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자, 자 잠시만요..."
"음?"
"송구스럽습니다만, 저희 왜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
낯선 남자는 그제야 얼굴을 뒤로 내빼며 웃음기를 띈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지금 땅바닥에 초라하게 주저앉아 있지. 손바닥에는 금방 긁힌 듯한 쎄한 통증과 찬바닥의 촉감이 은은했다. 혼란스러운 권여주는 최대한 상황을 이해해보려 했다. 이해. 이해. 이해. 그러자 대뜸 아까 그 남자가 손을 뻗어왔다. 아니, 역시 이해가 안 됩니다.

"일어나요. 바닥도 찬데."
"..."
어째서, 어째서 이런 잘생긴 남자가 내 26년 모태솔로 인생에 예고도 없이 나타난 거죠?
미연시인 줄 알았는데
W. 연망
처음에는 정신나간 꿈인 줄 알았다가, 두세 번씩 생각을 거듭한 후에야 떠올랐다. 단골이 된 책방에서 얼결에 어떠한 게임 CD를 주워왔다는 사실을. 제목 공란에다 표지도 시컴죽죽한 게 누구의 수요도 없을 법한 게임을 주인 아저씨가 세상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며 손수 끼워주시는 바람에... 반지의 제왕 시리즈 3권과 함께 가져오고야 말았던 건데. 아무튼, 권여주는 호기심에라도 그걸 플레이하면 안 됐다.
"일어났더니 웬 게임 속이라니... 게임 속..."
《우연히 마주친 너》
~메인 남주 1 [김태형]과의 첫만남 갱신~
호감도가 3%로 올라갔습니다.
"...그것도 미연시."
아까부터 눈앞에 아른거리는 핑크빛 상태창에 대고 여주가 탄식을 뱉는다. 일단 본인은 회사 출근을 앞둔 일요일에 이 사달이 벌어져 매우 곤란한 상태다. 이게 꿈이면 제발 출근 4시간 전에는 내보내주길. 아니면 그냥 여기서 살게 해줘. 파워 통근러 권여주가 주문한 아아를 끌어안고 꺼이꺼이 운다.
게임 속 세상은 어떤 대학교를 배경으로 한 듯하다. 당연히 여주 본인도 대학생이고. 스물여섯에 대학을 다니기엔 심히 늦은 게 아닌가 우려되었지만 상태창 비스무리한 것이 알려준 바로는 자신이 스무살의 새내기...란다. 이거 좋은 건가? 여주는 아무 생각 없이 셀카를 오백만 장 찍었다. 일단 푸릇푸릇 젊게 나와서 기분 좋았다.
"읏 따가."
갑자기 손바닥에 느껴지는 아릿한 감각에 권여주가 흠칫한다. 보니까 아침에 다쳤던 흔적이다. 그러니까, 이 미연시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바닥에 넘어져서 생긴 상처 말이다. 그때 봤던 얼굴 참... 잘생겼었는데. 멍때리고 있으려니 상태창이 삐빅, 과한 효과음을 내며 다시금 튀어나왔다.
《대학생의 본분》
Mission
오후 수업이 정각 2시에 시작됩니다.
2시가 되기 전까지 사범대 219호에 도착하세요.
성공 시- 메인 남주 2와의 만남
실패 시- 강의시간 1시간 추가
성공보다는 실패 벌칙에 초점을 맞춘 그녀가 빛보다 빠르게 사범대를 향해 튀어갔다.
***
시작 2분 전 세이프. 길도 모르면서 어찌나 간절히 뛰어왔는지 목에서 비릿한 피맛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여주는 간신히 뒷자리를 선점하고 책상에 드러누웠다. 친구가 있음 대리라도 맡겼을 텐데 여기 온 뒤로 강제 인간관계 삭제 당해서 아는 사람이 1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가족들도 없는 거네. 말도 안 돼. 우리집 뽀삐도? 이런 대미친, 말도 안 돼. 뒤늦게 현실을 직시하여 한껏 우울해진 권여주 옆으로 누군가 몸을 밀어넣었다.
"저기요."
"느에?"
"출석 불렀어요?"
"어 아뇨, 아직요."
"감사합니다. 초콜릿 드실래요?"
얼결에 여주가 뻗은 손 위로 abc 초콜릿이 하나둘씩 떨어져내렸다. 넷, 다섯, 여덟, 아니 그만. 저기요.
"그냥 식사를 하라고 하세요."
"식사를 사달라고요?"
"예?"
초콜릿 무더기에 손을 봉인당한 권여주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팩 돌렸다. 그 순간 마주친 캠퍼스 훈남.

"그러죠 뭐."
오 마이 갓. 어찌나 훈훈하던지, 여주는 단번에 이 사람이 그 메인 남주 2라는 것을 미리부터 알았다.
《그 사람은 메인 남주가》
아닙니다.
근데 아니라네요. 참나...
***
메인이 아니면 어때. 스무살 여주(에 빙의한 스물여섯살 여주)는 사심을 잔뜩 품고 한낱 연하 엑스트라에게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 왜. 뭐. 어쩌라고. 권여주는 혼자 찔려서 허공에 대고 째려본다.
"어느 학과세요? 이번에 수업에서 처음 본 것 같은데."
"어... 저요. 저는요. 그게요..."
현생에서는 경영을 졸업했긴 한데, 게임 속에서라면 뭔가 바뀐 게 있을까 싶어 여주가 괜히 말을 늘인다.
"아, 경영?"
"네? 어떻게 아셨어요?"
"과잠에 문구가 있어서요. 제 친구랑 같은 과네요."
남자가 여주의 옷을 가리키며 푸스스 웃었다. 그러고 보니 과잠을 입고 있었네. 권여주가 어색하게 따라웃으며 포크를 입에 물었다.
"근데 아까 이름을..."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안 했네. 저는 박지민이에요."
"저는 권여주요. 1학년."
"그렇게 보여요."
무슨 뜻이지. 어려보인다는 쪽이라면 마냥 좋겠지만, 맥락상 풋내기 같아 보인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여주가 약간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민을 쏘아보자, 그는 아까 전부터 머금고 있던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푸하하 웃고 만다. 이 양반이 진짜... 사람 얼굴을 보고 왜 자꾸 쪼개세요. 쪼개지고 싶으세요?
"앞으로 종종 연락해도 돼요? 오늘처럼 밥 먹고, 어차피 수업도 겹치니까."
"네."
주책맞은 권여주는 0.3초만에 마음을 바꿔버리고 마셨다.
***
다시 말하지만 권여주는 모태솔로다. 이성에 대한 경험이 티끌만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 하루동안 훈남을 둘이나 영접하고, 심지어 하나랑은 단둘이 마주 앉아 밥까지 먹었다니. 것도 얻어먹었다니! 비록 게임이긴 하나 너무 경사스러워서 여주는 집 가는 내내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고역이었다. 미연시 최고. 책방 아저씨 최고. 룰루랄라 가던 와중에 여주는 자신이 홈리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 내 집이 어딨더라?"
보다 못한 상태창이 띠링, 떠올라 기숙사로 가라고 점지해준다. 고맙다. 근데 기숙사가 어디지? 얼빠진 혼잣말과 함께 저 멀리 캠퍼스 내 호수공원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데,
"읔!"
뻑치기를 당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뻑. 소리가 났다. 넘어지진 않았으나 이미 오른팔에 감각이 없었다. 이건 에잇톤 덤프트럭이 갖다박은 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돼 오마이갓...
"헉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영혼이 빠진 낯으로 덜렁거리는 팔을 움켜쥐고 있는 와중 방금 들이박은 덤프트럭이 우레와 같은 기세로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지금 제가 팔이 존느 으스러진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바로 병원에 가시죠!!!"
"네?"
덤프트럭이 권여주를 아령처럼 번쩍 든다. 무력하게 허공에 떠 있는 그 순간 반짝이는 상태창.
《삐뽀삐뽀 환자 발생》
~메인 남주 2 [김남준]과의 첫만남 갱신~
호감도가 2%로 올라갔습니다.
이봐요. 내려줘요.
***
놀랍게도 덤프트럭, 아니 김남준 씨는 (부탁한 적 없는) 여주의 보호자 격이 되어 옆에서 의사 소견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치료비도 죄다 내주고 갔다. 선인이라기엔 오른팔이 진지하게 너덜너덜해질 뻔했으니 권여주는 대충 악한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결론짓고 만다. 그리고 메인 남주...라고 했었지. 덩치가 우람한 게 체대생인 건 통성명 안 해도 알겠고. 제대로 눈 뜨고 봤을 때 제법 훈훈하니 잘생겨서 여주가 붕대를 둘둘 감고 병원을 나섰을 땐 이미 마음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번호를 또 주고 갔네."
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쪽지를 슬그머니 펼쳐본다. 모태솔로 인생에 벌써 두 개의 남자 연락처를 획득할 줄이야. 홀린 듯 저장한 권여주는 머리 한번 긁적이고 선톡을 보내본다.
[자기요]
[아니 오타]
[저기요]

[헉 넵]
[제가 정말 죄송행ㅎ]
[죄송해서 한번 더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혹시 치료비가 더 필요하시다든가...]
[아니]

[제발 고소만은ㅠㅠㅠㅠㅠㅠㅠㅠ]
[아니 왜 쫄아요 그거 아니에요]
[그냥]

[넵ㅠㅠㅠㅠㅠㅠㅠㅠ]
[아까 저도 앞을 잘 못 보고 해서]
[그쪽은 괜찮은가]
[싶어가지고]

[저요????]
[어]
[어...]
뭐지? 저 의미를 알 수 없는 점점점은. 그 뒤에 한동안 답장이 없어 뻘쭘했던 여주는 눈만 끔벅인다. 그리고 몇 초 뒤,
《덤프트럭의 사랑》
메인 남주 2[김남준]이 당신의 넓은 아량에 감동합니다.
호감도가 77%로 올랐습니다.
"이 사람 미친 건가...?"
여주는 잘 가고 있던 길에서 우뚝 멈춰선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남자가 존재했던가, 하고 외려 본인이 더 감탄할 판이었다. 아플 때 약이라도 챙겨주면 아주 결혼하자고 하겠어. 넋놓고 중얼거리다가 권여주는 문득 그것도 뭐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미친, 나도 미친 건가. 그나마 멀쩡한 왼팔로 뺨을 짝짝 때린다.
***
이게 진짜 게임인지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꼬박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즉 권여주 자신이 이곳에 영원히 갇히게 될 가능성도 고려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게임은 클리어하면 끝나니까. ...그냥 아무나 잡고 호감도를 올려버리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러면 정말 김남준 씨와의 결혼을 목표로 해야 하는 걸 수도. 시내 한가운데 횡단보도의 빨간불이 픽 꺼졌다. 뒤이어 아무 생각없이 건너가려던 여주의 귀에 무언가 희미한 소리가 맴돌았다.
삐...
삐......
그리고 멀리서도 눈에 띄는 평소보다 번잡한 학교의 정경과, 여기저기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학생들. 무분별하게 쳐진 노란 폴리스 라인.
아까... 응급차 소리였던가?
경찰들이 가로막고 있던 곳은 아까 지나친 호수공원쪽이었다. 상황이 이상해졌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상태창이 기다렸다는 듯 띄워졌다.
《의문의 죽음》
Mission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 죽었습니다.
시간 내로 그 사람의 신원을 밝혀내고, 사인을 찾으십시오.
6일 2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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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23: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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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