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질구질하게 헤어지는 방법

Ep. 2 [이유1] 그 여자 이야기


* 모든 이야기는 작가의 허황된 망상입니다. 현실과 혼돈하지 마시길.. 
 ©️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2) 


EP 2.  그 여자 이야기 



윽... 

타는 듯한 갈증에 일어나보니 안방 천장이 보였다.


어제 정국이가 한 눈을 파는 사이
취해버리자는 마음으로 소주를 몇잔 더 들이켜버렸다. 

왠지 나한테 눈길도 주지 않는 그 모습에
섭섭해서 쭉쭉 마셔버렸다. 


혹시나 해서 옆을 쳐다보니 빈 베게만 덩그러니 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넓은 패밀리침대 저쪽에 아이들이 새근새근 자고 있다.. 

정국이가 취한 나를 달래서 여기 눞히고 
나중에 아이들도 재우고 나갔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면서도 

아이들을 생각하는 그의 모습이 애잔했다. 




부스스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어제 내가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이 생각 나면서 
부끄러워졌다가, 

이내 정국이가 내 팔을 뿌리치던 것이 생각나서 
자존심도 상했다. 

나의 자격지심으로 인해 떨어져 지내자고 했는데,
정국이는 이제 절망을 넘어서 화가 난 것 같았다. 

정국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나 싶지만,
나도 나의 삶을 살아야겠다. 



.
.
.



주방에서 물을 한잔 따라 마시면서 둘러보니 

어제 먹고 남은 것들은 정국이가 싹 정리한 듯 
싱크대 옆으로 깨끗히 빤 행주만 널려있었다.  

가스렌지 위에 냄비가 보여서 열어보니
해장 하라는 듯, 콩나물 국이 담겨 있었다. 

예전같으면 다정한 쪽지 한 장이 어딘가에 붙어있을텐데,
쪽지는 없었다. 



문득 연애시절이 생각났다. 





***



유명 브랜드의 잡화부 소속 디자이너였던 나는
가방 디자인을 맡고 있었다. 

우연히 제품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정국이를 만나게 되었었다. 

처음 만난 정국이는 너무 맑고 예뻤다. 

일에 찌들어 사는 나에게 
정국이를 만나는 것은 잠시 현실을 떠나
환상을 만나는 것 같았고,

정국이 또한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는
내 생활에 대해 많이 궁금한 듯,

내가 연락하면 쉽게 답장이 왔다. 


해외투어나 외국 스케쥴로 종종 해외에 나가고, 
앨범 준비기와 활동기마다 생활패턴이 바뀌는 정국이와 

다음 시즌 디자인 시안 준비할 때는 소재 바잉 및 시장조사차 해외에 다니고,
생산 일자 잡히면 다시 현지 공장에 씨름을 하러 다니고..
시즌 초 후 생활패턴이 바뀌는 나는 

그럭저럭 서로의 삶에 대해 공감대가 생겼고,
어느덧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게 되었다. 


정국이는 디자인을 하고 있는 나의 전문성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나는 평소에 피땀을 흘리며 준비해서 화려한 무대에서는 우아한 백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다음 시즌 제품 스케치를 하면,
정국이에게 어떨 것 같냐고 보내주기도 하고,
정국은 새로운 멜로디가 나오면
어떻냐며 나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자주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연인관계가 된 우리는 
다른 연인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꾸준히 오랫동안 연애를 했다. 



내가 바빠지면 자연스럽게 멀어지면서
섭섭함을 토로하던 전 남자친구들과는 달리,
 

정국이는 
나의 일에 대해 불만이 없었고, 
내가 일을 하는 일들을 너무나 지지해줬다. 



나도 정국이가 하는 일들을 존경했고, 
그가 바쁠때, 전화통화 한통 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냥 정국이니까 다 괜찮았다. 


나는 정규앨범 활동이 시작되면 그가 얼마나 애썼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고,
정국이도 우리 브랜드의 새 시즌 화보나 광고를 보면서 내 노력의 결과를 알아주곤 하였다.


이후, 관계가 깊어지자 우리는 시간을 쪼개서 만나기 시작했다. 

해외투어를 위해 출국하기 전에는 
짧에 며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기 위한 시간이 있었는데,
그럴 때 우리는 하룻밤을 꼭 함께 하곤 했다. 

출국 때문에 새벽에 나가야할 때 정국이는 
야근에 지친 나를 조금이라도 더 재워야한다며 굳이 깨우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탁이나 냉장고 곳곳에 정국이가 남긴 쪽지들만 가득했다. 

"누나, 아침 꼭 먹고 가~ 냉장고에 우유 넣어놨어"
"오늘은 편한 신발 신고가~ 발 뒷꿈치 까졌더라"
"아침에 티비보지마, 회사 지각한다..?"


아침에 잠도 많아서 일어나기 정말 힘들어던 정국이인데,
쪽지는 언제 이렇게 써놓고 갔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정국이는 곁에 없지만
마음이 참 따듯했었다. 

.
.
.


***


옛날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기분이 약간 슬퍼졌다. 




왜 그때 일을 그만뒀을까..?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부분이다. 


나의 커리어와.. 나의 삶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우리가 연애하면서 결혼을 약속했을 때만 했어도, 


나는 원래 나의 삶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결정적 사건이 결혼 전에 일어났다.



승진을 꾀하고 있었는데, 승진에서 미끌어졌다. 

근무연차가 더 긴 나를 제치고
의류쪽에서 올라온 어린 애가 차지한 것이었다. 

처음 입사할 땐
가방 브랜드쪽으로 확장할 계획도 있었기에 

이곳에서 가방 입지가 좁은 것 같고 힘들어도,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는데, 

경기가 악화되면서 가방브랜드 런칭은 계속 미뤄졌고, 

의류브랜드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승진에서 지다니.. 

그것도 의류 쪽에서 올라온,
나보다 어리고, 연차도 짧은 애한테 떨어지다니..

나의 쓸모는 여기까지인가...


회사에 오만정이 다 떨어져버렸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정국이를 쫒아다니던 파파라치들 때문에
내가 유명인과 연애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회사 내부의 나에 대한 동정여론도 사그러 들었다. 

물론 같은 부서의 사람들이나 친한 입사동기들은,
내가 연애와 관계 없이 열심히 일한 것을 알아줬지만, 

소문은
원래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르게, 그리고 과장되면서 퍼지는 법이었다. 



정국이는 결혼하더라도
내가 계속 나의 일을 하는 것을 바라는 듯 했지만, 

일단 회사에 대한 노여움이 너무 컸고,

두번째로 기왕 이렇게 된거,
정국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싶었고,

세번째로
남들이 말하는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일에 쏟아부었던 열정 대신
다른 것에 열정을 쏟아부으면,

나의 노여움이, 나의 배신감이 사그라들까.. 



결혼하면서 결국, 사직서를 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정국이의 일이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여겨준 것 처럼



비록 승진에 떨어졌어도,

혹은 내가 하는 일이
정국이처럼 세계적으로 업적을 남지 못 했어도,

내가 하던 나의 일 또한
나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었는데...

그땐 미처 알 지 못했다. 
 


처음 입사해서
디자인실 구석에 처음 내 자리가 생겼을 때,

중고등학교 때 부터 꿈꿔왔던 화려한 디자이너의 꿈을
이룬 것 같아서, 얼마나 뿌듯했던가... 

내가 만든 아가들(제품들)이 

처음 공장에서 샘플로 나왔을 때,
시즌 화보에 찍혔을 때,
매장에 디피되었을 때.. 

그 사랑스러움은 어디로 갔을까... 





차라리 이직을 했어야했다.  




그렇게 커다란 무 중간을 단칼에 잘라내듯 

나의 커리어를 숭덩 잘라버리진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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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