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우진아. 너 회사는 좀 어때? 다닐만하냐?”
“그냥... 좀 그래. 합격 문자 받을 때까지도 몰랐는데 우리 부서에 ‘걔’ 있거든. 알기만 했어도 거기 지원 안 했지.”
“헐, 미친. 그 미친 자식이? 야, 너 그냥 때려치우고 우리 학원 올래? 수학 자리 하나 남는데.”

“... 그래야 되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김동현 그 자식을 거의 매일 보고 있자니 화도 나고 속도 상하고 있지만, 왜인지 그를 보는 것이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고 끝마치는 데에 꼭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그와 헤어진 지 5년 정도 됐지만 아직도 그의 말투, 행동 같은 모든 것들이 그동안 너무 그리웠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봐도 나는 너무 이기적이지만 그와 다시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든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면서 끝난 우리인데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나는 지난 5년간 은근히 김동현의 흔적을 많이 지우고 나만의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회사에 들어가고 김동현을 다시 만나면서 헤어진 직후의 그 슬프고 분한 감정이 다시 치밀어 올랐던 것 같다. 이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그를 떠올리는 일이 없는 그런 평범하고 활기찬 하루를 보내고 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어째서 이리 침울하고 불행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아, 맞다. 우리 영화나 볼래? 이번에 나온 거 중에 엄청 재밌다는 거 있던데. 그냥, 기분 전환 좀 할 겸.”
“미안하지만 아니. 영화관 너무 어두워서 싫어해.”
“아, 맞다. 그러면 놀이공원 갈래?”
“거긴 사람이 너무 많아. 그냥 니네 집에서 계속 놀면 안 돼? 여기가 좋단 말이야-”
“그러면 그렇게 하지 뭐. 아, 근데 한 시간 정도 뒤에 아는 사람 올 거야.”
아는 사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구냐고 물었다. 대휘에게서 전웅이라는 짤막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누구더라.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한 가지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휘가 왜 전웅을 만나? 순간적으로 내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전웅. 학창 시절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났던 인간 아니던가.
나는 학창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해왔다.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나와 친구를 하려는 아이도 없었음에 더불어, 내가 친구를 사귀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어릴 적에 책을 읽는 것을 되게 좋아했기에 쉬는 시간만 되면 도서관으로 뛰어갔고 학교가 끝나면 엄마를 도와 시장에 나가야 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엄마를 대신해 술에 취해 있는 아빠를 상대해야 했고 새벽에는 학교 숙제를 하느라 바빴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는 아이들의 조롱마저도 눈치채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내가 4학년일 때부터는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나를 싫어하는구나. 그것도 엄청 많이. 나는 그저 아이들의 조롱 속에서도 내 할 일을 찾아 열심히 했던 것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무시할 수 있었던 조롱은 폭력이 되어 내 얼굴에 직접적인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그것 또한 괜찮았다. 상처는 금방 아물기에.
그러다 5학년이 되어 전웅이라는 작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잘났지만 오만했고 입을 열 때마다 -자연스럽게 인상이 구겨질 만큼- 욕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나와 정반대였다. 나는 그가 싫었다. 한 학년 높은 그가 계속해서 내 반까지 찾아와 시비를 걸며 가뜩이나 없는 돈을 뜯어내고, 내 시간이나 빼앗아갔다. 나는 그 모든 게 아까웠고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주길 간곡히 빌었다. 하지만 그딴 소원이 이루어지기엔 나는 너무나도 가진 것이 없었다. 재력, 힘은 물론이고 모두가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행운조차도.
나는 그를 만나게 된 이후, 무력한 내가 싫었다. 돈이 없는데도 술이나 처마시며 손찌검을 해대는 내 아비도 너무 싫었다. 전웅은 내가 어떠한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미친듯이 열심히 산다는 것을 택하였지만 그것은 내게 단 하나의 도움도 주지 않았다.

“야, 박우진!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내 말이 들리지도 않냐?”
“아, 미안.”
“곧 전웅 오니까 나 과자 좀 사올게. 티비나 보고 있어.”
“어, 조심히 다녀와.”
그냥 도망이나 갈까. 아니지, 내가 피해야 할 이유가 어딨어. 하지만 그냥 만나기에는 나는 아직 무서웠다. 전웅보다 잘 살아서 복수하려고 했는데. 나는 아직 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만큼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는데. 아직도 그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이런 생각으로 그와 나를 아직도 비교하고 있는 나에 분해 이를 아득 갈고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아온 거지? 스스로가 너무 답답했다.
똑똑- 대휜가? 아니다. 대휘라면 문을 열고 들어왔을 거고 아직 대휘가 나간 지 10분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이 노크의 주인은 단 한 명, 전웅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쥐고 현관 쪽으로 다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 뭐야. 야, 여기 대휘네 집 아니야?”
“맞는데 대휘 과자 사러 잠시 나갔어요.”
“아. 근데 누구? 혹시 대휘 남친?”
“아뇨, 친구...”
“아, 그러셔? 그러면 눈치 없게 데이트하는데 끼지 말고 빨리 집에나 가시지? 난 대휘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아- 진짜. 도대체 대휘는 무슨 생각으로 저 싹수없는 놈을 만나는지 모르겠다. 대휘 성격상 싫은데 싫은 티 못 내고 만나주는 거 같기는 한데.
그건 그렇고, 얘 지금 나 기억 못 하는 거야? 그렇게 괴롭혀놓고? 나만 너 때문에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았고, 복수심에 화가 들끓고 속이 타들어갔구나. 너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데 나만.

“진짜 기분 개같네...”
단지 지금 이 상황이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고, 전웅과 함께 있으니 불안해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소리였다. 정말이지, 악의는 없었다. 나는 이 말을 뱉고도 한 5초 동안은 뭐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속으로 뱉은 말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번 화 글자 수: 2921자
역시 시험은 글태기도 극복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무려 ‘아는 사람?’부터 지난 주 월요일에 쓰기 시작한 거랍니다...~
앞으로는 더 부지런히 글을 쓰는 달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