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하반기 메인 캠페인 마지막 촬영 날.
새벽부터 스튜디오는 분주했다.
"조명 체크 완료."
"의상 준비됐습니다."
"메이크업 들어갈게요."
김여주는 태블릿을 보며 동선을 확인했다.
"촬영은 예정대로 갑니다."
"지연 없이 끝내겠습니다."
"네."
언제나처럼 빈틈없는 지시.
그런데.
"...콜록."
작게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여주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대기실 앞.
해찬이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하고 있었다.
'감기인가.'
잠깐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첫 번째 촬영.
"좋습니다!"
"한 컷 더!"
평소 같으면 누구보다 에너지가 넘칠 해찬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컷이 끝날 때마다 숨을 고르고,
물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괜찮아요?"
포토그래퍼가 묻자.
"네."
웃으며 답했지만.
김여주는 금방 알아챘다.
'컨디션이 안 좋네.'
-
점심시간.
김여주는 회의실에서 혼자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후.
대기실 앞을 지나는데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해찬과 매니저의 대화가 들렸다.
"열 아직 안 떨어졌네."
"...괜찮아요."
"병원이라도 갈래?"
"오늘만 끝나면 쉬면 되죠."
"이 정도면 촬영 미루는 게..."
"안 됩니다."
잠시 침묵.
"이 캠페인."
"김부장님이 몇 달 동안 준비한 거잖아요."
"
"제가 컨디션 때문에 일정 미루면 제일 싫어하실걸요."
김여주는 걸음을 멈췄다.
문을 열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오후 촬영.
예상대로 해찬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잠깐 쉬었다 갈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촬영은 계속됐다.
김여주는 모니터를 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10분 쉽시다."
스태프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
"부장님?"
"휴식 후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짧고 단호했다.
-
휴게실.
해찬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탁.
눈앞에 작은 봉투 하나가 놓였다.
"...?"
고개를 들자 김여주가 서 있었다.
"죽입니다."
"
"속이 비어 있으면 약도 못 먹습니다."
해찬은 멍하니 봉투를 바라봤다.
"김부장님이..."
"
"직접 사 오신 거예요?"
"...근처에서."
짧은 대답.
해찬은 괜히 웃음이 났다.
"저 지금 감동했는데."
"...감동까지 할 일은 아닙니다."
"아니."
해찬은 봉투를 꼭 쥐었다.
"엄청 감동인데."
김여주는 시선을 피했다.
"...빨리 드세요."
"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김여주가 덧붙였다.
"오늘은 무리하지 마십시오."
"
"브랜드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해찬은 한동안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의 박수가 터졌다.
모두가 하나둘 철수 준비를 시작했다.
김여주도 노트북을 챙기려는데.
뒤에서 해찬이 불렀다.
"김부장님."
"...네."
"잠깐만요."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이건?"
"비타민이에요."
"
"저희 어머니가."
"항상 바쁜 사람 있으면 챙겨 주라고 하셨거든요."
김여주는 봉투를 바라봤다.
"전 괜찮습니다."
"거절하지 마세요."
해찬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제가 고집 좀 부릴게요."
잠시 침묵.
결국 김여주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해찬은 활짝 웃었다.
"처음이다."
"...?"
"김부장님이 먼저 감사합니다 한 거."
"
"...많이 했습니다."
"저한테는 처음이잖아요."
그 말에 김여주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후."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해찬도 따라 웃었다.
그때.
멀리서 둘을 지켜보던 직원 한 명이 중얼거렸다.
"저 두 사람..."
"분위기 많이 달라졌는데?"
-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김여주는 소파에 앉아 가방을 정리했다.
안에서 작은 종이봉투가 나왔다.
'비타민.'
무심코 열어 보니.
안에는 비타민 한 통과 함께 작은 메모가 들어 있었다.
'김부장님도 가끔은 본인부터 챙기세요. 늘 고생 많으십니다. - 해찬'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김여주는 한참 동안 그 메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성과가 아니라,
자신을 걱정해 준 건.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해찬]
오늘 죽 맛있게 먹었습니다. 덕분에 끝까지 잘 버텼어요. 감사합니다.
김여주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답장을 입력했다.
다행입니다. 푹 쉬세요.
보내기 버튼을 누른 뒤.
문득 자신의 답장을 다시 읽었다.
평소 같으면.
절대 보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
그리고 같은 시각.
휴대폰을 확인한 해찬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건."
"조금 가까워진 거 맞지?"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몰랐다.
마지막 프로젝트 종료와 함께.
둘의 관계를 완전히 뒤흔들 소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 5화 끝 (최종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