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도무지 ‘놔 달라’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못 잡겠다. 내가 하민이를 힘으로 어떻게 이겨!! 여기서 벗어나려면 쟤가 날 놔주는 것밖에 없다고.
“…. 나 좀 숨 막힌다.”
“앗”
다행히 하민이는 순순히 힘을 풀고 나를 놓아주었다. 애처롭던 목소리와는 달리 울고 있지는 않았다.
그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복복복 쓰다듬고 말았다.

하민이는 눈을 끔벅거리면서 저항 없이 쓰다듬을 받고 있었는데, 진짜 무해한 소동물 같았다. 근데 이제 하악질을 하면 주변이 초토화가 되는….
근데 소(小)라기엔 쟤는 너무 큰 것 같은데, 대(大)동물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 좀 듣고 싶은데, 우리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할까?”
혹시 양아치가 선량한 학생을 끌고 가는 듯한 대사처럼 느껴졌다면…. 그냥 기분 탓이라 말해주고 싶다.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자, 하민이는 머쓱한 듯 시선을 피하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와…. 되게 귀엽…. 아아니, 일단, 여기서 나가면-”
…. 방금 앞에 좀 이상한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쿠구궁-’
“흐아악!! 뭐야아악!”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큰 소리와 함께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머리 위로 떨어지자, 나는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하민이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겨우 떼어냈던 하민이에게 이번엔 내가 매미처럼 달라붙은 셈이니, 웃긴 상황이 아닐 수 없지만—
‘혹시 이 건물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덮쳐오자, 웃을 여유조차 사라졌다.
“무, 머, 먹, 뭐야. 여기 무너지는 거야? 어디 뭐가 터졌나? 우리 테러당한 거야? 노려졌나? 돌더미에 깔려 죽긴 싫어어억!”
“형, 진정 좀 하시고요—”
흔들림은 금세 멎었고, 천장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난리 친게 민망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지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하민이에게서 슬그머니 몸을 뗐고, 민망함과 함께 귓가에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랐다.
다행히 하민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나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 형”
“…. 왜?”
“좋은 소식이랑 안 좋은 소식 있는데 어떤 거부터 들으실래요.”
“아아! 그루지 마아아…. 불안하게 왜구래액….”
이런 대사, 영화에서 들으면 대부분 안 좋은 상황이 대부분이던데? 클리셰 가득한 말에 나는 하민이 팔을 붙잡고 방방 뛰며 앙탈을 부렸다.
근데 저거 저거, 입꼬리가 살짝 부들부들 떨리는 거 보니까…. 지금 웃음 참는 중이냐? 그렇다면,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은 기대해봐도 되겠지?
“…. 보통 나쁜 소식을 먼저 듣고 좋은 소식을 들어야 결과가 좋더라.”
“저희 여기 갇힌 것 같아요.”
“하나도 안 좋잖아!!!”
클리셰가 나를 배신했어!! 뭉크의 ‘절규’도 지금 내 심정에 비하면 평화로운 환호일 것이다.
생각보다 더더욱 참혹한 말에 머리를 감싸쥐고 무릎을 꿇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민이가 한 쪽 무릎을 굽혀 앉아 내 등을 토닥거려주며, 나중에 듣기로 한 좋은 소식을 읊어주었다.
“걱정하지 마요. 나 여기 나가는 길 알아요.”
“지, 진짜…? 그럼, 문제없는 거네?”
“근데 아까 제가 해치웠던 거 비슷한 게 튀어나올지도 몰라요.”
“문제 있네!!”
“딱 붙어서 따라와요. 같이 있으니까, 지켜줄 수 있어.”
어깨를 토닥거리던 손이 잡고 일어서라는 듯 내게 내밀어졌다. 불안한 눈빛으로 하민이와 그 손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하민이의 손은 키만큼이나 크고, 굳은살이 박여 단단했다. 돌을 만지는 듯한 촉감이었다.
“아, 맞다. 이건 호신용으로 갖고 있어요.”
그는 허공에서 갑자기 큼지막한 총을 꺼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 건넸다.
갑자기 나타난 무기에 흠칫했지만, 이제는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나도 이제 초현실적인 일들에 슬슬 익숙해져 가고 있는 걸까.
저건 마법인 걸까? 벽장 안에 살던 소년이 ‘넌 마법사란다.’라는 소리를 듣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소설이 떠오른다.
“…하민아. 너 혹시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 할 줄 알아?”
“그거랑 장르가 달라요.”
“아하.”
보고 싶었는데 까비.
호신용 무기도 챙겼으니, 이제 가자며 발걸음을 옮기는 하민의 뒷모습을 보고 나도 깜짝 놀라 뒤따라갔다.
오후의 지하철역이라면 원래 사람들로 북적이고 이런저런 소음이 들려야 할 터인데, 지금은 반대로 싸늘한 침묵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어 상당히 기괴하게 느껴졌다.
부조화라는 단어를 몸으로 체험한다면 이런 느낌이겠거니 싶을 정도로.
“아까 설명해 준다는 거, 걸으면서 얘기해도 할까요?”
“응!!”
조용한 지하철역 안에서 발소리만 또각또각 울려 무서워질 때 쯤이라, 그 말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에 긍정하자, 하민이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 팔짱을 끼고 턱을 문질렀다.
“막상 설명하려니,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 형이 날 기억하는 것부터가 예상외였거든요.”
“그럼 내가 질문해도 돼?”
“응, 그게 낫겠다.”
내가 궁금한 걸 묻고, 하민이 그에 답하는 형식으로 설명을 이어가기로 했다.
궁금한 건 산더미였고,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바로…!
“너 마법사야? 막 오블리비아테[해리포터에 나오는 기억 제거 마법] 같은 거 써서 주변 사람들 기억을 지웠는데, 나만 마법이 안 통한 상황? 그러면 나도…. 사실 숨겨진 혈통의 마법사? 그런 클리셰?”
“…. 참…. 형다운 질문이네요.”
“…. 그거 욕이야?”
“아뇨, 형 귀엽다고요.”
자기보다 키가 작다고 은근히 날 동생처럼 대하는 것 같은데, 기분탓이겠지? 형을 귀여워하는 동생이 어디있어!
“그럼 너는 뭐야? 사람은 맞아? 춘옥이 누님이 너보고 귀신은 아니라던데.”
“…. 형이 그분을 어떻게 알아요? 그 사람이 보여요?”
“어? 응, 어쩌다 보니….”
하민은 내가 귀신을 본다는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랬다. 마치 상상도 못한 걸 맞닥뜨린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놀란 얼굴이 약간 귀엽다고 느껴졌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런 적?”
“그런데 혹시, 형은 외계인이 있다고 믿어요?”
방금 말 돌린 건가? 내 질문을 자연스럽게 돌려서 다른 말을 꺼내는 하민이의 말에 눈을 끔벅였다.
일단, 지금은 모른 척하고 그의 질문에 집중했다. 꽤 흥미로운 주제였으니까.
“너 외계인이야?”
“테라…. 그러니까, 지구 밖에서 오기는 했죠.”
“!! 지, 진짜?”
어릴 적 망상 속 단골소재였던 ‘외계인’이라는 주제가 진짜 실존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처한 상황과는 다르게 눈이 반짝여졌다.
하민이가 외계인? 진짜? 리얼? 혼또니?
걸음을 멈추고 하민이의 주변을 뱅뱅 돌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민이는 내 모습을 보고는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겉보기엔 지구인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외계인들도 다 인간처럼 생긴 거야?”
“아뇨, 그렇진 않아요. 겉모습이 닮아 보이는 건…. 우리들은 나름 지구에서 기원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나저나, 의심 한 번 안 하고 바로 믿으시네요?”
“지금까지 겪은 걸 생각하면 의심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오히려 외계인이라는게 지금 일어나는 상황에 신빙성을 줬어.”
그런데, 방금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지구에서 기원’ 됐다고? 나의 상상력을 매우 매우 증폭시켜 주는 흥미로운 주제에 눈에서 별이 나갈 지경이었다. 공상과학에 흠뻑 빠진 어린이가 된 기분이랄까.
“나만 외계인은 아니에요. 사실 형도 나랑 같으니까.”
“…. 나? 내가?”
“응. 카엘룸이라는 외계 차원 출신이었어요. 형은.”
머릿속에서 사실 나는 주워 온 자식인 건가. 어릴 적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엄마의 말은 사실 진실이었고 외계에서 불시착해서 홀로 남겨진 아기를 주워다 길러준 건가? 이 나이 돼서야 귀신을 볼 수 있는 건 인간으로 살아가다 머리를 크게 다치고 인외의 힘을 뒤늦게 각성한 그런 케이ㅅ
“이상한 상상하지 마세요.”
“…. 내가 무슨 상상 했는지 어떻게 알아?”
“표정에 다 보여요. 걱정하지 마요. 지금 형 가족들은 진짜 친가족이 맞으니까. 내가 얘기한 건, 형의 전생 얘기예요.”
내가 전생에 외계인이었다고?
생각지도 못한 주제에 다시 한번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우리는 곧이어 침묵 속에 묶여버렸고, 하민이는 약간 쓴웃음을 지으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영혼이 여러 갈래로 깨진 거예요. 부서진 영혼 파편 하나가 지구에서 새로 태어났고, 나는 그걸 쫓아 여기로 왔죠.”
조각나버린 영혼이 환생한 거라고…?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심장께로 갖다 댔다.
언제나 건강하게 뛰는 심장박동이 괜히 심란하게 느껴졌다. 현재의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인 것 같아서.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 좋아. 이해했어.”
“정말요?”
하민이는 다행이라는 듯, 기쁜 표정을 지었—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나를 조종하는 내가 아닌 나이기에, 지금 내 모습은 진짜의 내가 조종하는 나의 모습임으로, 내 인생은 지금 연기자들로 연출된 가상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트루먼 쇼라는 거지?”
“형 내 말 하나도 안 들으셨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