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여주의 원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갑작스레 김여주의 친구 자리를 차지하게 된 나를 권연희가 아니꼽게 생각하는 것 정도야,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을 백번 가져서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나랑 제일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나보다 다른 애랑 더 친한 모습을 보여주면 알게 모르게 살짝 화가 날 수도 있잖은가. 특히나 그 친구가 그 뒤로 나를 신경 쓰는 둥 마는 둥 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김여주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나를 구해준 착한 친구!'라는 수식어가 어울릴법한 사람이겠지만, 권연희의 입장에서는 그냥 내 친구를 뺏어간 애-,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고등학생이 할 법한 생각보단 상당히 유치한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간에, 여기에 내 사정을 조금 섞어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억울하단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이유인즉, 김여주에겐 조금 미안한 소리지만, 나는 김여주와 친하게 지낼 생각이 단 1g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의 절친한 친구 자리라니, 전에도 말했듯 나는 그런 끔찍한 포지션에 점찍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진즉 김여주를 피해 다녔겠지만, 아니, 정말로 피해 다녔지만! 대체 어떻게 안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김여주를 피해 다니는 족족 나를 귀신같이 찾아내는 김여주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닌 게 전부였단 말이다. 게다가-
"좋아, 그럼 20일! 티켓팅 성공할 수 있겠지?"
"당연히 성공해야지!"
"그리고 4일 뒤에 컴백이니까, 앨범은…,"
이유진과 김여주가 세상 둘도 없을 단짝 친구가 된 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라고. 중학교 땐 인사만 하고 지냈다던 이유진의 말이 무색하게도, 단 하루 만에 몇 년간 붙어 다녔다고 해도 믿을법한 우정을 보여준 이유진과 김여주였다. 그래, 내가 이유진의 친화력을 너무 얕봤지, 젠장.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나는 반강제적으로 김여주의 친구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고…,
"…네가 보기에도 나 좀 망한 것 같냐?"
"뭐, 좋게 말해줄까, 아니면 솔직하게?"
"좋게 말해, 제발."

"솔직한 게 좋은 거지. 조만간 권연희가 옥상으로 따라오라 할 듯."
"…너는 그냥 어지간하면 입을 열지 마라."
내 속이 다 뒤집히니까…. 김여주의 친구로 점찍힌 탓에 날 죽어라 노려보는 권연희에 대한 김석진의 소감이 이 정도였으니, 말 안 해도 그 눈빛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예상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래도 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조금 더 세세한 설명을 곁들여보자면, 나는 김여주의 '절친한 친구'가 되는 대신, '잠깐 친했던 친구'가 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한 학기 내내 붙어 다니던 친구 말고, 한 일주일 정도 반짝! 친해졌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 그런 친구 말이다. 김여주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남몰래 고군분투하며 일주일 내로 권연희에게 다시 김여주의 절친한 친구 포지션을 돌려줄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랬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했다.
"…어? 뭐라고?"
"방학 때 뭐 할 거냐고!"
"…갑자기 방학은 왜? 멀었잖아!"
"연주, 잠 덜 깼어? 아까부터 왜 그래?"
눈을 끔뻑거리며 멍하니 서있으니 이제는 내 이마까지 짚어오는 이유진에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내일이 뭐?
"내일이 방학식이잖아! 진짜 왜 그래? 꿈꿨어?"
"…방학식은 7월 23일이잖아?"
"내일이 7월 23일이야."
"무슨 소리야! 어제까지 6월이었잖아!"
"어제는 7월 22일이었지…! 여주야, 안되겠다. 연주 많이 피곤한가 봐, 보건실에다 재우고 올까?"
"응…! 연주야, 자러 가자!"
"아니, 아니! 잠깐만!"
빙의한지 4개월 만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뭐, 우리끼리는 '시간에 공백이 생겼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대충 설명하자면 타임워프와 비슷했다. 소설 전개에 필요하지 않은 시간들은 장면이 전환됨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냥 소설 장면과 장면 사이의 빈 시간은 삭제된다고 보면 됐다. 여태까지는 소설 속에서 나름 중요하게 여겨진 장면들이라 시간에 공백이 생기지 않은 채 24시간이 온전히 지나갔지만, 7월은 아니었나 보다. 여태 일어났던 납치라던가, 싸움이라던가 하는 사건들이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7월은 그렇게 사라졌다.
"어제는 분명 6월이었는데…."

"6월이었지."
"그렇지, 정확히 6월 17일이었지."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김석진과 박지민이 맞장구쳤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7월 22일이고. 전정국도 전혀 안타깝지 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이 돼?!"
"애초에 우리가 소설 속에 들어온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지 않아?"
"인정, 신경 써봤자 너만 피곤하지. 안 그러냐, 전정국?"

"그렇지."
한마디씩 말을 덧붙이는 꼴들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남주인공들이라고, 고작 단역에 불과한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겪었을 이들이다 보니 그럴듯하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 있지-'하는 반응을 달고 살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랬다.
얼떨결에 소설 속에 들어온 것도 '그럴 수 있지-', 고작 고등학생이 납치를 당하는 것도 '그럴 수 있지-', 또 7월 한 달이 그냥 순식간에 사라져서 하루아침에 한 달을 건너뛴 것도 '그럴 수 있지-', 하는 것이었다. 그래, 김석진의 말마따나 머리 터지게 고민해 봤자 피곤한 건 나였고, 손해 보는 건 나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와! 제주도! 나 제주도 처음 와!"
"나도…! 헉, 저기 감귤 초콜릿 팔아! 가서 사 올까?!"
"으음, 집에 갈 때 사는 게 낫지 않아?"
"앗, 그런가?"
"……."
내 여름방학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내 기억 속의 '어제'는 분명 7월 23일 방학식이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날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에 한껏 잠긴 목소리로 방학 첫날부터 왜 이렇게 일찍 깨우냐 투정을 부리다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얘는 개학한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방학 방학 거려? 빨리 안 일어나?!"
"뭐어?! 개학?!"
몸을 벌떡 일으키니 눈에 보이는 건 옷장 문고리에 단정하게 걸려있는 춘추복 교복이었더랬다. 어제가 방학식이었는데?! 미친 건가 싶어 핸드폰을 켜 달력을 보니 9월 15일 날짜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더라. 아, 그렇구나. 나는 지금 7월 23일에서 9월 15일로, 무려 두 달이란 시간을 건너뛴 거구나. 응, 그렇구나-,
"진짜 존나 억울해."
-하고 넘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방학식 바로 다음날이 수학여행 첫째 날이 된 경우에는 더더욱.

"나름 재밌지 않아?"
"대체 뭐가…."
콘서트 DVD를 정주행할 거라며 둘이 앉겠다는 김여주와 이유진을 굳이 말리지 않았기에 내 옆자리는 공석이 되었더랬다. 그마저도 나머지 셋은 다 수면 보충이나 하기 바쁘다며 심심하다 찾아온 김석진 덕에 채워졌더랬다.
"우리가 언제 또 수학여행을 가보겠냐, 이 나이 먹고."
"방금 발언 진짜 아저씨 같았어."
"…넌 평생 스물넷일 거 같지?"
치사하게 나이로 그러는 거 아니라며 김석진이 툴툴거렸다. 뭐, 원체 장난기 많은 그의 성격 탓에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의 일정이, 또 40분가량의 비행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구겨진 미간이 쉽게 펴지는 일은 없었는데, 김석진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꾹꾹 눌러 직접 펼 때까지도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건 찝찝함에서 비롯된 거였다. 왠지 모르게… 뒤가 구려.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내 감이 그랬다.
"애초에…, 수학여행 장면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여행이 소설 내용 중 하나라는 거잖아?!"
"음, 그렇지."
"그러니까 별일이 생길 수도…, 그럴 가능성이…!"
"진정 좀 해…."
그리고 그런 내 걱정은, 둘째 날 일정이 끝났을 때쯤 현실이 되었더랬다. 젠장!
첫째 날 일정부터가 올레길 체험이었고, 하필 오늘 내가 신은 신발이 운동화가 아닌 구두였을 때부터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알아챘어야 했다. 아니, 못해도 다 까진 뒤꿈치를 치료해 준답시고 김여주가 내 발에 빨간약을 들이부었을 때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다음 날 아침 8시부터 등산을 하는 지옥 같은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라도, 이 수학여행이 뭔가 잘못돼도 엄청나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챘어야 했다.
"…재미?"
"…내가 미안하다 그래…."
팅팅 부어오른 발을 보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더럽게 재미없다. 같은 제주도가 여행지였던 지난 수학여행 때는 이 정도로 재미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테마파크에 박물관 뺑뺑이는 그렇다 쳐도, 재미도 감동도 없는 레크리에이션은 좀 선 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이 수학여행이 끔찍하게 별로라고 느끼게 된 계기는 그깟 재미없는 일정들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김여주와 이유진을 따라다니느라 불평불만할 체력이 남아있을리 없기도 했고,
"2인 1조로 출발할 거고, 산 중턱에 있는 휴게시설 안에 들어가서 선생님들께 도장 받아오면 돼! 지도랑 손전등은 조마다 한 개씩 지급할 거고…."
누가 일정에 추가한 건지는 몰라도, 구시대적 발상임이 틀림없는 담력 시험에 대한 충격 덕분에 나머지 일정을 싹 잊어먹을 수 있었거든. 게다가-
"……."
"……."
하필이면, 내 짝이 권연희라는 점에서 더더욱 끔찍할 수밖에. 내 똥 손을 탓해야 하나? 뽑기로 정해진 조에 내 의지는 단 1도 들어가지 않았다지만, 어쨌든 난 이 상황을 원망할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애꿎은 내 손만 죽어라 노려볼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무언가를 시도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이곳이 소설 속이며, 어떠한 원리로 인해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내가 이 담력훈련에서 빠지고자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간다 한들,
"…?"
"어! 연주야! 어디 갔었어? 화장실 갔다 왔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뜨자마자 내 몸뚱이가 다시 담력훈련장에 돌아와있는 것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단 소리다. 이런 식으로 순간 이동을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너 괜찮겠어?"
"…몰라, 망했어…."
김석진의 물음에 나는 잔뜩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조 바꿔달라 해볼까? 하는 말에는 고개를 저었더랬다. 안 그래도 김여주랑 친하게 지내는 것 때문에 미운 털이 아주 단단히 박힌 마당에, 김석진이 나서서 조를 바꾸자고 하면 어떻겠는가. 이미 나에 대한 권연희의 평판은 바닥이겠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내려갈 가능성이 컸다. 사서 미운 짓을 골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너 김여주랑 짝이잖아."
"……."
"바꿔봤자 정신 차려보면 김여주랑 산 오르고 있을 텐데."
고작 단역에 불과한 나도 여기서 탈출하는데 실패했는데, 남주인공인 김석진이, 여주인공인 김여주의 짝꿍으로 맺어진 마당에 그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말에 김석진은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내 어깨만 두드렸다. 힘내란 뜻이 담긴 위로임이 분명했지만 어째서인지 열불이 터졌다. 젠장.
피차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이에 정다운 대화가 오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욕이나 한 바가지 얻어먹으면 몰라. 최악의 경우엔 서로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게 되는 상황까지 가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권연희는 내게 욕을 퍼붓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대신 묵묵히 산길을 오를 뿐이었다. 덕분에 산 중턱을 향해가는 내내 들리는 소리라고는 점점 가빠지는 숨소리나 사부작거리는 발소리, 찌르르-, 하는 벌레 소리가 전부였다.
산 중턱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진 않았다. 담력훈련치고는 어디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 퀄리티의 반도 못 미칠 정도의, 상당히 시시하다는 평가가 어울릴 정도로 뭐가 없긴 했지만, 어쨌든 빨리 끝낼 수 있었단 점에서 내겐 좋은 일이었다. 조심해서 돌아가라는 선생님의 당부 아닌 당부를 뒤로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다시 지옥의 침묵 시작이었다. 최악의 수학여행 저녁 날이기도 했다.
📘 📗 📕
올라올 적엔 내가 손전등과 지도를 들었으니, 내려갈 땐 저가 들겠다는 권연희의 말에 나는 별다른 불평 없이 손전등과 지도를 넘겼다. 애초에 지도가 필요할 만큼 험준한 산은 아니었고, 손전등에만 의존해야 될 만큼 산이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묵묵하게 걸은지 대략 30분이 지났을 때쯤엔 숨이 찼다. 이상함을 느낀 것도 그때쯤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 산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의 담력훈련장으로 쓸 만큼 낮았다. 그러니까, 산 중턱에서 숙소까지 내려가는데 30분이 넘게 걸린다는 게 상당히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길을 잃었다거나, 길을 잃었다거나 하는 경우…,
"…저기, 숙소까지 얼마나 남았어?"
꽤 오래 걸어온 탓에 거칠어진 숨소리를 구태여 숨기지 않은 채 내가 물었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던 권연희가 나를 흘긋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비슷하게 걸었는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그 모습에 멍청하게 생각보다 체력이 좋네…, 따위의 생각을 했더랬다. 어라, 할 정도로 싸한 감각이 뒤통수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권연희가 걸음을 멈춘 그때에 말이다.
"…여주랑 많이 친해졌어?"
"…뭐라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곤 하는 말이 그랬다. 권연희의 손에서 지도가 툭, 떨어졌다. 맥없이 떨어진 종이 쪼가리는 이윽고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보는 권연희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 아, 방심했다. 망했네. 나는 생각했다. 날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권연희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말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안광이 거의 사라진 초점 없는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면 그랬다.
"나는 여주랑 친해지는 데 되게 오래 걸렸거든,"
"…어어, 그렇구나? 근데 왜 갑자기 그런 걸…,"
"근데 너는 되게 쉽게 친해지더라고, 여주랑."
"으음…,"
"심지어 여주가 먼저 친해지고 싶어 하더라, 학기 초부터 그랬지?"
"……."
한 걸음, 한 걸음 권연희가 천천히 발을 떼며 다가왔다. 진짜 맹세컨대, 시시하기 짝이 없던 담력훈련보다 이쪽이 백배는 더 무서웠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저기, 일단 진정 좀 하고…, 하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권연희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왜 너는 다 쉽게 가져가는 거야?!"
"아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김석진도, 박지민도, 전정국도, 김여주도, 심지어는 김태형까지도!!"
"좀 진정하고…!"
"왜!! 다 OOO, 너한테는!!"
"…어? 너 방금 뭐라고…!"
권연희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옴과 동시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가 10센티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째 점점 멀어져 가는 그 얼굴에 묘한 해방감이 뒤섞여있는 것 같았다.
시야가 어지럽게 뒤섞여서 눈을 꾹 감았다. 어지럽고 온몸이 아팠다.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너만, 너만 없으면 내가 전부 가질 수 있어!"
살아보겠다고 팔로 머리를 감싼 건 본능이었고, 산을 타고 굴러덜어지는 순간에도 '저게 날 밀어…?!'하는 생각 따위를 한 것도 본능이었다. 그리고 또, 어김없이 드는 생각이라곤-,
'진짜, 개 같은 소설아…!'
📘 📗 📕
죽지는 않았으니 이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있겠다. 아무리 온몸이 흙투성이에 삐끗한 발목마저도 퉁퉁 부어올랐다고 해도 말이다.
"곧 죽을 것 같은 꼬락서니라 해도 말이지…,"
팔다리 멀쩡하게 붙어있으면 된 거 아닌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생각했다. 온몸이 욱신거리긴 했지만, 어쩐지 이마가 뜨끈뜨끈하긴 했지만, 어쨌든 일어나는데 성공하긴 했다. 그 길로 올려다 본 산의 경사면은 몇 개의 꽤 커다란 돌부리를 제외하면 상당히 완만한 편이었다. 이걸 다행으로 여겨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도저히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를 이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기력은 없었기에, 근처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 몸을 기대어 앉는 게 내 움직임의 최대치였다. 딱딱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생각했다. 세상에, 권연희마저도 빙의자일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너만, 너만 아니었으면 전부 내가 가질 수 있었어!'
…같은 현대 사회를 살았다기엔 대사가 너무 인상 깊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뭐. 권연희가 나를 미워하는 게 이 소설 속 '권연희'에게 부여된 역할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권연희는 나를 미워한다. 소설 속 인물로서 김연주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권연희'라는 사람이 'OOO'을 싫어한다. 어떻게 'OOO'을 알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래서 뭐? 난 현실에서의 '권연희'가 누군지도, 또 왜 'OOO'을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이유를 알아낸다 한들 어쩌면 평생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누군가를 싫어하는데 명백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니까. 설령 내가 그 어떠한 이유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권연희'가 'OOO'을 좋게 봐줄지도 확신할 수 없다. 사람의 감정에 확신이 어디 있어? 다들 제멋대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최소한 권연희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그런 무의미한 짓은 아니란 뜻이다.
"언제 오려나…."
차라리 동화 속 공주님처럼 남주들에게 구해지기를 기다리고 말지. 삐끗한 다리 한 쪽을 높은 돌덩이에 올려놓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 밤 안에는 찾아주겠지? 설마하니, 고등학생이 주역인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죽기야 하겠어. 설령 그 등장인물이 단역에 불과하다 해도!
쌀쌀한 날씨에 팔짱을 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피곤에 찌든 몸뚱이에 잠이 쏟아지는 게 상당히 어이없긴 했지만, 잠이 오는 걸 어떡해…. 자면 안 되는데,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참을 버티던 눈꺼풀이 툭 닫힐 때 까진 그런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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