눈길이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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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영향을 끼친다. 일반 사람들은 버림받는다는 일이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물론 친 엄마한테 버림을 받은 건 아주 어릴 적 내 자신에게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그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 그 후에 만난 사람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친엄마에게 버림 받은 뒤에 고아원에 맡겨졌다. 버림받은 상처는 고아원에서의 생활에서도 나를 부적응아로 만들었고 그런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준 것이 그들이었다.
중1이 되던 해에 나는 여전히 고아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고아원 주변놀이터를 홀로 맴돌고 있었다. 버림 받았다는 걸 인정할 때도 됐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매번 엄마가 날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날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어서. 행여나 지나가다 놀이터에 있는 나를 엄마가 발견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늘 내가 버렸던 놀이터를 맴돌았다.
"넌 여기서 뭐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명수오빠였다. 고아원에서도 통 본적 없는 얼굴이라 처음부터 심하게 경계했다. 하지만 명수오빠는 나에게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편하게 다가왔다.
"너 혼자지?"
"
처음에는 놀리는 줄로만 알았다. 내가 버림 받았기때문에 얕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좋지 않은 얼굴로 명수오빠를 마주보자 명수오빠가 나를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혼자인데. 같이 놀자."
혼자라고? 혼자인데 그렇게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어? 거짓말일 거야.
"거짓말 하지 마. 정말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못 웃어."
"진짜인데. 혼자 맞는데. 볼래?"
명수오빠가 꺼낸 사진에는 앳된 남자아이 하나와 젊은 여자와 나이가 들어보이는 남자 한 명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결혼식 사진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있으면서 거짓말쟁이야."
"친엄마가 아니야. 친엄마는 쫓겨났어. 우리 집안에서 그리고."
"
"죽었어."
명수오빠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명수오빠의 눈동자에는 깊이를 어림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이때 이후로 한 번도 못 봤어. 물론 텔레비전에서 종종 보여. 금방 꺼버리고는 하지만."
"그럼 누구랑 있는데?"
"아, 좀 골 때리는 애들이 있긴한데. 그럼 완전히 혼자는 아닌 건가?"
"골 때리는 애들?"
특별히 너한테도 소개시켜줄게. 명수오빠는 고아원 쪽으로 들어가더니 일곱명의 남자를 뒤에 붙이고 왔다. 그들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나의 모습을 살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우와. 귀엽다."
"침 흘리지 마. 우리의 아가씨가 되실 분이시니까."
나에게 가장 먼저 정중히 인사한 건 석진이었다. 태형이는 나를 애취급하다가 정국이에게 타박을 받았다.
"아가씨?"
"나랑 같이 갈래?"
명수오빠가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두가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뒷걸음질 치던 내가 명수오빠의 손을 잡은 이유는 나를 바라보는 명수오빠의 눈동자가 나와 많이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도 너도 혼자하지 말자. 그거 무지 슬픈 거 우린 알잖아?"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매번 놀이터에 나와 있는 명수와 집사들이 등하교길에 많이 봤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 매일 같이 지켜보다 보니 정이 들었고 나에게도 관심이 들어 주기적으로 문의를 했고 결국에 나는 명수오빠의 여동생으로 입양됐다.
"아버지가 오빠한테 후계자 수업을 하래. 내가 강해지고 커지면 이젠 내가 여주의 오빠로서 여주를 책임질 수가 있어. 아버지의 도움 없이도 넌 내 여동생일 수 있는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빠는 나에게 후계자 수업을 위해서 서울로 올라가야한다고 했다. 나를 부산에 남겨 두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오빠들은 일곱 명의 집사들에게 나를 맡겼다.
"여주, 굿모닝!"
"명수오빠!"
"오빠한테 굿모닝 뽀뽀해줘야지."
친남매처럼 다정했던 명수오빠가 떠난 빈자리를 일곱 집사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아가씨, 굿모닝이에요."
"뽀뽀! 모닝 뽀뽀해주셔야죠!"
중학생이 된 내가 부스스한 채로 지민이에게 뽀뽀를 해주면 나머지 집사들도 하나 둘 줄을 서기 시작한다.
"아가씨, 저도 모닝 뽀뽀요!"
"아가씨의 뽀뽀를 매일 받을 수 있다니 행복합니다."
정국이는 볼에 뽀뽀를 받고 난 뒤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 아가씨 입술 다 닮겠네. 내일부터는 이 민윤기가 아가씨의 굿모닝 뽀뽀를 담당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매일 아침 싸우는 집사들 때문에 일곱 집사들 모두에게 굿모닝 뽀뽀를 했다. 잠들 때 또한 다 같이 내가 잠들때까지 곁을 지켜줬다. 집사들이 있었기에 내 주변은 늘 시끌벅적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의 나이가 된 지금은 자연스럽게 뽀뽀 행사가 사라졌지만 일곱집사들은 여전히 매일 아침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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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
"네? 아가씨 뭐라고요?
정국이는 한창 아가씨를 간호하고 있던 중에 아가씨의 웅얼거림을 자세히 듣기 위해 아가씨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가씨는 잠결에 정국의 목을 감사안에 정국이의 입술에 뽀뽀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아가씨는 한창 과거의 아침에서 굿모닝 뽀뽀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가씨의 꿈속을 알리가 없는 정국이의 두 눈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촉촉한 아가씨의 입술이 자신에게 맞닿은 순간 정국의 머릿속에는 '미친척하고 진하게 키스나 한번.'이라는 지식인의 답변이 떠올랐다. 정국이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무너져버렸다. 정국은 역으로 아가씨의 입술을 덮쳤다. 말캉한 감촉과 함께 황홀한 키스가 이어지고 정국이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짧은 시간 달콤한 꿈 같았다.
"아프지 마세요. 아가씨."
곤히 잠들어있는 아가씨의 머릿결을 넘겨주던 정국이의 눈길이 애달프게 아가씨의 곁을 맴돈다.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저는 얼마든지 나쁜놈이 될 수 있어요."
이게 아가씨에게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라는 것도 잘 알아요. 그냥 혼자서만 가지고 혼자서만 아끼고 혼자서만 키워나갈게요. 그 정도는 괜찮겠죠? 아가씨의 손을 꼭 맞잡은 정국이의 두 손에서 정국이의 애틋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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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들의 희생적인 간호와 보살핌 속에서 나는 반나절만에 감기몸살에서 해방 되었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가 죽는 줄 알았어요. 다시는 아프지 마세요. 아가씨."
"아가씨가 아프시니까 집안에 활기가 없었어요. 마음 소깅 공허한게."
지민이와 윤기가 내가 아팠던 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에게 주절거린다. 분명 나는 다 나았는데 어째서인지 내 감기는 나를 간호하던 정국이에게로 옮겨가버렸다.
"정국아. 너 아가씨한테 감기 옮은 거 아니야?"
윤기의 물음에 정국이를 바라보고 있던 태형이 설마하는 마음으로 정국이에게 다가가 정국이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한다.
"너 설마 한 번 더?"
"미쳤냐? 떨어져! 형이랑은 한 번도 싫어!"
태형의 입에서 한 번 더?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정국은 태형과의 공포스러운 키스를 떠올리고 몸서리를 치며 태형에게서 떨어져나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정국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태형이 평소와 다르게 예리한 눈빛을 빛낸다.
"뭔가 수상하다는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