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 19

- 작가가 조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썼습니다.

-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 여주의 원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은 일부러 비워뒀습니다. 독자님들 이름 넣어서 읽으시면 될듯...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였다.

소설 속에 들어와 생활한지 몇 달째였다. 그간 현실의 내 방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곳에서 꼬박꼬박 눈을 떴기에,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이 방의 천장이 일전의 내 방의 천장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실로 돌아온 걸까?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깨달았다.

"…현실은 아니네."

아직 소설 속일 확률이 높았다. 뭐, 현실일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생활감이 남아있는 방 안을 구경하다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익숙한 얼굴이긴 했다. 애초에 OOO에서 김연주가 됐을 때만 해도 외관상 큰 차이는 없었다. 좀 어려진 것만 빼고. 이번엔 그 반대였다. 얼굴을 손끝으로 조심조심 더듬었다. 피부가 개판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10대의 피부는 아니다. 이런 걸로 나이를 체감한다니, 슬픈데. 실없는 생각과 함께 나는 내 얼굴을 천천히 뜯어봤다. 확실히 현실의 나보다도 더 성숙해 보이는 얼굴, 아마도 '김연주'의 미래의 모습이겠지. 20대 후반쯤 됐을까? 아니, 어쩌면 30대 초반일지도 모른다. 동안일지도 모르잖아.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침실 문을 열고 나섰다. 작은 주방이 달린 거실이 보였다. 채광 좋은 창 너머에서부터 들어오는 볕이 지금이 늦은 오후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해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공안을 돌아다녔다. 집은 매우 깔끔했다. 투룸 중 하나는 침실, 하나는 옷방인 걸로 보아 혼자 자취를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물건도 죄다 내가 쓸 법한 것들밖에 없었다. 이따금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 몇 개를 제외하고. 김석진인가?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품이 낭낭한 셔츠를 보며 생각했다.

낯선 거실을 둘러보던 중에 퍽 재밌어 보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82회 은하별 고등학교 졸업앨범'. 역시 아직 소설 속이었구나. 앨범도 있는 걸로 보아 어찌어찌 졸업은 했나 보다. 앨범을 펼쳐들고 익숙한 얼굴들을 찾아헤맸다. 정면을 보고 있는 수많은 사진들은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묘하게 어딘가 어색했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을까. 졸업앨범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넣었다. 설마 혼자 여기로 떨어진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내팽개쳐지다시피 방치돼있던 핸드폰을 찾아 잠금 버튼을 눌렀다. 낯선 배경화면이 보였다.

김석진

010-XXXX_XXXX

여전히 남아있다. 김석진을 비롯한 모두의 번호가. 전화를 걸기에 그리 폐가 되는 시간은 아님을 확인한 나는 김석진의 번호 옆 통화 아이콘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김석진이 아니라면 어떡하지?

OOO이 알고 있던 김석진이 아니라면, 여기에 남은 게 나 혼자라면? 덜컥 겁이 났다. 애인 사이라기엔 너무나도 심플한 저장명이 눈에 들어왔다. 한번 망설이기 시작하니 통화 아이콘으로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어떡하지, 입술만 짓씹던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동창회?"

동창회 갈 준비. 알람의 메모에 적혀있는 말이었다. 오늘이 동창회 날인가. 다이어리나 탁상달력에 메모라도 해놓지 않았을까 싶어 휑한 풍경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이 나이쯤 되고 나서는 책상 쓸 일이 아주 없던 것인지, 책 몇 권과 공책 몇 권을 제외하면 책상에 올려져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20XX, 개중 연도가 적힌 회색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빙고.

핸드폰 화면을 켜 날짜를 확인했다. 다이어리 달력의 오늘 날짜 아래 '은하별고 동창회'라 적힌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XX상회, 6시. 친절하게 장소와 시간까지 적혀있는 메모를 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시계를 한 번, 다이어리를 한 번 쳐다본 나는 다이어리를 덮고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넣고는 서둘러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아니, 벌써 5시야…!





📘 📗 📕





"후우…."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어째 대학 면접 때보다 몇 배는 더 긴장된다. XX상회, 다이어리에 적혀있던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손이 잘게 떨렸다.

동창회,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이쪽으로 오시면 된다 안내하는 직원에 그를 따라 예약석으로 이동했다. 이미 꽤 많은 사람이 도착해있는 모양인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문 틈새로 삐져나왔다. 안내해 준 직원에게 감사의 의미로 작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룸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어, 김연주! 반가움 담긴 음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자연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

"웬일로 늦어? 뭐, 아직 안 온 애들이 더 많긴 해."

이름 모를 여자아이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도 시선은 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익숙한 얼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안 온 건가? 불안함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던 순간, 권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굉장히,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권연희가. 그 표정을 보아하니,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날 괴롭혔던 걱정들이 모두 쓸데없는 고민처럼 느껴지고야 마는 것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권연희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소주잔과 수저를 놓아주는 권연희에게 모른 체 물었다. 확신이 필요했다.

"어제가 며칠이었지?"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눈을 끔뻑이다가도 이내 질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한 권연희가 씩, 웃었다.

"3월 28일."

나도 그를 따라 빙긋 웃었다. 근처에 앉아있던 동창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젠 4월 3일이었잖아? 하는 그 말에 권연희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아 그치그치, 헷갈렸어~, 어떻게 날짜를 그렇게 훅 뛰어넘을 수가 있냐며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는 동창에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어제는 3월 28일, 김태형과 김여주가 사귀기로 한 역사적인 첫날이었으니까.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자고 일어나니까 오늘이었어. 한 번에 15년을 건너뛰게 될 줄은 나도 몰랐는데,"

"15년?!"

"목소리 좀 낮춰…! 그래, 15년. 우리 지금 서른넷이야."

미친, 나이를 꽤 먹은 얼굴이다 싶긴 했는데 말이지.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사실에 입만 떡 벌리고 있는데도 권연희는 아랑곳 않고 빈 잔에 소주만 꼴꼴꼴-, 채웠다. 자, 소주. 하며 건네는 것이 어쩐지 신나 보이기도 했다. 하긴, 어제 박지민과 둘이서 그렇게 술이 고프다고 난리를 쳐댔으니.

"미쳤네, 근데 가자기 왜 서른넷이 된 거지? 소설은 완결 난 거 맞나? 김태형이랑 김여주랑 사귀고 끝나는 거 아니었어? …설마 헤어졌나?"

"아니, 물어보니까 아직 잘 사귀고 있다더라. 결혼한대, 올해."

"…설마 결혼식이 진짜 엔딩이라거나,"

"…짚이는 게 있긴 한데…."

뭐? 뭔데? 되묻는 내 말에 권연희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인영 둘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게 보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만, 어제보다 훨씬 성숙한 외관을 가진 김여주와 김태형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어, 연주야!"

서른넷의 김여주가 말이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은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그 모습에 조금 안심했던 것 같다. 행복하냐는 물음에 행복하다고 답한 것이 어제였는데, 어제와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건 결국 오늘도 행복하다는 뜻이 될 테니까. 감회가 남달랐다. 언제 이렇게 커서는…! 감격에 입을 틀어막는 내 옆구리를 권연희가 쿡쿡 찔렀다. 지랄 말고…,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짜 오랜만이야!! 요즘 많이 바쁘지-,”

“어? 어. 뭐, 그렇지?”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그치?”

“응, 어제도 본 것 같긴 하지만….”

“뭐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꺄르르 웃는 김여주에 나도 그냥 작게 미소만 지어주고 치웠다. 그야, 우리 진짜 어제도 만났거든… 물론 네 기억 속엔 없겠지만.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어디 아프냔 소리를 들을법한 생각이었다.

자연스레 우리 테이블에 자리 잡은 김여주와 김태형 덕에 권연희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겼다. 주인공들 앞에서 소설이 어쩌고 나불거릴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쟤는 진짜 제대로 인생 스포 당하는 거라고. 아는 얼굴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이유진이라던가, 박지민이라던가. 늦게나마 전정국도 무사히 도착했다. 박지민과 전정국은 도착하자마자 나와 권연희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역시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사히 이 세계에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무사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맞는 건지는 조금 의문이었지만. 모두가 모였다, 김석진, 단 한 사람만 빼고.

“…야, 김석진은?”

권연희가 소곤거리며 물어오는 것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겁나서 연락을 못 하겠다 하면 비웃겠지? 물론 지금도 여전히 겁나는 건 마찬가지지만. 대답 없이 핸드폰만 꾹 쥐고 있자 권연희가 알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야, 뭘 걱정해. 다 여기 있잖아. 걔라고 별반 다르겠냐.”

“그건 그런데…, …왜 이렇게 초조하지?”

손에 미약하게 난 땀을 바지에 대충 문질러닦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조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다른 애들과는 다르게 얼굴을 비출 생각도 않는 김석진 때문에. 김여주 주도 하에 이어지는 대화들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자꾸만 출입구로 시선이 향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어, 김석진! 이제 왔냐!”

출입구에서 시선을 뗄 수 있게 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뒤였다. 단정한 차림새와는 다르게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김석진이 문을 열어젖혔다. 시선이 오롯이 내게로 향하는 것을 느끼곤 안심하기도 잠시, 동창들의 반가운 인사를 대충 받아준 김석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오.”

“왜? 근데 너 왜 이렇게 늦었, 컥, 야, 야, 너 뭐해…!”

“하…….”

냅다 날 끌어안는 김석진에 당황해 그의 등을 퍽퍽 쳐댔으나 미동도 없다. 보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대체 뭔 짓이람?! 쪽팔림에 얼굴이 붉어지고 짜증이 치밀다가도, 김석진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 그 모든 감정들은 싸그리 사라졌다. 걱정이 가득 담겨있는 얼굴이라서. 처음 김석진에게 좋아한단 말을 들었던 날과 꼭 같은 얼굴을 하고선,

“다행이다…,”

-하며 중얼거리는 것마저도 그날과 같았다.





📘 📗 📕





석진이 반짝, 눈을 떴다. 낯익은 방에서 눈을 뜬 제 모습에 그가 낮게 한숨을 흘렸다. 아직인가. 동복으로 바뀐 교복이 옷장 문에 걸려있는 것만 제외하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 중 하루였다. 석진은 익숙하게 핸드폰을 켜 날짜를 확인했다. 하룻밤 사이에 몇 주를 뛰어넘기는 일이 밥 먹듯이 일어나는 통에 생겨난 새로운 습관이었다. 날짜를 확인한 석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2월이다. 시간을 되돌아가는 일은 아직 없었으니, 제 예상이 맞다면 오늘은 졸업식 날일 것이다. 결국 졸업식까지 겪게 됐다며 투덜거릴 OO의 모습이 눈에 선해 석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들, 일어났어? 오늘 졸업식이지?”

“네, 오시게요?”

“오늘 친구들이랑 보낸다며? 잠깐 들렀다 금방 갈 거야.”

“응, 그랬죠. 알겠어요.”

아침밥을 먹으며 부모님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 교복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서는 것까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기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에 석진이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춥다.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결국 이번에도 현실로 돌아가는 건 실패였다. 달라지지 않은 하루에 석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었다. 심지어 꽤 많았다. 그러나 달갑지 않은 변화였다. 석진이 이상함을 느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OO이었다. 제 여자친구. 아침의 인사 한 번을 제외하고는 말도 잘 걸어오지 않는 그 모습이 낯설었다. 졸업식 날이라 싱숭생숭하기라도 한 걸까? 그런 거였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상한 점은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일곱이서 밥을 먹는 거야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 수많은 대화들 중 어제 일에 대해 한 마디도 않는 것은 이상했다. 죄다 졸업 후에 무얼 할 건지만을 고민하는 대화 속에서 석진은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불안해졌다. 설마, 하며 최악의 가정이 석진의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도 같았다. 석진은 제 옆에 앉은 연주의 손을 붙들었다. 왜? 하며 돌아오는 얼굴에 미약한 당황스러움이 섞여있었다. 석진에게 손을 잡힐 때면, 늘 작게 미소 지으며 제 손을 더욱 꽉 붙들었던 연주였는데,

“오오,”

“…?

“OO아,”

“석진아…? 갑자기 왜 그래?”

“…….”

“OOO은 누군데?”

심장이 쿵 떨어졌다. 석진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창백해지는 석진의 안색을 본 연주가 안절부절못하며 석진을 살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하는 목소리에 석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김석진! 하는 누군가의 외침을 들은 체도 않고 식당 밖으로 나선 석진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거짓말. 이거 아니잖아. 그럼에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OOO은 누군데?’

없다. 더는 이 세상에 없다. 저 혼자만이 남았다. 무턱대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점차 빨라지다 이윽고 뜀박질로 변했다. 그러나 목적지는 없다. 한참을 뛰던 석진이 숨을 몰아쉬며 벤치에 걸터앉았다. 더는 갈 곳이 없었다. 혼자 남겨진 세상에서는 그랬다. 안돼, 석진이 중얼거렸다.

“…계속 옆에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석진의 발치에 동그란 자국이 생겼다. 뺨을 타고 무작정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석진이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바로 어제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혼자 남겨진 저는 이렇게나 무력하다.

OO이 보고 싶다. 석진이 생각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석진의 시간은 그보다 더 빠르게 흘렀다. 졸업식을 마친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석진은 익숙한 방에서 눈을 떴다. 오늘 오전 수업이라고 안 했니? 하는 어머니의 말에 석진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대학생인가, 석진이 핸드폰을 켜 날짜를 확인했다. 또 몇 달을 건너뛰어있는 날짜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 지긋지긋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만큼, 김여주를 비롯한 그 무리들과 떨어져지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석진은 한참 헤매다 들어선 강의실에 모여있던 제 친구들을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그들에게 다가갔다. 연주를 붙잡고 석진은 그리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오”

“…응? OOO이 누구야, 석진아?"

또다시 절망이었다. 석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하루였다.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불규칙하게 바뀌는 날짜는 어떤 날은 겨우 이틀을, 어떤 날은 한 번에 3년을 뛰어넘기도 했다. 석진은 눈을 뜰 때마다 하루하루 미묘하게 달라져가는 제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깨어난 날이면, 석진은 꼭 연주를 만났다. 다 같이 모여 점심을 먹기도 하고, 술잔을 부딪히기도 하고, 충동적으로 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석진은 연주를 보며 이름을 불렀다. OOO, 하고.

“OOO이 누구야, 근데?”

어느 날은 연주가 먼저 물었다. 물론 그날도 석진은 연주를 마주함과 동시에 OO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게 누구냐는, 익숙한 대답을 들은 석진이 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넘어가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는 연주가 먼저 그 이름을 입에 담는다. 밥을 깨작이던 석진이 흠칫했다.

“맞아, 가끔 연주 보고 OOO이라고 하잖아, 누군데?”

“물어봐도 내가 그랬어? 하면서 넘어가기나 하고 말이야,”

“그래서 누군데? 좋아하는 사람??”

저들끼리 떠들어대는 이들을 보며 석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들 제가 알던 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진즉 깨달았으나, 이렇게 대놓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면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석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더 먹어봐야 죄다 게워낼 것이 뻔했다.

“그냥 아는 사람.”

“근데 왜 김연주 보고 자꾸 OOO이라 하냐, 연주가 자꾸 불편해하잖아.”

“아니야! 난 괜찮아!”

“그럼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궁금하긴 하잖아. 누구길래 그래?”

말해줘 봤자 모를 터였다. 석진은 순간적으로 저가 겪은 모든 일들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허나 그래선 안된다. 어쩐지 그래선 안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로 권연희가 했던 말처럼 김태형과 김여주가 신혼여행이 가는 걸로 소설이 끝날지도 모르지. 그때까진 버텨야 했다. 석진은 이들이 적당히 납득할 만한 변명으로 대답했다.

“그냥 닮은 사람. 불편했다면 미안,”

“으응, 괜찮아.”

그만두겠단 말은 하지 않았다. 석진이 이 세상에서 김연주와 OOO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이름뿐이었으니까.

다음 날 눈을 떴을 땐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난날이었다. 석진은 또다시 OOO의 이름을 불렀고, 난감하다는 연주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눈을 뜨고, 또 눈을 뜨고, 또 김연주를 만나고. 소설 속 세계의 시간이 15년이 흘렀다. 석진의 시간은 겨우 2주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끔찍하게만 느껴졌던 14일이었다.

석진은 기대를 접었다. 현실도 아닌 곳에서 OOO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OO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이미 현실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곤함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석진은 핸드폰 화면을 켰다. 날짜 아래로 메모 알림이 떠 있었다.

“동창회….”

XX상회, 6시. 장소와 시간이 적힌 메모를 간단히 확인한 석진이 몸을 일으켰다. 서른넷,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김태형과 김여주가 결혼한단 소식은 몇 년 전부터 돌았던 것이니까. 못해도 1-2년 안으로 하지 않을까. 그러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OO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답지 않게 늦장을 부린 이유는 석진 저 자신도 잘 몰랐다. 오늘따라 되게 가기 싫네. 침대에 힘없이 엎어진 채 석진이 중얼거렸다. 이미 다 갈아입은 옷에 주름이 잡혔으나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넘기던 석진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가야 한다, 혹시 모르니까.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혹시 모르니까. 누가 알까, 기적이라도 일어날지.

“…오오.”

“왜? 근데 너 왜 이렇게 늦었, 컥, 야, 야, 너 뭐해…!”

한데, 기적이 일어났다. 무언가가 달랐다. 당장 어제 제가 만났던 김연주와는 다르다. 불안함을 내리누르며 불러본 OOO이라는 이름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속에서 무언가가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별 수 없다, 석진이 OO을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네가 그 긴 시간을 혼자 떠돌지 않아서, 다행이다.





📘 📗 📕





겨우 진정한 김석진을 옆에 앉혀놓고 나니, 남은 건 우리를 요상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들이 문제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김석진은 쉽게 입을 뗄 생각이 없어 보여 나는 진땀을 빼며 되지도 않는 해명 쇼를 펼쳐야 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얼마 전에 좋지 못한 일을 당해 김석진이 과하게 걱정하는 거라고.

“너네 친한 줄은 알았는데, 아직도 그렇게 거리낌 없을 줄은 몰라서, 좀 당황했네.”

“아이, 김석진이랑만 친하겠냐! 우리가 고딩때부터 이렇게 지내서 좀 선이 없다! 그치, 얘들아?!”

“어어, 큽, 그치.”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저들끼리 웃음 참기 챌린지를 하는 박지민과 전정국에게 눈을 부라렸다. 겨우겨우 웃음을 참아가며 대답하는 꼴에 어떻게든 김석진과 내 포옹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긴, 너네 진짜 친했잖아~, 하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1학년 때부터 친했지 않아? 쭉 같은 반이었다며,”

“맞아, 너네 진짜 유명했잖아. 3년 내내 붙어 다녀가지고.”

“처음부터 유명하긴 했지, 은하별고 B4!”

“아, 맞아맞아! 그랬지!”

미친, 저 촌스러운 별명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제 흑역사나 다름없는 별명의 언급에 권연희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러게 이름 좀 잘 지어보지, B4가 뭐냐, B4가? 꽃X다 남자도 아니고…. 그 당사자들도, 한때의 악몽이 되살아난 탓인지 영 표정이 좋지 못했다. 여전히 넋이 나가있는 김석진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으니 감회가 남다르긴 하겠다,”

“아 그러네! 곧 결혼한다며!”

결혼? 아마도 김태형과 김여주의 이야기겠지? 어색하게나마 맞장구치며 곁눈질로 김태형과 김여주를 살폈다. 역시나, 결혼 소식은 그들의 이야기가 맞았는지 쑥스러워 죽겠단 표정을 짓고 있는 김태형과 행복해 마지않는 얼굴로 방긋 웃는 김여주가 보였다. 아이고, 결국 결혼까지 보고 가는구나…!

“15년이나 만났으면 결혼할 때 됐지, 뭐,”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결국 김여주가 제일 먼저 가는구나!”

권연희의 말에 옆에서 쫑알대던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일 먼저 가는 거 아니지 않아? 하는 그 말에 되려 우리가 의문을 표했다. …우리 중에 누구 결혼한 사람 있어? 흔들리는 눈동자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연주 너 말이야~, 연주 네가 9월, 여주가 10월이라며?”

“…어? 뭘?”

“뭐긴, 결혼식 말이야!”

애가 왜 이렇게 넋이 나갔대?! 깔깔거리며 내 어깨를 퍽퍽 쳐대는 여자가 말했다. 아, 그러니까, 여기서 제일 먼저 결혼하는 게… …나라고? 결혼이요?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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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완결입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