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체 무슨 글인지 작가도 모릅니다.
- 왜 썼는지 작가도 모릅니다.
- 클리셰 덩어리입니다.
- 가볍게 읽어주세요... 어차피 개연성 개나 준 엉망진창인 글입니다...
-TRIGGER WARNING! 2010년대 초에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엑스트라로 살아남는 법
:어느 날 소설 속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W. 그쁨
로맨스 판타지를 비롯한 온갖 가지 소설을 독파해온 내 예상이 빗나갈 리가 없었다. 원래 이런 건 클리셰가 덕지덕지 붙어있어야 제맛이라고, 화장실로 피신 아닌 피신을 갔다 돌아온 1학년 3반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산산조각나있었다. 그래도 난 제법 눈치가 있다 자부하는 사람이라, 아직 쉬는 시간임이 분명한데도 말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 교실에 조용히 뒷문을 열었다. 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 때문인지, 조용히 교실로 들어오는 내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심을 받아봤자 역효과만 일어날게 뻔하거든. 솜털이 바싹 일어날 만큼 얼어붙어있는 반 분위기에 나는 더더욱 숨을 죽였다. 으, 하필이면 내 자리 근처에서 저러고 있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교실에 들어오는데 성공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가 있다면 하필이면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몰려있는 당사자, 이유진의 자리가 내 뒷자리라는 것이었다.
"말은 똑바로 하고 다녀야지, 안 그래?"
처음 보는 남학생(아마도 B4 중 하나일)의 기에 눌려 안쓰러울 만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 이유진의 앞자리 말이다. 나는 이유진의 자리를 지나 내 자리로 돌아가 앉는 만행을 저지르는 대신 뒷문 근처에 자리를 잡은 채 상황을 방관했다. 왜 나서지 않느냐 묻는다면 나는 언젠가 했던 대답을 다시 내놓겠다. 난 관심 받기 싫다. 눈에 안 띄는 엑스트라로 살다가 조용히 소설 완결을 보고 돌아가는 게 내 목표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유진의 옆에 서서 이유진을 살벌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남학생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유진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내 목표와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조용히 숨죽이며 이유진의 앞에 선 남학생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왜? 앞으로 내 시야에 들어오면 당장 피해버리게.
근데, 진짜 뻐렁치게 잘생겼다. 역시 이 정도는 돼야 인터넷 소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건가? 어떻게 이목구비가 다 들어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작은 얼굴에 깨끗한 피부에, 높은 콧대에… 아무튼 잘생김이란 말을 의인화하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잘난 얼굴이었다. B4인지 뭔지, 아무튼 저렇게 생긴 애들이 세 명이나 더 있단 말이야? 이쯤 되니 이 학교 여학생들이 왜 B4에 열광하는지 알법했다. 얼굴이 저 정도로 잘났으면 환장할만하지, 그래.
"아까는 잘만 지껄이더니 왜 갑자기 입을 닫고 그래, 응? 왜, 아까는 당사자 앞에서 못할 말이라도 했어?"
"그게, 그게 아니고…"
"뭐가 아닌데. 니가 했던 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읊어 줘? 그럼 그 더러운 주둥이 열래?"
"……."
"왜 또 대답이 없어, 짜증 나게."
남학생이 이유진이 앉아있던 의자를 툭, 발로 찼다. 반항도 못하고 의자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앉아있는 이유진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한두 방울 쏟아져 나왔다. 아이고 저런, 쏟아지는 눈물방울에 웅성이는 소리로 교실이 소란해진 틈을 타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끝날까. 슬슬 다리가 아파오는 바람에 나는 뒷문 근처에 쪼그려앉아 머리를 기댔다. 이유진의 억눌린 울음소리와 남학생의 짜증 어린 한숨소리, 반 아이들 몇몇이 아주 조그맣게 소곤대는 소리를 제외하면 반 안은 싸늘하게 조용했다.
"태형아… 이제 그만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주가 말했다. 아, 쟤가 그 무슨 기업 아들이라던 김태형이구나. 은지와 유진이가 신나게 떠들어대던 김태형에 대한 정보를 뻐렁치게 잘생긴 저 얼굴과 매치시키며 나는 여주를 지켜보았다. 자그맣고 하얀 손이 김태형의 소매를 붙잡았다. 겁먹은 탓인지 아니면 욕을 들어먹은 게 속상했던 건지 살짝 붉어진 눈가와 울망울망한 눈망울로 김태형을 올려다본다. 와오, 안 그래도 예쁜 얼굴에 눈물까지 더해지니 청초함이 두 배였다.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나는 상황을 방관했다.
그런 여주인공의 모습에 넘어가지 않을 남주인공(후보)은 없다. 김태형이 짜증스러운 듯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더니, 마지막으로 이유진이 앉아있던 책상을 발로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물론 김여주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두 사람이 교실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정적뿐이던 교실이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유진아, 괜찮아? 방울진 눈물을 떨어트리다 못해 이제는 흐어엉-, 하며 울음을 터트리는 이유진에게 최은지가 물었다. 이유진과 친분이 있어 보이던 몇몇 아이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유진의 곁으로 몰렸다. 뭐, 왕따 엔딩은 아니려나. 불행 중 다행이네.
교실 뒤편에 있던 티슈 몇 장을 뽑아들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흐트러진 책상을 바로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럽게도 우는 이유진이 보였다. 말 한마디 잘못한 것치곤 대가가 좀 크긴 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뽑아온 티슈를 이유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전히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얼굴을 한 이유진이 나를 쳐다보았다.
"자, 눈물 닦아."
그 말에 이유진이 다시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더 울라고 한 소리가 아닌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대충 두어 번 더 이유진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등 뒤에서 점차 멎어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 📗 📘
이 소설의 제목이라던가, 내용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알 수가 없었다. 그간 내가 읽었던 소설이 한두 개도 아닌데 그것들의 제목과 내용을 전부 다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사실 인터넷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다 거기서 거기인, 비슷비슷한 내용을 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개가 특이하거나 특출나게 재미있던 소설이 아니라면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지기 마련이었다. 아마도 내가 들어선 이 소설 또한 그런 류의 소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확신할 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주인공 이름이 김여주라니. 작가의 무성의함에 감탄해서라도 소설 제목쯤은 기억하고 있을법한데 말이다.
아무튼, 제목도 내용도 모르는 소설 속 비중 없는 엑스트라에 빙의한 것치고 나는 나름대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초반에 여주인공과 잠깐 짝꿍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주인공들과 엮여 비운의 엑스트라 역을 맡는 건 아닐까 하며 했던 걱정들이 무색하게도 그들과 나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진짜 하나도 없었다. 아무래도 같은 반이다 보니 정말 어쩌다 한 번쯤 말을 섞게 되는 일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그냥 같은 반 친구로서 생각하고 있구나-, 싶을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티가 팍팍 나는 말들이었다.
"김여주 어디 갔는지 알아?"
"아, 다음 시간 과학이라 과학실 갔을걸?"
정말 이 정도의 대화가 끝이었다. 한 달쯤 되는 시간 동안 나눈 대화가 이것밖에 없다 보니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음, 나는 쟤네들에게 그냥 '같은 반 친구 13' 정도의 포지션일 뿐이구나!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여주도 새로운 짝꿍(이름이 권연희였나, 아무튼 그렇다.)과 친해져 대부분의 시간을 그 친구, 혹은 남주 후보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혹시 여주인공의 친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던 걱정도 사라졌다. 이거지, 응. 덕분에 한껏 경계심을 세우며 피곤하게 학교생활을 하던 학기 초와는 다르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나름 친구도 생겼다.
"연주야, 매점 갈래?"
"그럴까?"
다름 아닌 이유진이 내 친구자리를 꿰찬 장본인 되시겠다. 주인공들과 엮이고 싶지 않네 뭐네 해놓고 왜, 이미 한번 김태형에게 미움을 샀던 이유진과 굳이 친구를 먹었는지 의아해 할 여러분을 위해 간단히 설명을 곁들이겠다. 인터넷 소설 속 악역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관계성을 빛내기 위해 반짝! 나타났다가 금세 소설 속에서 사라지는 악역. 두 번째,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들을 괴롭히다 소설의 끝끝끝에 결국 배드 엔딩을 맞이하는 악역. 마지막으로 세 번째, 두 번째 악역과 같이 소설 내내 주인공들을 괴롭히다 소설의 끝에 회개하고 주인공들의 친구가 되는 악역. 뭐, 이렇게 세 종류다. 처음에야 나도 혹시 이유진이 두 번째나 세 번째처럼 플래그를 세우고 꾸준히 여주를 괴롭히는 게 아닐까 했는데, 한 2주 지켜보니 아니더라. 이유진은 굳이 따지자면 첫 번째 악역에 가까운 등장인물이었다. 김태형에게 호되게 당한 뒤로는 비포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리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들에 대한 어마어마한 열정도 사라진 것 같았다. 게다가 뭐, 티슈 몇 장 챙겨준 게 그렇게 감동이었는지 어째 내게 자꾸만 호감을 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음, 얘랑 친구 먹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결과적으로 이유진은 악역에서 탈출하고, 나는 친구가 생기고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아무튼, 이유진의 대사에서 99%를 차지하고 있던 남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빼고 보니 이유진도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을 되풀이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평범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람 왜 이렇게 많아…."
"헉, 연주야! 저기 B4다!"
…음, 앞서 했던 말을 정정해야겠다. 남주인공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냥 몸을 사리고 있던 거였나 보다. 내 시야는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의 등짝으로 가득찼는데, 이유진은 용케 남주인공들이 매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게 굳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어쩐지, 평소에도 매점이 복작거리긴 하지만 이 정도로 북적이지는 않았거든. 초코소라빵 먹기는 글러먹었네. 입맛을 다시며 나는 아쉬운 한숨을 내뱉었다.
"으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잘 안 보여!"
"그럼 그냥 교실 갔다가 다음 쉬는 시간에…,"
"엇, 저기 자리 비었다! 연주야, 우리 좀 더 가까이 가서 보자!"
"아니…."
굳이 이 복새통이 따로 없는 매점을 뚫고 지나가 남주인공들의 용안을 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이유진이 내 팔을 붙잡고는 질질 끌었다. 아니, 난 그냥 교실로…, 하는 애처로운 내 목소리는 이유진의 귓가에도 닿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쟤네가 희귀 생명체도 아니고 일단 쟤네도 학생인 이상 수업 시간엔 교실로 돌아올 텐데 굳이 지금 봐야 하나? 불만을 꾸역꾸역 삼켜내면서도 나는 이유진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기력이 없었다는 게 제일 큰 이유였다.
확실히. 아까의 자리에서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주인공들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 넷,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조그마한 여자애 둘. 누가 봐도 김여주와 여주의 새로운 친구 권연희, 그리고 B…, 아니, 남주인공 네 명의 모습이었다. B…, 아무튼, 잘생긴 남정네들의 얼굴에 이유진이 헤벌쭉,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 것을 보며 나는 속으로 쯧쯔-, 혀를 찼더랬다.
"세상에…, 진짜 너무 잘생겼다…."
"헉, 봤어? 태형이가 웃었어…! 어떡해, 너무 귀엽다…."
"지민이, 지민이도…!"
"꺄아악, 석진아-!"
"정국아, 진짜 네 얼굴이 복지…!"
"……."
물론 이유진뿐만 아니라 매점의 거의 모든 여학생들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긴 했다. 거기에 더해서 간간이 내 귓가로 저런 대사들이 들려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토 쏠린다는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관심이라곤 쟤네를 어떻게 피해 다닐까 하는 것이 전부인 남자애들의 칭찬을 직통으로, 그것도 상당히 작위적인 말투로 듣고 있자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관심 없는 티를 너무 내서도 안된다. 왜냐고? 자칫하다가는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같은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날 좋아하는 사람 99명과 날 싫어하는 사람 1명이 섞여있으면 날 싫어하는 한 명에게 관심이 가는 게 당연했다. 적어도 인터넷 소설 속에선 그렇더라. 김칫국 퍼마시는 것처럼 보였다면 미안하지만, 그만큼 주인공들과 엮이지 않기 위한 내 필사적인 몸부림 정도로 치부해 주길 바란다.
"근데 저 여자애들은 누구야?"
"쟤가 김여주 아냐? 그, B4들이 중학교 때부터 싸고돌았다던…."
"아, 쟤가 걔야? 그럼 그 옆에는?"
"걘 잘 모르겠는데, 진짜 누군데 애들 옆에 붙어있는 거야?"
"재수 없어…."
왜 여주인공 친구 자리를 마다하는지 궁금해했던 사람은, 지금 이 상황을 머릿속에 새겨두길 바란다. 그냥 친구끼리 매점에 앉아 빵 쪼가리 좀 나눠먹는 걸로도 욕을 듣는 이 상황을 말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욕 들어먹는 취미는 없기 때문에 내가 저런 상황을 기를 쓰고 피해 다닌 것이었다-, 이 말이다. 아무튼 용케 그 욕받이 자리를 피하게 된 나는 이유진의 곁에 꼭 붙어 김여주와 그 일행들을 구경했다. 사실, 굳이 B4들을 힘들게 졸졸 쫓아다녀야 되겠냐고 말은 했지만, 내 시선도 어쩔 수 없이 김여주와 그 일행들에게 향할 수밖에 없더라. 일단, 여섯 명의 비주얼이 무슨, 아이돌 그룹들의 뺨을 네다섯 대는 후려치고도 남을 정도로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김여주와 네 명의 남주 후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 김여주의 새로운 친구인 권연희마저도 얼굴에서 빛이 난다. 조연까지도 완벽한 얼굴을 가진 그런 소설이다 이건가? 아무튼, 여섯 명 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수준이었으니 눈이 갈 수밖에.
또 다른 이유는, 이 소설이 당최 어떻게 되어먹은 소설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로맨스의 'ㄹ'도 구경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교실 안에서의 알콩달콩한, 그런 로맨스 소설 다운 장면들을 기대했는데…, 뭐, 교실에서의 꽁냥거림은 고사하고 애초에 교실에 붙어있지도 않더라. 수업 끝 종이 치자마자 어디 밖으로 나가버리고는, 수업 시작종이 치면 그제서야 느긋하게 들어온다. 이따금 여주가 교실에 붙어있을 때가 있긴 했지만, 그럴 땐 보통 남주 후보들이 아닌 권연희와 꽁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염병, 이거 로맨스 소설 아닌 거 아니야?
아무튼, 나는 내가 빙의한 이 소설의 내용이 궁금했다. 왜, 그래도 소설 속에 들어왔으면 주인공들의 로맨스 장면 정도는 살짝 훔쳐봐줘야지. 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여기, 묻었어."
"아…! 고마워, 정국아!"
"애도 아니고, 칠칠맞게."
이런 장면들처럼 말이다. …물론 보고 나서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진짜 대사 수준하고는, 삼류 소설 같은 대사에 내 손발이 다 오그라들더라. 그런데도 주변 애들은 좋다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누군가의 설렌다는 말을 듣고 난 뒤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설렌다고? 저게? 진짜로? 물론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린 뒤에는 그런 반응들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래, 소설 속에서 안될게 뭐가 있겠어. 좀 많이 오글거리고 별로인 대사들도 소설적 허용으로 설레는 대사로 탈바꿈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그리고 나는 기대를 접었다. 소설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식어버렸다는 뜻이었다. 대충 봐도 그냥 클리셰 범벅인 삼류소설인 게 티가 나서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로맨스 소설이라 김여주를 비롯한 네 남정네들이 꽁냥거리든 말든, 사실 이 소설이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라 당장 내일 학교에 좀비 바이러스가 돌든, 그냥 비중 없는 엑스트라로 소설이 완결 나는 시점이나 기다리기로 했다. 전정국이 여주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고, 김태형이 여주의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고, 김석진과 여주가 도란도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캔을 못 따 끙끙거리는 여주 대신 박지민이 한 손으로 캔을 따주고, 뭐. 이 소설 속에서 로맨스란 말 그대로 설렐 법한 행동들을 한 장면에 다 때려 박은 게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런 기대를 버릴 법도 했다. 김 다 샜다. 저 정도면 그냥 얼굴이 뻐렁치게 잘생겨서 설레는 거 아닐까? 역시 얼굴이 개연성인가….
"유진아, 곧 종 칠 것 같은데…."
"다음 시간 국어라 괜찮아! 쫌만 더 있다 가자, 응?"
"어… 그래…."
아무튼, 이번 일로 나는 깨달은 게 있었다. 나는 소설 파구나. 어쩐지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6화를 못 넘기고 관둬버리더라. 암만 내용이 흔해 빠지고 클리셰로 범벅되어 있더라도, 글로 읽을 때는 그나마 작가 개개인의 문체 덕분에 나름 재밌게 읽을 수 있었는데, 이게 현실로 닥쳐버리니까 그렇지 못했다. 소설이 현실이 되어보니까 알겠다. 글로 읽는 거면 몰라도 실제로 설레는 행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렘이고 뭐고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그냥, 염병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이 말이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이 소설 한번 읽어봐야지. 글로 읽으면 설렘이 좀 느껴지려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김여주와 아이들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어, 눈 마주쳤다. 이름이 뭐더라, 박지민? 아무튼, 갑작스레 마주한 시선에 피하는 것도 잊고 눈을 끔뻑이며 박지민의 눈을 쳐다보았다. 냉미남 타이틀에, 소문도 별로 안 좋다더니, 진짜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어째서인지 등골이 오싹했다. 물론 그 오싹함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가까운 함성에 금방 사그라들었다. 나, 나, 나랑 누, 눈 마주쳤어!
아 그래, 누가 대존잘 초절정 인기남 아니랄까 봐 시선 한 번 던진 걸로 죽는 시늉을 하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저마다 '나랑 눈 마주쳤어!', '아냐! 나랑 마주친 거라니까?' 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누구랑 눈이 마주쳤건 그게 뭐가 중요하겠니, 어차피 여주인공은 저기 앉아서 빵이나 받아먹고 있는 김여주일텐데. 나는 김여주와 그 일행들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슬그머니 거두고는 이유진의 뒤로 슬며시 숨었다. 아무리 잘생겼다 한들, 자기와 눈이 맞았네, 얼굴이 빛이라 실명될뻔했네, 눈빛에 압살당했네, 카리스마가 어쩌고 하는 저세상 주접들이 귓구멍에 직통으로 꽂히는 것을 참고 있자니 표정관리가 너무나도 힘든 탓이었다. 제발, 수줍어서 친구 등 뒤로 숨은 모브 1 정도로만 날 생각해 주길 바라. 아니, 애초에 관심도 없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유진의 뒤에서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었을 땐 당연하게도 박지민의 시선은 거둬진 뒤였다. 나는 다시 시선을 김여주와 아이들에게로 돌렸다. 저들끼리 사이좋게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모습들을 보며 나는 이유진의 어깨에 턱을 기대며 생각했다. 그래서 남주가 누군데?
📕 📗 📘
매점에서의 일 이후, 나는 엑스트라로서의 일상생활에 더 집중했다. 뭐, 집중이라고 할 것도 없이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보냈다는 뜻이었다. 등교를 하고, 수업을 듣고,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하교를 하고…. 그런 흔해빠진 일상들 말이다. 고등학교를 안 다녀본 것도 아닌데 꽤 오랜만에 이런 생활을 하려니까 나름 재미도 있더라. 아무튼, 그 뒤로 김여주와 남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시 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없었다. 소설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을까-, 하고 확인하는 용도로 쓰고 말 정도로 주인공들의 모습을 흐린 눈으로 쳐다보는데 도가 텄다는 뜻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설은 아주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소설의 초반쯤이라 그런지 눈에 띄는 사건들은 몇 없었지만, 김여주가 꾸준히 B…, 아니, 네 명의 남주 후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점이나, 간간이 흐린 눈을 뚫고 들려오는 (나름) 설레는 대사들로 유추해봤을 때 소설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있었다.
조금 더 상세하게 그 '문제'에 대해 말을 해보자면, 시간은 내가 이유진과 매점에 갔다가 김여주와 일행들을 마주친 날로부터 시작된다. 그래, 박지민과 눈이 마주쳤던 날 말이다. 이상하게 그날 이후로 내게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왜 문제냐고? 당연히 문제지! 난 한낱 엑스트라인데 관심을 받으면 어떡해…! 이 새끼 도끼병이 아닐까 싶겠지만 난 진지하다. 이 소설 안에서의 내 목표가 가늘고 길게, 눈에 띄지 않고 완결을 보는 것인 만큼 시선에 민감했으니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 몇 번은 그저 우연이겠거니-, 하며 넘어갔더랬다.
"연주! 어디 가?"
"나 화장실 좀…,"
"같이 가자!"
쉬는 시간에 이따금씩 뒤통수가 따끔거린다거나,
"그러니까 여기서는 2x+3을 A로 치환한 뒤에…,"
"……."
수업 시간에 문득 누군가가 날 쳐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거나,
"연주야! 이거 좀 털어줄 수 있어?"
"아, 으응!"
창밖으로 칠판지우개를 털고 있는데 또 시선이 느껴진다거나. 그러려니 했다. 그래 뭐, 나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하지만 그런 생각도 내게 시선이 따라붙는 일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게 된다면 생각을 고쳐먹게 되는 것이었다. 혹시 엑스트라로서의 내 목표가 개 망해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함께.
하지만 내 엑스트라의 삶을 위해, 조용한 삶을 위해 나는 그 시선을 최대한 무시했다. 쳐다보려면 봐라, 난 너 안 볼란다-, 뭐 이런 심정으로. 그것도 정말, 말 그대로 하루 이틀이어야지. 근 2주 내내 그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자니 호기심이 들고야 마는 것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날 이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쳐다보나-, 하는 호기심 말이다. 시선의 주인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고 나서야 나는 내게 따라붙은 시선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일은 두고두고 후회할 법한 일이 되어버렸다. 오죽 놀랐으면 수업 시간인데도 히끅! 하는 딸꾹질 소리를 내겠냐고. 이유진이 괜찮냐며 내 등을 두드려 줄 때의 심정이란, 콱 혀 깨물고 이 소설 속에서 탈출하고픈 심정이었달까.
"……."
이유는 간단했다. 하필 눈이 마주친 사람이 박지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박지민 말이다. 남주인공 후보들 중, 가장 유력한 남주인공 후보…! 좆됐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런 생각부터 들었더랬다. 조용히 살고 싶은데 세상이 도와주질 않아요, 언젠가 읽은 소설 주인공이 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엑스트라로 조용히 살고 싶은데 남주가 도와주질 않아요. 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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