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락- 오색찬란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정리하던 남자의 손이 순간 멈칫한다.
"차학연.. 이 녀석 당한 모양인데?"
남자의 말에 성열이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투로 말한다.
"차학연은 틈이 너무 많아. 그렇게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에 흔들리지 말라고 해도. 그 틈 때문에 매번 일을 그르치고 말지."
"어찌됐든 그렇게 놔둘 순 없는 거잖아? 차학연도. 김명수도."
"하아.. 알았다고. 내가 나서면 될 거 아냐."
성열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색색의 물약 중에 하나를 집어 들어 들이마시자 성열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마지막 하나의 물약까지 보기 좋게 진열해둔 뒤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나도 이제 슬슬 움직여볼까."
"김명수!"
윤기와 석진의 말을 듣고 곧장 초이스 반 교실로 뛰어가는 길에 불안정하게 휘청 이며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무작정 달려 나가는 명수를 발견한 택운이 빠른 몸놀림으로 명수의 뒤를 쫓는다.
"김명수!"
'끼이익-'
오래된 쇳소리와 함께 옥상 문이 열리고 명수가 비틀대는 걸음으로 옥상의 난간위에 올라서려는 순간 택운이 그런 명수를 팔로 감싸 난간 밑으로 끌어내린다.
"이거 놔...."
"김명수..! 정신 차려! 네가 원하던 게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끊는 건 아니었잖아."
택운의 말에 명수가 온전히 돌아온 정신으로 택운을 본다.
"정신 차렸으니까 그만 놓으라는 이야기야."
자신의 몸을 바닥에 깔고서 자신의 양 팔을 속박한 채 내려다보고 있는 택운의 모습이 영 꺼림직 하다는 표정을 짓는 명수다.
"대체 왜 뛰어내리려고 한 거야?"
"아주 독한 녀석을 제자로 뒀더군. 하마터면 당할 뻔했어."
"독한 녀석..?"
명수의 입에서 독한 녀석이라는 말이 나오자 택운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태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태형이 녀석이 김명수를 잘 막아낸 건가.
"그것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네가 왜 어둠의 초이스에 들어가야 했던 거고 손나은 선생님은 왜 어둠의 초이스 녀석들과 관계가 있었는지 설명 좀 해보라고."
택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명수가 다소 굳어진 얼굴로 택운을 보며 심각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여자가 어둠의 초이스 녀석들이랑 관련이 있다니..?"
"이래서 차학연을 보내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거야."
명수의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방금 전 명수가 올라서려고 했던 난간 위에서서 명수와 택운을 내려다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목소리로 말하는 성열. 갑작스러운 성열의 등장에 택운과 명수의 시선이 성열에게로 향하고 명수를 향해 있던 시선을 택운에게로 옮기며 표정을 굳히는 성열.
"김명수에게 있어서 가장 만나지 말아야할 녀석을 만나게 하다니."
".. 아는 녀석이냐?"
택운이 명수를 보며 묻자 성열이 등장한 그 순간부터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진 명수의 얼굴이 택운의 시야에 들어온다.
"김명수..?"
"김명수, 그 녀석과 가까워질수록 너의 자유는 억압되고 어둠과 같은 현실이 반복될 거야. 난 네가 전 같이 좁은 공간에 갇혀 남은 생을 보내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으..윽.."
"그러니까 어서 네가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와. 김명수."
성열의 말에 명수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한다. 그런 명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택운이 다급히 명수를 붙잡아보지만 택운의 무효화 호르몬이 무색해질 정도로 성열의 말에 괴로워하는 택운. 분명히 성열의 호르몬 때문에 명수가 괴로워하는 거라면 택운의 손이 닿았을때 명수의 고통은 사라졌어야했다. 하지만 명수는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더니 누구보다 절망적인 얼굴로 택운을 본다. 절망에 빠진 명수의 눈동자를 본 택운이 할 말을 잃는다. 그 눈동자를 보는 순간 명수의 마음 속 가득한 절망이 한순간에 택운에게로 전해져오는 것 같아서.. 예전에 자신이 봤던 자유를 갈망하는 명수의 맑은 눈동자와는 너무 달라서..
"너.. 김명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택운이 명수를 붙잡고 있던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열을 보자 그런 택운을 향해 씽긋- 웃어 보이면서 말하는 성열.
"무슨 짓 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너도 눈치 챘을 텐데. 김명수가 저러는 건 내 호르몬의 작용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어째서 김명수가 호르몬의 영향을 받지도 않으면서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있는 거잖아!"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택운이 이를 악물고 성열을 향해 소리치자 성열이 좀 전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순식간에 지우고 택운을 본다.
"이거 왜이래. 김명수의 몸속에 내재된 절망은 우리를 만나기 전부터 그 속에 있었던 것. 나는 김명수의 몸속에 있는 절망을 꺼내는 역할을 했을 뿐 그 절망을 만들어낸 건 내가 아니야. 오히려 그 원인은 나보다 너희들과 지낼 때 생긴 것이겠지."
성열의 말에 택운이 할 말을 잃고 다시금 명수의 앞에 몸을 낮추고 앉아 명수를 향해 말한다.
"김명수.. 너를 그렇게 절망 속에 빠트린 게 뭐야... 호르몬 억제 주사 때문에 계속 줄어드는 생명..? 그게 아니면 호르몬 고등학교에서 속박 당해야하는 일상..? 대체.. 널 그렇게 괴롭게 만든 게..뭐였냐고...."
"김명수, 계속해서 여기에서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전보다 더 좋지 않은 일을 낼 수도 있다는 걸 알아둬."
성열의 말에 명수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열에게로 다가간다.
"김명수!"
택운이 명수의 팔을 붙잡지만 명수는 그 손을 거칠게 쳐낸다. 하지만 택운은 명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금 명수의 팔을 붙잡는다.
"이거 놔..."
"안 놔... 안 놓을 거야. 난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우리를 떠나야했던 이유를 들어야겠어. 뭐가... 도대체 뭐가!!! 오늘처럼.. 우리를 이렇게 갈라놓게 만들었는지.. 알아야겠다고."
택운의 말에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명수가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아..."
"
"내 호르몬 때문에 상처받는 건, 고통 속에 사는 건 나 하나로 족해.. 나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다치게 된다면.. 내가 알 수 없는 사이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나에겐 무엇보다 참기 힘든 일이야..."
명수의 말에 택운의 머릿속에 정국이 했던 이야기가 순간적으로 떠오른다.
"너.... 그날... 봤구나...?"
손나은 선생님이 자신의 생명을 깎아 호르몬 물약을 만드는 모습... 그리고 그걸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그걸 본거구나..?
".... 내가 호르몬 고등학교를 벗어난 것은 그 누구의 영향 때문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었고 나는 이곳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저 녀석의 호르몬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 학교 녀석들을 공격한 것 같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지."
"김명수, 작별인사가 길다."
성열의 말에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택운의 팔을 떼어내려는 명수의 손. 하지만 택운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명수의 팔을 더욱 단단히 붙잡고 명수를 본다.
"김명수.. 돌아와."
택운의 눈을 마주보는 명수의 눈동자가 택운의 진실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흔들린다.
전정국 : 호르몬으로 본 세계.
맑다. 새하얗고 맑은 느낌. 따듯한 푸른 빛. 그 푸른빛과 닮은 새하얀 빛이 보인다. 나는 홀린 듯이 그 새하얀 빛이 보이는 곳으로 걸어 나간다. 새하얀 빛이 보이는 곳에 도달하자 전에 봤던 손나은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만나본적도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자주보니까 꼭 아는 사람 같네. 이것 또한 내 환상 속이겠지. 생각하며 그 여자를 지켜보고 있는데 당황스럽게도 그 여자의 시선은 나에게로 닿아있다. 어라..?
"명수는 내 생명을 자신이 갉아먹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확실히 내 호르몬을 물약으로 만들어준다는 건 내 생명이 줄어드는 것과 같긴 했지만 난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아직도 그 아이를 위해서 해줄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서."
뭐야.. 왜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거야..? 내가 듣고 있든 말든 그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새 그 여자의 손에는 투명한 액체가 든 유리병이 들려있었다.
"난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어둠의 초이스들의 녀석들이 바라는 대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무효화 호르몬 물약을 만들었어. 그 물약과 자유를 명수에게 주는 조건으로. 물론 그 물약을 내가 만들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말이야. “
"이걸 나한테 이야기 하는 이유가 뭐에요?"
내 말에 그 여자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병을 나의 손에 쥐어주며 말한다.
"난 누굴 위해 희생한 게 아니야. 그저 김명수란 아이가 나에게 너무 소중한 제자여서, 그래서 그 아이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모습이 보고 싶었고 도움이 되어서 좋았던 거야. 사람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게 돼. 그 시간이 짧든 길든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던 내 소망에서 나는 내 생명을 명수에게 준거야. 그러니까 절대 남의 생명을 갉아먹는 존재가 아니야. 김명수도.."
그 여자의 검고 맑은 눈동자가 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본다.
"그리고.. 너도."
소중한 사람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생명을 나눠줬다라... 이 여자가 나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나 또한 김명수가 겪었던 상황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럼 역시.. 택운 선생님이 주신 유리병에 든 물약은.... 그래도.. 역시... 내가 택운 선생님의 생명을 깎아내리는 건... 달라지지 않잖아. 택운 선생님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변하지 않잖아.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던 그 여자는 한 걸음 한걸음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를 자신의 품에 안고 내 등을 다독여준다. 어디선가 느껴봤던 익숙한 따듯하고 맑은 기분..
"상처받지 마. 강해져.. 그리고 그 강해진 마음으로 너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 그게 네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야.“
강해져라.. 강해져서..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을...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
'전정국- 태형이 형아 해봐 형아~'
'아미야! 물어!!'
'이젠 하다하다 무효화 호르몬 까지 나오는 거냐?'
'ㅇㅇ이가 그러던데- 나를 보면 녹는다고 그래서 날 슈가라고 부른다네. 하하. 불러봐라 민슈가 형님~'
'어쩐지.. 넌 무효화 호르몬도 아닌데 어색한 느낌이 없는 것 같아.'
'희망을 가져- 희망을! 전정국!'
'당분간은 이걸 먹어. 네 증상이 심화되면 주려고 미리 구해놨던 약이니까.'
'정국아. 네 잘못이 아니야.'
그리고 이 여자와 같은 따듯하고 맑은 기운을 가진 녀석. ㅇㅇㅇ.
'바보 전정국!!'
강해져서 이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지킨다라... 하긴 도망만 간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지. 나를 감싸 안아주는 나은 선생님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은 선생님은 내 미소 하나만으로 내 생각을 다 읽어낸 듯 나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리고 나은 선생님의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빛으로 변하고 그 빛에 눈이 부셔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나는 보건실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냥-"눈 앞에는 새하얀 고양이 아미와.
"정신이 좀 들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태형이 형의 모습이 보인다.
"아.. 응."
그래, 교실 안에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태형이 형이 이곳으로 옮겨준 건가.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내 손에 뭔가 쥐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내 손에 쥐어진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자 내 시야에 들어오는 투명한 액체가 든 유리병. 이거.. 분명... 손나은 선생님이..
"냥-"
내 손에 쥐어진 유리병을 확인하는 순간 아미가 유리병을 두어번 핧더니 재빠르게 보건실을 빠져나간다.
"아미야!!"
태형이 아미를 쫓아나가려다가 보건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학연과 ㅇㅇ을 보고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혹시 아미가... 김명수가 있는 곳을 알려주려고 그러는 걸까..? 일단 따라 가보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자리에서 일어나 아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
"아미는 내가 찾아올게. 형은 여기 있어."
"아... 응."
정국의 말에 태형은 얼떨떨한 얼굴로 정국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안도하는 얼굴이된다.
"뭐, 아픈 데는 없어 보이니까 다행인가."
아미를 따라 올라온 곳은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인 학교 옥상.'끼이익-'하는 쇳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에는..
"택운 선생님!"
"전정국...?"
정국의 등장과 함께 택운의 눈은 반사적으로 성열에게로 향한다. 성열의 호르몬은 사람에게 절망을 주는 호르몬, 그런 류의 호르몬은 명수뿐아니라 정국에게도 치명적이다.
"전정국 나가!"
"오호- 좋은 먹잇감. 네가 김명수가 말하던 그 녀석인가?"
자신을 보며 두 눈을 빛내는 성열을 지켜보던 정국이 인상을 팍 구긴다.
"먹잇감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기분 나쁘니까 그런 호칭 따위 집어치워. 그것보다 김명수. 잘 들어. 하루 빨리 어둠의 초이스 녀석들한테서 벗어나. 그 녀석들이 너에게 호르몬 물약과 자유를 준 대가로 손나은 선생님의 생명을 가져갔단 말이야!!"
"손나은 선생님...의 생명..?"
정국의 말에 성열에게로 가려던 명수의 걸음이 멈춰 선다. 성열을 보는 명수의 눈이 매섭게 변한다.
"이성열. 저게 무슨 소리지..?"
"하아... 정말이지. 이것저것 잔챙이들이 일을 귀찮게 만드는군. 김명수 잘들어. 넌 그저 자유만 바라보고 이곳에 온 거잖아. 그리고 넌 이 학교의 속박으로 부터 자유를 얻었어. 그러면 된 거 아닌가?"
"다시 한 번 묻겠어. 나에게 줬던 무효화 호르몬 물약은.. 손나은 선생님의 생명으로 만든 물약인가..?"
명수의 불안한 감정이 명수의 손을 덜덜 떨리게 만든다. 미칠 듯 한 분노와 슬픔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것을 애써 꾹꾹 눌러 담고 성열을 향해 묻는 명수. 그런 명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열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답한다.
"맞아. 하지만 우리가 강요한 일이 아니야. 그 여자 스스로 제시한 조건이라고. 우리도 호르몬 물약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사양할리 없잖아."
"그럼.. 그렇다면.. 이때까지.. 내가.. 마신 물약들은... 내가 더 살아갈 수 있었던 시간들은 모두..."
성열의 말을 들은 명수가 허탈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명수야. 넌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어. 그리고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어. 그렇게 되도록 선생님이 도울게.'
"아.... 안 돼...."
교복을 입고 있는 명수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짓는 나은 선생님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을 생각해내고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는 명수의 눈동자.
'명수야...'
'선생님..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이건..'
'이때까지.. 제가 마신 게.. 선생님의 호르몬 물약이었어요..? 약을 개발했다고 했잖아요.... 호르몬 억제 주사보다 더 좋은 약을 개발했다고 말했었잖아요!!'
'명수야. 선생님 말 좀 들어봐.'
'됐어요. 저 같은 놈은.. 허구한 날 주위사람들한테 독이 되고 말아요.... 다.... 나 때문에... 다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슬퍼한다고요.. 그런데.. 이젠... 선생님의 목숨까지.... 선생님 전 그렇게 까지 살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지 않다고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을... 그랬을 뿐인데..
"상처받지 마. 김명수! 손나은 선생님이 말했어.. 강해지라고... 강해져서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의 행복을 지켜내라고.. 그게..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손나은 선생님이 아직.. 살아있어..?"
명수를 앞에 다가서서 자신을 향해 말하는 정국을 향해 마지막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듯 한 눈빛을 보내는 명수. 명수의 질문에 대답 대신 나은 선생님이 준 유리병을 명수의 손에 쥐어주는 정국이다.
"나은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도 당신이 행복해 지길 바랬어.. 나은 선생님에게 있어서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행복하게 살아줘.. 나은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당신의 뒤를 누구보다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따라 걷고 있는 나를 위해서."
정국에게서 건네받은 유리병에서 맑고 새하얀 손나은 선생님의 기운을 느낀 건지 뚝- 뚝-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는 명수. 유리병을 잡은 명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켜주지.. 못해서...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선생님..."
명수를 지켜보고 있는 택운, 정국 모두가 명수의 슬픔을 한 몸처럼 느끼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성열은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명수를 본다.
"칫- 이쪽은 쓸모없게 된 것 같으니까 차학연 쪽이나 지켜보도록 할까."
푸른색 물약을 들이킨 성열의 모습이 순식간에 난간에서 사라진다.
"박지민은 대체 어딜 간 거야?"
어지러운 와중에 지민이 사라진 걸 알아차린 호석과 남준, 윤기, 석진이 분주하게 지민을 찾아 나서지만 어디에서도 지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지민아! 박지민!"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난 파괴의 랩몬스터!"
지민을 찾기 위해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는 남준, 호석, 윤기, 석진. 그리고 그들이 지민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는 복도의 중앙에는 그들이 그토록 찾고 있는 지민이 주저앉아있다. 자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초이스반 아이들을 지켜보던 지민이 너무 운 나머지 붉어진 눈으로 애써 미소 짓는다.
"ㅇㅇ이가 빨리 날 찾아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지민은 비어버린 복도의 중앙에 홀로 멍하니 앉아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에서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강아지처럼. 오랜 기다림 끝에 느낄 수 있는 그 순간의 따듯한 온기를 기다리며.
학연: 눈물 같은 사람.
그 여자가 어둠의 초이스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시기였다. 자신의 제자 하나 때문에, 그 제자의 자유라는 꿈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순순히 내놓는 바보 같은 여자 였다. 그 여자가 하는 일이라고는 온종일 자신의 무효화 호르몬 물약을 뽑아내는 일이었다. 하루에 정해진 수량을 채우지 못하면 김명수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 버릴 것이라는 조건을 걸어둔 탓이겠지. 이왕 좋은 일 하려면 생색이라도 내는 것이 남는 것 아닌가? 도무지 손해만 보는 일을 하는 그 여자를 감시하면서도 그 여자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우욱-"
여자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그도 그럴 일이 밤낮가리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호르몬 물약을 만들어내니 그럴 만도 했다. 얼마나 볼품없는 몰골이 되었는지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할 때쯤이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다가와서 머뭇머뭇 거리다가 간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검고 맑은 눈동자, 새하얀 피부. 이 여자가 가진 모든 것이 나와는 반대가 되는 것 같아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기..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좀처럼 뭘 부탁하던 것이 없던 그 여자가 나에게 처음 한 부탁. 그 부탁이란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좀 의아스러웠다. 그리고 그 부탁해온 물건을 구해주고 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자는 하루하루를 슬픔에 빠져 살았다. 호르몬 물약을 만드는 것을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 명수라는 녀석 때문에 멈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호르몬 물약 만들기에 지쳐 잠들었을 때 나는 그 여자의 방 휴지통에서 내가 구해줬던 물건을 발견했다. 빨간 줄 두개. 확실히 임신이다. 그 여자의 몸 안에 또 다른 생명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무리하게 호르몬 물약을 만든다면... 그 여자도, 그 여자안의 생명에도 희망이 없다. 그 여자는 그날 이후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웠다. 명수라는 놈이 자신의 아이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는 건가..? 정말이지 끝까지 이해안간다고.. 거기다가... 정말이지.. 신경 쓰이게 만드는 여자잖아.
"뭐..? 의사를 들이고 싶다고?"
"응. 그 여자,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아."
내 말에 물약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는 날카로운 눈빛. 온순하게 생긴 생김새에서 저런 눈빛이 나오는 걸 보면.. 사람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막말로 무효화 호르몬 물약이 많이 나오려면 그 여자, 오래 살아야 하잖아. 저렇게 두면 재산 손실이야. 재산 손실."
내 말에 잠시 혼자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던 그 녀석은 좀 전의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한 개라도 더 만들어내는 편이 우리에겐 좋지. 그렇게 하도록 해."
나는 그 여자의 건강상태를 호전시킨다는 명목으로 의사를 이곳에 출입시키기를 허락받았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그 여자를 살피게 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출산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로 했다. 호르몬 물약을 만드는 것도 그만두게 만들었다. 물론 출산일 까지만. 그 동안은 유리병에 물을 부어 매일 그 여자가 호르몬 물약을 만드는 것처럼 위장했다. 겉모습으로 보아서는 일반 유리병과 다름없는 모습이었기에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 왜 그 여자를 도우고 있는 거지..?"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그 전에 내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정말... 정말 고마워요... 학연씨...'
내 행동에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며 누구보다 행복한 웃음을 짓던 그 여자의 웃는 얼굴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을 뿐.
그 여자는 예정된 날에 아이를 출산 했다. 물론 잠시 어둠의 초이스 녀석들이 없는 곳으로 이동해서 말이다.
"이... 아이를... 저희 엄마에게 전해주세요.. 부탁드려요.. 학연씨..."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갑. 그 여자는 을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난 그냥 그 아이를 그 여자의 엄마라는 사람에게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냥 그 여자의 그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에서 오는 것 같았다.
'응애- 응애-'
"아.. 아니.. 웬 아이가...?"
그 여자의 엄마라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아이의 등장에 놀라는 듯 하더니 그 아이의 옆에 놓인 쪽지를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아이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뭐. 내 할일은 다한 것 같으니까 돌아가 볼까. 그 여자 분명히 좋아해줄 거야.
하지만 상황은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내가 돌아간 그 곳에서 그 여자는... 어둠의 초이스 녀석들 사이에 둘러싸여 침대위에서 잠든 채로 싸늘하게 식어있었으니까. 다른 녀석들은 호르몬 물약 때문에 생명이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여자. 역시.. 자신의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데에 자신의 생명을 다한 것이겠지.. 끝까지.. 다른 사람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여자야. 정말이지... 구제불능..
"뭐야. 차학연, 우냐?"
"
울다니... 깐죽대는 성열의 말에 내 눈가에 손을 가져다대니 촉촉한 액체 같은 것이 만져진다. 어라.., 저 여자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근데... 난 왜 울고 있는 거지..? 그 날은 나에게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괴롭고 슬픈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 꿈이 었나."
눈을 뜨자 내 눈가가 축축해진 것이 느껴진다. 그 때의 꿈... 아직까지도 나에게 영향을 주는 건가. 몸을 일으키자 내 옆 침대에서 잠들어있는 대현, 그리고 그 옆 침대에 잠들어 있는 ㅇㅇ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ㅇㅇ이 잠들어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이성열.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 때의 일을.. 알고 있었던 건가..? 내 손으로 살려낸 아이를 내 손으로 잡아들이라고 하다니 말이야. 쌔근- 쌔근 잠들어있는 ㅇㅇ의 모습을 한동안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랑 많이 닮았네."
그 여자랑 닮은 얼굴을 가진 아이를 내가 그 어둠 속으로 다시 데려갈 수 있을리 없잖아. 그 여자가 죽는 날. 나는 처음에 그 여자를 어둠의 초이스들의 장소로 데리고 들어온 걸 죽도록 후회 했는 걸. 조금 혼나도 어쩔 수 없나.
"박지민은 또 어디 쳐박혀 있는 거야? 호르몬 억제 주사 효력이 다한 거 아니야?"
"그러게. 걱정되게 말이야."
보건실의 문 밖에서 초이스반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이 자리를 벗어날 시간이 다가온 것 같다. 곤히 잠든 ㅇㅇ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한 아빠미소를 지었다.
"잘자. 아가야."
'드르륵-'
학연이 품에 가지고 있던 푸른색 물약을 먹자 문이 열림과 동시에 학연의 모습이 사라진다.
"ㅇㅇ이는 아직 자고 있네?"
"대현 쌤도 많이 피곤하셨나봐. 완전 푹 주무시는데?"
"어..라?"
석진과 남준이 대현의 상태를 살피고 태형과 윤기가 ㅇㅇ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호석은 어느새 비어버린 창가쪽의 침대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돌아간 걸까..?"
학연이 깨어났다면 분명히 ㅇㅇ이를 먼저 노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걸음을 빨리해서 돌아온 건데.. 학연의 얼굴을 떠올리던 호석이 살짝 미소 짓는다.
"뭐-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이제 좀 진정이 돼?"
초이스 교무실 안. 명수가 의자 위에 앉아있고 그런 명수를 향해 향긋한 차를 내밀면서 묻는 택운.
"뭐.. 조금."
택운이 건네는 차를 받은 명수가 한층 진정된 목소리로 말한다. 명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택운이 차를 한 모금 들이킨다. 그와 동시에'드르륵-'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그리고 방금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한 모습의 대현이 나타난다.
"김명수..."
부스스하던 대현의 눈이 명수의 등장에 커다랗게 변한다. 그렇게 한동안 명수를 지켜보던 대현이 빠른 속도로 명수에게 달려가 덥석- 명수를 껴안는다.
"야- 차 뜨겁단 말이.."
그런 대현의 행동 때문에 명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 속 차가 크게 출렁이고 명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현을 본다.
"왜... 이제야 돌아온 거야..."
대현의 원망 섞인 말을 듣고 있던 명수가 대현을 향해 살짝 미소 짓는다.
"미안. 많이 늦었다."
그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택운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어린다.
"김명수, 오자마자 이렇게 꼭 떠나야겠냐."
택운의 틱틱 대는 말에 명수는 배낭을 맨 채 교문 앞에서 멈춰 서서 뒤 따라오는 택운과 대현을 돌아본다.
"손나은 선생님이 나에게 준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호르몬은.."
"살인 호르몬은 걱정 마. 이게 남아있으니까."
명수의 손에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들려있다. 손나은 선생님이 명수에게 준 소중한 시간.
"그럼 다녀올게."
아쉬워하는 대현과 택운을 향해 환한 눈웃음으로 인사를 전하는 명수가 그들을 등지고 걸어 나간다.
"다치지 말고! 여행이 끝나면 꼭 돌아오는 거다!"
대현이 명수를 향해 소리치자 손을 들어 오케이 사인을 보내는 명수. 그런 명수를 지켜보는 택운과 대현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미소가 그려진다.
눈을 떠보니 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ㅇㅇ아! 정신이 든 거야?"
내가 깨어난 것이 감격스럽다는 듯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나를 보고 있는 태형오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태형오빠... 멀쩡해 보이네.. 다행이다... 정말.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태형이 나를 부축해 몸을 일으키는 걸 도와준다. 그러고 보니까 호르몬 물약을 만든 것 때문인지 살짝 어지러운 감이 있기도 하다.
"괜찮아..? 좀 더 누워있자. ㅇㅇ아."
"아.. 괜찮은데.."
내가 괜찮다면서도 어지러워하는 것이 태형의 눈에는 보였던 건지 태형이 강한 힘으로 나를 다시 침대위에 눕힌다. 그리고 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하면서 말하는 태형.
"나는 무효화 호르몬이 아니라서 내 생명을 전해주지도 못해. 그러니까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누워있자. 이쁜아. 오빠 걱정시키면 안 돼."
윽... 태형이 오빠.. 설마.. 내가 입으로 물약을 먹여준걸.. 기억하는 걸까..? 그렇지만 분명이 의식이 없는 상태였는데.. 왠지 부끄러워지는 걸 느끼면서 급하게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재밌는지 살짝 웃다가 다시 내 침대 옆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하는 태형.
"박지민이 사라져버려서. 다들 박지민 찾으러갔어."
"지민오빠가 사라졌다고요..?"
"응, 애들이 찾으러 다닌지도 벌써 반나절이 지났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지민이 사라졌단 이야기에 불현듯 머리속에 떠오르는 지민과의 기억.
'그것보다- 날 알아봐주는 친구가 생기면 꼭 하고 싶은게 있었는데 같이 해줄 수 있어?'
지민이 나의 질문에 더 이상 답하기 곤란한 듯 내 손을 붙잡고 신이 난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초롱초롱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는 지민.
'뭐가 하고 싶은데요?'
내 질문에 내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깍지를 끼워 꽉 잡더니 나를 보며 씽긋- 웃으며 말하는 지민.
'이렇게 손잡고 내가 혼자 걷던 거리를 같이 걸어가기.'
"
'그리고 혼잣말이 아니라 서로서로 대화하기.'
'내가 호르몬 억제 주사의 힘없이 가족들을 만나러 갔을 때... 가족들이 나의 존재를 완전히 없는 사람으로 인식할까봐.. 내가 뻔히 그 가족들 앞에 서있어도 마치 내가 없는 사람처럼 시선하나 주지 않고 지나쳐 버릴까봐.. 그런걸 보게 될까봐.. 그게 너무.. 겁이나..'
설마.. 지민오빠.... 호르몬 억제 주사의 효력이 다되고서도....?
"ㅇㅇ아!! 어디가!"
"지민오빠를 찾으러 다녀올게요."
태형이 나를 붙잡을 틈도 없이 나는 정신없이 지민을 찾아 복도로 달려 나갔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생각하면서도 내가 지민오빠를 알아봐줬을 때의 지민의 행복한 얼굴이 떠올랐다. 지민 오빠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이 학교 안. 그런데도 반나절 넘게 초이스 반 사람들이 지민을 찾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일 것이다. 호르몬 주사의 효력이 다한 것. 그럼에도 지민오빠 스스로가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리는 거야.
"헉...헉..."
어디지.. 대체 어디에.. 교무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부터 지민을 찾다가 초이스 반 부근에 발을 디뎠을 때 초이스반 바로 앞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남학생 한명이 보인다.
"지민오빠!"
내가 지민을 부르자 울었던 건지 붉어진 눈동자로 내 쪽을 돌아보는 지민.
"다들 지민오빠 찾고 있잖아요. 왜 여기에..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거 알면서도.. 여기에 이러고 있냐고요!"
속상했다. 너무 속상했다. 자꾸만 지민 오빠가 혼자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이렇게 지민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을 외로움과 쓸쓸함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 슬픔을 알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내가 속상한 마음에 지민을 향해 소리를 치자 그런 나를 보며 눈물이 맺힌 듯한 슬픈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하는 지민.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네 눈에는 보일 테니까. 넌.. 날 알아봐줄 거니까."
"지민 오빠..."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지민을 보고 있자 그런 나의 손을 끌어 자신의 품속으로 나를 잡아당기는 지민. 그 덕분에 나는 지민에게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난 ㅇㅇ이만 날 알아봐주면 돼."
지민의 머릿속에 태형에게 입을 맞추던 ㅇㅇ의 모습이 다시금 그려진다.
"그러면... 다른 건 어떻든... 난 아무런 상관없어."
ㅇㅇ을 품속에 껴안은 지민이 그 장면을 떠올리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안 되겠어. ㅇㅇ이를 찾아보고 와야겠어."
보건실에 앉아있던 태형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보건실을 박차고 나가려하자 그런 태형의 옷깃을 붙잡는 윤기.
"너 나갔다가 ㅇㅇ이랑 길 엇갈리면 곤란해지잖아. 어차피 학교 안 일 테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그래도 지금 ㅇㅇ이 상태가 어떤 줄 알아?"
태형이 어지러움에 휘청이던 ㅇㅇ이를 떠올리며 윤기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러대자 윤기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태형을 보며묻는다.
"ㅇㅇ이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 어디 다친 거야?"
"그..그건 아니지만."
태형 스스로 상황을 설명하기엔 조금 민망하다. 윤기의 물음에 태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그런 태형을 지켜보고 있던 정국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태형을 본다.
"태형이 형, 갑자기 얼굴이 왜 빨개져? ㅇㅇ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무..무슨 일은 무슨!!"
"어라- 그러고 보니 태형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구마잉-"
정국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한 호석이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킬킬댄다. 그때 보건실의 문이 열리고
"지민오빠 찾아왔어요."
"헤헤- 많이 늦었지?"
등장하는 ㅇㅇ과 지민. ㅇㅇ과 함께 등장한 지민을 발견한 태형이 무작정 지민의 멱살을 들어올린다.
"야!! 박지민- 네 놈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우리 ㅇㅇ이가!"
"아니, 그러니까 왜 ㅇㅇ이가 너네 ㅇㅇ이냐고오!"
지민의 반박에 당황한 태형이 지민의 멱살을 잡았던 것을 놓고 조심조심 수줍게 ㅇㅇ이에게 다가간다.
"몸도 안 좋은데 갑자기 뛰어나가면 어떡해?"
ㅇㅇ을 보는 태형의 눈동자에 걱정스러움이 가득하다.
"미안해요."
그런 태형의 말에 ㅇㅇ이 미안하다는 듯 살짝 웃어 보인다.
"그런 말 듣자고 그런 게 아니잖아."
그런 ㅇㅇ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형이 자신의 품 안에 ㅇㅇ을 꼬옥- 껴안는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ㅇㅇ을 품에 안은 태형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그려진다.
"에~ 둘이 분위기 뭐야- 뭔데~"
"야- 나는 아직 ㅇㅇ이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 이거야!"
"떨어져! 김태형!"
호석은 태형과 ㅇㅇ을 놀리기 바쁘고 윤기는 태형의 등을 툭툭치며 마음의 준비가 안됐단다. 지민은 이를 악물고 ㅇㅇ을 태형에게서 때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태형의 품 속에 안긴 ㅇㅇ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국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윽..."
순간적으로 가슴에 통증을 느낀듯 인상을 찌푸리던 정국이 재빨리 보건실에서 빠져나온다.
"하아... 하..윽.."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정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정국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의 생명이 다하고 있다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 전정국."
정국의 눈동자에 깊은 슬픔이 그려진다.
어둠의 초이스 본부.
'쨍그랑-'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채 벽으로 내팽개쳐지는 학연의 모습이 보인다.
"으윽.."
신음을 흘리는 학연이 널브러진 바닥에 깨어진 유리병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내가... 진짜 호르몬 물약이랑 가짜 호르몬 물약도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나..?"
학연을 향해 한 걸음 한걸음 다가와 학연의 얼굴을 마주볼 정도로 몸을 낮추더니 학연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는 순한 인상의 남자.
"거기다가.. 그 일을 무마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도 그 것마저 망쳐버리다니."
피투성이가 된 학연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열이 학연이 영 안쓰럽다는 듯 그 남자를 향해서 말한다.
"유영재. 그러다가 차학연 죽어. 이제 어둠의 초이스도 우리 셋이 다인데 말이야. 팀 킬은 자제하자고."
"꼴 보기 싫으니까 치워."
성열의 말에 성열에게 학연의 뒷처리를 맡기고 그 어두운 공간을 빠져나와버리는 유영재. 빛이 있는 곳으로 나오자 호르몬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유영재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제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나."
알 수 없는 표정의 영재의 순한 눈동자가 그와 맞지 않게 매섭게 빛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